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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7화 (17/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7화

“우선 불부터 켜야겠어요. 아무것도 안 보여서…….”

루시가 벽을 더듬으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곧 그녀가 낡은 못에 걸려 있던 촛대를 찾아내 불을 붙였다. 어둡던 서고 안이 곧 밝은 오렌지빛으로 가득 찼다.

“초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루시가 안도하며 말했다.

이어 그녀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녀는 들고 온 책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루시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책들이 착착 소리를 내며 가지런히 쌓여 갔다. 필릭스가 딴생각을 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녀는 성실한 도서 부원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도 도와줄게.”

괜히 민망해진 그가 다가갔다.

“그럼 책장 사이를 확인해 주실래요?”

루시가 책을 한 권 집어 든 후 페이지를 차르륵 넘겨 보였다.

“가끔 학생증 같은 게 나오거든요. 주변에 있던 물건을 책갈피로 쓰다가 잊어버리고 그냥 반납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

필릭스가 가까이에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가 책장을 팔랑이며 넘기자 책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학생증은 아니었다.

[아르켈 대머리 되라

아르켈 대머리 되라

아르켈 대머리 되라…….]

똑같은 문장이 종이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아르켈은 깐깐하고 점수를 짜게 주기로 유명한 역사 담당 선생이었다.

“그게 뭐예요?”

루시가 물었다. 필릭스가 준 종이를 넘겨받은 그녀가 ‘풋!’ 하고 웃음을 참았다.

“아르켈 선생님은 정말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매번 이런 저주성 쪽지가 나온다니까요.”

“매번?”

“네.”

루시가 자신이 본 것들을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설사병에 걸리라는 저주도 있었고, 반대로 일 년 내내 변비를 앓으라는 저주도 있었어요. 엉덩이에 종기가 백 개 나라는 저주랑 귀에서 장수풍뎅이가 나오라는 저주도 있었고…….”

……이 정도면 아르켈이 여태껏 살아 있는 게 기적 아닌가.

루시가 말해 주는 가지각색의 저주를 들으며 필릭스는 생각했다.

아르켈 선생을 향한 저주의 쪽지 외에도, 책장 사이에서는 별의별 것들이 등장했다. 대부분이 영수증, 낙서 쪼가리, 사탕 껍질 같은 쓰레기들이었지만 개중엔 누군가 끼워 놓고 깜빡해 버린 러브레터 같은 것도 있었다.

러브레터라…….

필릭스가 낯간지러운 고백이 적힌 편지를 들고 서서 바라보았다.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너무해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필릭스가 돌아보았다. 루시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가 든 편지를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이 용기 내서 고백한 편지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취급하다니…….”

“그러게.”

필릭스가 편지를 반으로 접어 모아 둔 종이 뭉치 위에 올렸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써 내려갔을 그 편지는 의도치 않게 책갈피로 사용되었다가 이제는 쓰레기가 되어 버려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내 마음을 상대방이 이렇게 취급한다면 참 슬플 거예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루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표정이 우울해 보였다.

“누구한테 고백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필릭스가 불쑥 던진 질문에 루시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네?”

“……왜 그렇게 놀라?”

“……안 놀랐는데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할 셈이었나.

필릭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아드리안?

그의 표정이 금세 심각해졌다.

아니다. 갑자기 루시에게 그런 대범한 용기가 생겼을 리 없다. ‘문학의 밤’ 때도 함께 가자고 말도 못 꺼냈던 앤데.

필릭스가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불안한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책장을 거칠게 팔랑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책 속에 끼어 있던 쪽지 하나가 테이블 멀리까지 휙 날아갔다. 필릭스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하, 인기투표?”

쪽지를 펼쳐 본 그가 기가 찬 웃음을 뱉어 냈다.

그 쪽지에는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인기 순위가 매겨져 있었다.

“누가 이런 유치한 짓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필릭스의 눈이 자연스럽게 순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1위는 후작가의 영애이자 학생회인 클레어 헤밀턴이었다. 근소한 차이로 로제 밀라드가 2위였다. 3위부터는 그가 잘 모르는 여학생들의 이름뿐이었고, 루시의 이름은 없었다.

“뭐야.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은 거야?”

필릭스가 불만 섞인 음성을 뱉어 냈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루시의 이름이 없을 수가 있지?

“다들 눈이 삔 것 아냐!”

그가 종이를 구겨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루시가 냉큼 종이를 집어 들고 펼쳤다.

“……역시 선배님은 로제 선배가 1위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종이를 확인한 그녀의 말에 필릭스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로제 밀라드?”

