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4화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그들이 식당을 나왔을 때 거리는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어딘가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곳은 타운의 중앙 광장이 있는 쪽이었다.
인파 속에 섞여 광장으로 향하는 그들의 귀에 웅장하고 힘찬 행진곡이 들리기 시작했다. 큰 광장으로 나오자 무언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복작였다.
“와! 제국 기사단이에요!”
키가 작은 콜린이 까치발을 들고 서서 앞사람의 어깨를 넘어다보며 소리쳤다.
착착,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기사들이 광장을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은빛 갑옷과 붉은 망토가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우와, 멋있어!”
흥분으로 뺨이 붉게 달아오른 콜린이 감탄했다. 옆에 선 로제 역시 그들을 향해 넋을 뺀 얼굴로 말을 토해 냈다.
“뭐야, 저 근육들 좀 봐! 아카데미의 비실비실한 남자애들하곤 차원이 다르잖아?”
콜린과 로제는 기사단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사단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고, 하늘에는 꽃잎들이 함박눈처럼 내렸다.
이미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건만, 제국 기사단의 행진을 구경하기 위해 어디에선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몇몇 사람들이 앞자리에서 보겠다고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성난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중 한 남자가 필릭스와 루시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 때문에 둘 사이에 틈이 생기자 앞쪽으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루시가 이리저리 밀쳐지며 필릭스에게서 멀어지려는 찰나.
탁.
필릭스가 재빨리 루시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잘 붙어 있어.”
그의 말에 불안한 눈빛의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키가 작은 루시는 바위틈 속에 굴러떨어진 도토리 한 알처럼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필릭스가 품 안에서 보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몸집이 작은 그녀로선 영 버거운 상황이었다.
콜린과 로제는 필릭스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앞쪽까지 나아가 있었다.
“안 되겠다.”
필릭스가 그녀를 감싸 안고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 퍼레이드 행렬도 점점 멀어졌다.
인파 속을 무사히 빠져나온 루시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 틈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안색이 창백했다.
“괜찮아?”
필릭스의 걱정스런 물음에 루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만 떨어져 나왔음을 깨달은 루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콜린과 로제 선배님은…….”
“됐어.”
필릭스가 즉각 알 바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걔넨 알아서 빠져나오겠지. 우리끼리 먼저 가자.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야.”
필릭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콜린과 로제가 있는 쪽을 흘끔거린 루시가 그 뒤를 따랐다. 둘은 서둘러 시끌벅적하고 정신없는 광장을 빠져나갔다.
* * *
광장을 빠져나온 필릭스와 루시는 근처의 큰 대로를 걸었다. 그곳 역시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일대만큼 정신없지는 않았다.
대로 양쪽으로는 수많은 잡상인들이 가판대에 물건을 올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물건 좀 보고 가세요!”
“축제 기간 동안만 반값에 드립니다요!”
집에서 짜내 온 신선한 과일주스를 파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알록달록한 실로 만든 팔찌를 파는 사람, 병아리와 강아지를 파는 사람, 심지어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요상한 마도구들을 파는 사람까지 있었다.
흥미로운 눈길로 구경하며 가판대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종종 발길을 멈추고 물건을 사곤 했다.
잡상인들이 파는 싸구려 물건에는 영 관심이 없던 필릭스는 줄곧 앞만 보며 걸어갔다. 그러다가 옆에서 걷던 루시가 값싼 크리스털로 만든 장신구를 늘어놓은 가판대를 흘긋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다.
“구경하고 싶어?”
그가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루시는 손을 내저었지만 필릭스는 이미 가판대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싸구려 크리스털로 만들어졌지만 목걸이와 팔찌, 반지 등은 제법 아기자기하고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옆에서 함께 유심히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루시의 시선이 느껴져 필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별자리 목걸이랍니다.”
가판대의 주인이 목걸이를 소개했다.
“크리스털 안을 잘 들여다보세요. 각각의 달을 상징하는 별자리들이 들어가 있어요.”
주인의 말대로 크리스털 안에는 깨알보다 작은 금 구슬이 별자리 모양대로 들어가 있었다. 목걸이를 공중에 들어 올리자 햇빛을 받은 별자리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아가씨는 몇 월생이죠?”
주인이 루시에게 불쑥 물었다.
“5월생이요.”
“신사분은요?”
“10월생입니다.”
“그럼 엘리아케자리와 성검자리겠군요.”
주인이 한눈에 목걸이를 훑어본 후,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은색 줄 끝에 매달린 크리스털 속에서 엘리아케자리와 성검자리가 제각기 영롱하게 빛났다.
“두 분께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이건 연인들을 위한 목걸이로도 아주 인기가 많거든요.”
“연인들?”
필릭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시겠어요?”
주인이 목걸이를 내밀었다.
