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5화
그날 밤, 필릭스는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마음에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자꾸만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부들부들한 연갈색 머리와 신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덤불 아래 숨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루시 키넌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떨치려 하면 할수록 집요하게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자신이 선물한 모자를 받고서 수줍게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할 때,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은, 그 가게에 있는 모든 옷과 신발, 그리고 장신구까지 모두 너에게 선물하고 싶었노라고.
그만큼의 선물을 너의 품에 안겨 주었어도 나는 만족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마침내 필릭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루시 키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루시 키넌의 웃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다. 루시 키넌이 더 이상 나를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시 키넌과 주말마다 타운으로 데이트를 나가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빠져 있는 그의 얼굴에는 창밖의 가을밤만큼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그러나 루시 키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루시 키넌이 좋아하는 사람은…….
“타운에는 잘 갔다 왔어?”
그래, 이 녀석이지.
필릭스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아드리안을 씁쓸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이에 아드리안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까는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실실대더니.”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는 필릭스에게 아드리안이 거듭 물었다.
“약재상에는 잘 갔다 왔냐고. 아무래도 루시의 시간을 낭비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네.”
“……걱정 마. 그 애는 널 위해 알레르기 약을 만드는 시간조차 즐거울 테니까.”
필릭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런 그의 말을 별 의미 없이 흘려넘겼다.
“아까 보니 로제도 함께 있던데.”
아드리안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름을 듣게 된 필릭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너 설마 로제랑 데이트하려고 루시를 이용한 건 아니지?”
이어진 아드리안의 말에 필릭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가 침대에서 펄쩍 튀어 오르며 진심으로 억울한 듯 소리쳤다.
“이용하다니! 오히려 방해를 받은 건 나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필릭스의 외침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릭스는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런 그를 아드리안이 묘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 이거나 읽어 봐. 편지야.”
아드리안은 필릭스에게 편지 하나를 건넸다.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봉투에 찍힌 베르크가의 문장.
필릭스가 누운 채로 편지를 펼치자, 베르크 공작 부인의 정갈한 글씨가 가지런한 열을 이루며 종이를 채우고 있었다.
‘아드리안, 필릭스에게.’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새 학기 생활에는 잘 적응하고 있는지,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알레르기 증상은 괜찮은지,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마지막 학년이 너무 바쁘지는 않은지 같은 어머니의 사소한 걱정거리들이 담겨 있었다.
필릭스는 편지를 다 읽은 후 다시 아드리안의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는 언제나 어머니의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아드리안에게 도로 넘기곤 했다. 그 편지 내용은 결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닐 테니까.
베르크 공작 부인은 단 한 번도 쌍둥이 아들에게 따로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항상 ‘아드리안과 필릭스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만을 썼다.
그것은 쌍둥이니까 둘을 하나로 친다거나, 그들을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일차원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베르크 공작 부인의 편지는 전적으로 아드리안만을 위해서 쓰여졌다. 필릭스의 이름은 어쩔 수 없이 쌍둥이라는 이름으로 그 뒤에 덧붙여진 것일 뿐.
분명 자신이 형인데도 왜 편지에는 항상 아드리안의 이름이 먼저 써져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생각하기를 그만둔 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 이유를 필릭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보다 아드리안을 더 사랑한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필릭스는 찌르르 가슴이 아파 오면서도, 피식 헛웃음이 났다.
우리를 제대로 구분도 못 하면서.
아직도 종종 우리를 헷갈려 하며 이름도 잘못 부르면서.
그런데 어떻게 더 좋아하는 아들이 있을 수 있지?
누가 누군지 분간도 못 하면서 어느 한쪽을 더 사랑하는 베르크 공작 부인의 편애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공작 부인은 종종 두 아들을 혼동하여 필릭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곤 했다.
‘아드리안, 자, 어서. 필릭스가 오기 전에 먹어 치워라.’
‘아드리안, 이걸 받았다는 것은 필릭스에게는 비밀로 해라.’
‘아드리안, 방금 해 준 얘기는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필릭스에게 말해서는 안 돼.’
자신을 따돌리듯 동생 아드리안과만 깊은 비밀을 만드는 어머니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필릭스는 혼란스럽고 슬펐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이물질이 된 느낌이었다.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틈에 끼어든 기분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와 아드리안 사이의 방해꾼이 된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은 또한,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주저 없이 아드리안을 택했다. 필릭스는 그 모습을, 8년 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공작과 공작 부인 사이에 깊은 불화가 생겼을 즈음이었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며 심하게 싸웠으며, 공작 부인은 방에 들어가 잠시 눈물을 쏟아 냈다.
