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6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귀가 몇 배는 밝아지게 된다. 어디서든 그 사람의 목소리를 구분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단어들 속에서 그 사람의 이름만이 또렷이 들리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루시가 서고로 책을 옮기는 걸 도와주고 있었을 뿐이야!”
오전 수업을 끝낸 후, 기숙사로 돌아가던 필릭스가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아카데미 구관. 낡고 오래된 건물인 탓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
그 구관 홀 안에서 책을 한 아름 든 콜린 코너가 2학년으로 보이는 선도부 학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 길로 쭉 가면 금방인데 뭐 하러 돌아가!”
콜린이 답답하다는 듯 선도부에게 따지고 들었다.
“금방 지나가기만 할 거라니까?”
“교칙상 안 된다고, 콜린! 교장 선생님께서 출입을 금지하셨어!”
“한 번만 봐주라! 이렇게 무거운 책을 들고 그 먼 거리를 돌아가야겠냐? 너만 눈감아 주면 되잖아!”
“안 된다고.”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통행이 금지된 구관 홀을 통과하려다 걸린 모양이었다. 지름길로 가려는 콜린과 절대 안 된다는 선도부 사이의 입씨름이 한창 이어지는 중이었다.
콜린 코너가 누구와 설전을 벌이든 그건 필릭스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콜린 옆에 루시도 함께 서 있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품에 책을 한가득 들고 있던 루시는 난감한 표정으로 콜린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냥 돌아서 가자, 콜린. 역시 교칙을 어기는 건 좀…….”
“어휴! 이 많은 책을 들고 어떻게 빙 둘러 가? 게다가 도서관에 옮길 책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한 번만 봐주라, 에밀리! 책 옮기다가 팔 빠지겠다고!”
콜린이 선도부 학생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애원했다. 하지만 야무진 얼굴의 그 여학생은 단호한 말투로 맞받아쳤다.
“그러니까! 그건 도서부 사정이잖아. 난 선도부니까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 벌점을 부과할 수밖에 없어!”
또다시 선도부와 콜린 사이에 지지부진한 말싸움이 벌어지려 했다. 아무래도 콜린이 말로 저 여학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필릭스는 창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단추를 목까지 걸어 잠그고 느슨한 넥타이를 죄어 올렸다. 그런 다음 한창 말싸움 중인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에밀리?”
필릭스가 콜린에게서 주워들은 선도부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다.
“아드리안 선배!”
에밀리는 그를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더니 교칙을 어긴 두 명을 당장 일러바쳤다.
“구관 홀을 몰래 지나가려던 두 명을 잡았어요! 근데 한 번만 봐 달라고 자꾸 생떼를 쓰지 뭐예요!”
에밀리가 품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매서운 눈빛으로 펜을 쥔 그녀는 당장이라도 콜린과 루시의 이름을 적고 벌점을 부과할 태세였다.
“잠깐, 에밀리.”
필릭스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지금 도서부에서 오래된 책들을 정리 중이거든.”
그가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설명했다.
“서고로 책을 옮기는 동안만 구관을 지나갈 수 있도록 출입 허가증을 받아 놓았어. 학생회장인 내 이름으로. 너도 알다시피 도서관에서 서고까지 돌아서 가려면 거리가 상당하잖아?”
필릭스가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 도서부장인 내가 진작 선도부에 귀띔해 줬어야 했는데. 허가증을 어디다 뒀더라…….”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지던 그가 곤란한 얼굴로 빈손을 뺐다.
“도서관에 두고 왔나 보다. 지금 가져올게.”
그러자 에밀리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러더니 루시를 향해 말했다.
“그럼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 루시. 난 그것도 모르고. 아무튼 이 길로 지나가도 좋아.”
그녀가 순순히 길을 비켜 주었다.
“흥! 거봐!”
콜린이 기세등등해진 얼굴로 에밀리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어서 가자, 루시! 고마워요, 아드리안 선배!”
그러나 콜린은 한 발짝도 떼 보지 못하고 필릭스의 손에 뒷덜미가 잡혔다.
“으헉!”
콜린이 놀란 표정으로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서, 선배님……?”
“넌 누구지?”
필릭스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콜린이 미간을 찡그렸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 콜린이잖아요!”
“그게 누군데.”
콜린이 필릭스의 손아귀에 잡힌 채 발을 버둥거렸다. 그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예요, 저! 콜린 코너요! 루시 친구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필릭스가 짐짓 고민하는 체하며 손으로 턱을 쓸었다. 이어 그가 콜린이 들고 있던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들었다.