필릭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쩌다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거야? 내가 시장 바닥에서 로제와 싸우는 거 못 봤어?”

“싸운 거였어요? ……제 눈엔 사이가 좋아 보이시던데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루시 키넌이 정의하는 ‘좋은 사이’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그런 사이를 말하는 걸까? 어떻게 그 광경을 보고도 사이가 좋다는 얘기가 나오지?

“서로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루시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농담? 장난?

필릭스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 갔다.

맹세코 로제 밀라드에게는 그 어떤 화기애애한 농담 한마디조차도 던진 적이 없었다.

“그거 이리 내.”

그가 루시에게서 쪽지를 빼앗은 뒤 가차 없이 구겨 버렸다. 그리고는 근처의 ‘폐기 도서’라고 적힌 상자의 뚜껑을 열고 쪽지를 쑤셔 넣었다.

괜히 쓸데없는 게 나와선.

서고 안에는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루시는 여학생 인기 순위가 적힌 쪽지가 발견된 후로 아무 말 없이 책 정리에만 몰두했다.

왜 어색해진 것인지 모를 분위기 속에서 필릭스 역시 계속 책장만 펄럭였다. 루시는 기분이 안 좋다 못해 우울해 보였다.

그런 불편한 분위기를 한 번에 날려 버린 뜻밖의 물건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

책장을 넘기던 루시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필릭스 선배…….”

루시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필릭스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자신이 발견한 것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여기 선배의 성적표가…….”

“아.”

필릭스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성적표를 낚아챘다.

“이게 왜 거기에 껴 있지.”

필릭스는 성적표에 적힌 자신의 이름과 성적을 확인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그때’의 성적표였다.

“선배…….”

루시가 성적표를 빼앗긴 빈손을 여전히 허공에 든 채 중얼거렸다.

“어떻게 한 과목만 빼고 전부 F일 수가…….”

루시의 말대로 성적표에는 ‘검술’을 뺀 전 과목이 F로 기록돼 있었다. 지난 학기 중간고사에서 그가 모든 시험의 답안지를 백지로 냈기 때문이다.

필릭스가 얼른 성적표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필릭스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루시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필릭스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강박증이 있었다. 그것은 쌍둥이 동생과 경쟁 구도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극도로 꺼려한단 점이었다. 아드리안과는 성적이 조금만 비슷해도 마음이 불안했다.

자신이 동생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을 칭찬하는 대신, 실망한 아드리안을 위로하기에 바빴다.

아드리안에게 대부분을 양보하는 그의 버릇은 그 광경을 보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가 아드리안을 이기지만 않는다면 어머니도 괜스레 마음 아파할 일은 없을 테니까.

때문에 아카데미 입학 후엔 일부러 시험 문제를 조금씩 더 틀려 왔다. 그 덕분에 수석은 언제나 아드리안의 차지였다. 그래도 필릭스는 상관없었다. 비록 성적은 제대로 받지 못했을지언정 심적으로는 편했으니.

문제는 이를 알게 된 공작의 반응이었다.

“차기 베르크 공작이 고작 아카데미 수석 자리 하나 꿰차지 못하다니! 네 동생 하나 이기지 못하면서 앞으로 무슨 수로 사람들을 부리겠다는 거냐!”

공작은 필릭스가 아드리안의 성공을 순순히 축하하기보다, 뛰어넘고 이겨야 하는 경쟁자로 여기길 바랐던 것이다.

자신이 아드리안보다 못하길 바라는 어머니와, 아드리안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아버지 사이에서 필릭스는 늘 갈팡질팡했다.

모든 답안지를 백지로 낸 건 그 과정에서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 이후 성적표를 책상 위 아무렇게나 놔둔 것이 화근이었다. 설마 그게 책 속에 끼어 있다가 지금 이 순간 루시의 손에서 발견될 줄이야.

2학년 수석이자 단 한 번도 낙제 점수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루시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한 과목만 빼고 전부 F…….”

그녀가 자리에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발로 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점수가…….”

그러나 다음 순간, 루시는 무심코 내뱉어 버린 말에 스스로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죄, 죄송해요!”

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필릭스에게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죠! 너무 놀라서 그만……!”

“됐어. 충격적일 만도 하지.”

“그런 뜻이 아니라……!”

루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괜찮아. 위로하지 마.”

필릭스가 풀 죽은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루시가 더욱 난처해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

자신의 성적표가 적나라하게 공개되어 부끄럽던 것도 잠시, 필릭스는 그녀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이 슬슬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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