공작이 성난 얼굴을 손으로 쓸며 저택을 나가 버린 후, 공작 부인은 다시 방을 나왔다. 손에는 짐을 싼 가방이 들려 있었다.
유일하게 그 모습을 마주한 필릭스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엄마, 어디 가요?”
공작 부인은 불안하고 멍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입술은 주문을 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만 달싹거렸다.
공작 부인은 이내 필릭스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아들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아드리안! 이리 와!”
“어디 가는 거예요?”
“어서 따라와!”
열 살의 어린 필릭스는 어머니의 우악스런 손에 붙들려 끌려가면서도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어머니가 종종 자신을 아드리안으로 착각할 때마다 잠자코 있었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고. 분명 어머니는 물론 그 자신도 나중에 큰 상처를 받게 되리라고.
“엄마, 나 아드리안…….”
그러나 사실을 밝히려던 필릭스는 공작 부인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유령처럼 퀭한 눈꺼풀 사이로 툭 불거진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대는 공작 부인의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저택에서 도망치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신의 손에 붙들린 작은 아들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서둘러 마차 안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드리안’을 밀어 넣은 뒤, 급히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인 것 같았다.
한 번 출발한 마차는 결코 멈추지 않고 길을 내달렸다. 언덕과 호수가 창밖을 스쳐 지나가고, 세상 위로 어둠이 살짝 내려앉았을 때가 되어서야 필릭스는 용기를 냈다.
“엄마, 나 아드리안 아니야.”
줄곧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공작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필릭스를 보았다.
필릭스는 그 상황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마차 밖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눈만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나 필릭스야.”
그렇게 말한 후, 필릭스가 다시 천천히 눈을 뜨며 생각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엄마가 다행이라고, 아드리안이 아니라 네가 함께 있어 너무나 다행이라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며시 열린 눈꺼풀 사이로 어머니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필릭스의 가슴 속에도 너무나 선명한 상처가 깊이 아로새겨졌다.
공작 부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실망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망연자실한 어머니의 표정은, 필릭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에 필릭스는 심장이 발밑까지 쿵 내려앉는 듯했다.
미리 말했어야 했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자신은 아드리안이 아니라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드리안은 저택 안에 있노라고 말했어야 했다.
필릭스는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마차는 벌써 공작 부인의 친정인 에버른가의 영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공작 부인의 아버지인 에버른 후작은 고향으로 도망치듯 돌아온 자신의 딸을 심하게 꾸짖었다.
“남편과 싸웠다고 친정으로 도망쳐 와 버리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이게 무슨 가문의 망신이란 말이냐!”
평소 같으면 벼락같은 아버지의 꾸중에 고개를 조아렸을 공작 부인도 이번에는 만만치 않게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공작가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방으로 돌아간 뒤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그녀는 한 달 내내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필릭스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에버른가의 정원과 호숫가와 풀밭을 혼자 거닐며.
이곳에 온 게 내가 아니라 아드리안이었다면, 어머니가 덜 슬퍼했을까.
그랬다면 저렇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드리안과 이 정원을 산책하며, 어린 시절 좋았었던 추억 따위를 나누며 울적한 기분을 달랬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리고 한 달 뒤, 공작이 에버른가에 나타났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필릭스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아버지와의 그리 길지 않은 대화 끝에 어머니가 한 달 만에 밖으로 나왔다는 것뿐이다. 그녀는 필릭스를 불러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공작 부인의 한 달간의 가출은 끝이 났다.
공작가로 돌아온 필릭스는 애써 그 일을 잊어버리려 했다. 기억해 봐야 또다시 상처만 될 뿐, 좋을 게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가끔 필릭스는 문득문득 그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하필 아드리안일까.
우린 얼굴로, 키도, 목소리도 똑같은데.
어머니는 어쩌다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요즘은 그 질문이 또 다른 의문을 낳아 필릭스를 괴롭게 만들었다.
왜 하필 아드리안일까.
우린 얼굴도, 키도, 목소리도 똑같은데.
루시 키넌은 어쩌다 내가 아닌 아드리안을 좋아하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