“출입 허가증은 도서 부원들만을 위한 거라서. 넌 우리 부원이 아니니, 따지고 보면 교칙을 어긴 게 맞잖아?”
“예에?”
필릭스가 에밀리에게 눈짓했다.
“계속 말대꾸하면 벌점 추가해.”
“네, 선배님.”
“벌로 복도 청소를 시켜도 좋고.”
“자, 잠깐만요!”
콜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필릭스의 옷자락을 붙들려 했다. 하지만 그 앞을 에밀리가 가로막았다.
“어딜 지나가려고!”
불행히도 콜린은 말싸움은 물론 체격으로도 에밀리를 이길 수 없었다.
“루시! 아드리안 선배!”
에밀리의 팔에 목이 휘감긴 콜린이 애타게 둘을 불렀다.
“가자, 루시.”
그런 그를 매정하게 외면하며 필릭스가 루시를 이끌었다.
* * *
“……그동안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빠져나가셨어요, 필릭스 선배?”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콜린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즈음, 루시가 물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필릭스를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상습범 같잖아.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야.”
필릭스가 조금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베르크 공자에게 벌점을 부과하겠다고 나서는 겁 없는 선도부원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학생회장을 사칭하는 건 좀……. 아드리안 선배가 알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요?”
루시가 조심스레 물었다. 필릭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아드리안도 불리한 순간엔 나인 척할 때가 있을걸?”
“아드리안 선배가요? ……설마요.”
쌍둥이 동생의 정직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루시의 말에 필릭스가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지난 학기 만우절 때, 디트리 선생님의 행성 모형으로 공차기 한 사람, 다들 나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거 아드리안이야.”
“네에?”
“정말이야. 아드리안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내가 대신 입 닫아 준 거지.”
“……말도 안 돼요.”
루시가 또 한 번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말했다.
“왜 말이 안 돼? 사람이 학생회장에다 매번 수석만 하면 그렇게 돌아 버릴 수도 있는 거야. 걔도 스트레스 풀 시간은 있어야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듯이 루시가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자꾸만 씰룩거렸다.
“……그거 선배 맞잖아요.”
웃음을 참느라 두 뺨이 발그레해진 그녀가 말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걸요. 제가 봤다구요.”
“아아, 그래?”
필릭스가 씩 웃었다.
“그래, 거짓말이야. 사실 그거 나 맞아.”
그가 순순히 인정했다.
루시 네가 봤다면야.
네 눈을 속일 수는 없지.
* * *
얼마 후, 그들은 서고 앞에 도착했다.
새로 지은 도서관과는 달리 이들이 가려던 서고는 구관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었다.
낡은 목조 건물 여기저기에 늘어진 거미줄이 음산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철컥.
손잡이를 당기자 경첩이 부실한 나무 문이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창문 하나 없는 서고 안은 한낮인데도 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바닥에서는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책은 여기에 두시면 돼요.”
필릭스는 루시가 가리킨 나무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책을 내려놓았다.
“정리는?”
“나중에 도서 부원들이 와서 함께할 거예요.”
루시가 자신이 들고 온 책도 마저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그녀가 필릭스를 돌아보며 인사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쾅!
열어 놓았던 문이 바람에 떠밀려 요란하게 닫혔다. 서고 안이 순식간에 빛과 차단되며 어둠 속에 휩싸였다.
깜짝 놀란 루시가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바람 때문일 거야.”
필릭스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는 벽을 더듬어 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철컥철컥.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잡이를 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거 안 열리는데.”
“네?”
루시가 어둠 속을 더듬어 다가왔다. 그녀 역시 문을 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갇힌 거예요……?”
불안해 보이는 루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다시 해 볼게.”
필릭스가 손잡이를 재차 당겨 보았다.
덜컹덜컹!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만 할 뿐,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실 이 오래된 나무 문짝은 군데군데 썩어 있는 데다 경첩의 이음매도 헐거워져 있었다. 필릭스가 발로 걷어차기만 하면 충분히 부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릭스는 생각했다.
이건 기회다.
오늘 우연찮게 루시와 마주치고, 손쉽게 콜린 녀석을 따돌리고, 이젠 단둘이 서고에 갇혀 버리기까지…….
필시 행운의 정령이 날 돕고 있는 거다.
어둠 속에서 그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몇 번 더 손잡이를 당겨 보는 척하던 그가 천천히 루시를 향해 돌아섰다.
“문이…… 꿈쩍도 안 하네.”
그의 입에서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네?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단둘이 있는 거지, 뭐.
그가 검은 속내를 감추며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볼까?”
제발 아무도 오지 마라.
서고가 어두운 탓에 루시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