“두 개 다 살게요.”
대답은 뜻밖에도, 루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필릭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루시 키넌이 왜 내 별자리 목걸이까지?
심장이 두근거리던 것도 잠시, 그의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바보 같긴.
그는 잠시 들떴던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아드리안의 생일도 나와 같잖아.
루시는 구입한 목걸이를 품속에 잘 챙겨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필릭스의 마음속에선 묘한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괜히 아드리안의 생일까지 알려 주어 루시에게 연인 목걸이까지 사게 만들었다.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었다.
“딱히 연인 목걸이라 산 건 아니고…… 아는 친구도 성검자리여서요.”
삐딱한 표정의 필릭스를 본 루시가 해명하듯 말했다. 두 뺨이 발그레한 것이 거짓말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필릭스가 그녀에게 심술을 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루시가 그 목걸이를 누구에게 주건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유치한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걷던 그가 다시 멈추어 선 것은 음식을 파는 가판대 앞을 지날 때였다. 뒤따라오던 루시가 온갖 종류의 길거리 음식들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흘끔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필릭스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먹을 것에 몰래 정신이 팔려 있던 모습을 들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 순진한 얼굴이 단번에 필릭스의 기분을 바꾸어 놓았다는 걸.
그를 괴롭히며 좀처럼 떠나가지 않던 무거운 감정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걸었더니 다시 배고파지네.”
그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리고는 아이스크림과 솜사탕 등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자, 너무 많이 샀으니까 너도 먹어.”
그가 루시의 품에 음식들을 떠넘기듯 안겨주었다.
잠시 후, 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뒤따라오는 루시를 보며 필릭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루시의 사소한 말 한마디나 행동에 기분이 휙휙 바뀌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이 루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대로를 걷는 동안 해는 어느새 서산 근처까지 넘어가 있었다. 황혼 녘의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필릭스와 루시가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뒤였다. 사방이 어둑했다.
아카데미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정해진 통금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떡하죠? 통금 시간을 어겼으니 벌점을 받을 거예요.”
루시가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통금 시간이 지나 돌아온 경우엔 문지기 프레드 영감에게 이름을 말한 뒤 문을 열어 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동시에 꽤 큰 벌점이 부여되었다.
언제나 일등을 놓치지 않고 모범적인 루시 키넌에게는 상당히 신경 쓰일 만한 일이었다.
“이리 와.”
필릭스가 루시의 손을 잡고 벽을 돌아갔다. 곧 프레드 영감이 있는 곳에선 보지 못할 거리에서 필릭스가 멈추었다.
“여기서 담을 넘어가면 돼.”
“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방법이라는 듯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필릭스는 당황한 그녀를 두고 담 위에 손을 짚고 이미 뛰어 올라간 이후였다. 그는 조심스레 건너편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해가 져 버린 덕분에 어둡기까지 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자신과 루시의 짐을 담 너머로 던진 후, 루시를 번쩍 안아 들었다.
“힉!”
루시가 놀란 얼굴로 다리를 버둥거렸다.
“버둥거리지 말고 담 위에 앉아 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담 위에 걸터앉자, 뒤이어 필릭스가 가벼운 동작으로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부드러운 풀밭 위에 내려선 필릭스가 루시에게 팔을 벌렸다.
“자, 내가 받아 줄게. 겁먹지 마.”
그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드 영감의 발소리였다.
“어서!”
그의 재촉에 루시가 눈을 질끈 감더니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필릭스가 그녀를 감싸 안으며 풀밭 위로 부드럽게 쓰러졌다.
“프레드 영감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자.”
그들은 덤불 아래로 굴러간 후, 몸을 숨긴 채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루시는 긴장한 표정으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려 있었다. 아마 그녀가 담을 넘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지레짐작을 하며 필릭스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지척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시원하다는 말로는 표현 못 할 서늘한 가을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흩뜨리며 지나갔다.
그 바람에 삐져나온 루시의 잔머리가 살랑거리며 필릭스의 볼을 간질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반나절 동안 들고 다니던 쇼핑백에서 모자를 꺼냈다. 부티크 샵에서 루시가 써 보았던 그 모자였다.
그가 모자를 루시의 머리에 푹 씌웠다. 멀어지는 프레드 영감의 발만 응시하던 루시가 깜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건…….”
“알레르기 약을 만들어 주는 데 대한 내 보답이야. 사양하지 말고 받아 줘.”
“하지만 너무 비싼데요…….”
루시가 샵에서 본 가격표를 떠올린 듯 말했다.
“네가 약을 만드는 수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저렴하지.”
루시는 대답 없이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어떤 표정인지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마침내 루시가 대답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루시의 얼굴이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필릭스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를 향해 웃어 준 것은 처음이었다. 행복하고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