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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3화 (1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3화

다행스럽게도 루시는 그를 밀쳐 내거나 억지로 떨어지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수 분간 더 걸어 그들은 타운에서 제일 큰 부티크 샵에 도착했다. 무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점포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필릭스는 여성복을 취급하는 이런 가게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여성복을 살 일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옷은 모두 저택을 방문하는 재단사가 맞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루시 또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먼저 들어간 콜린과 로제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나 인사한 것이 무색하게도 바짝 붙어 다니며 옷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콜린은 로제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라 주겠노라, 난리를 피웠다.

덩달아 신이 난 점원이 여러 가지 드레스의 모습이 담긴 디자인 북을 가져와 로제와 콜린 앞에 펼쳐 보였다. 곧 세 사람은 그 책을 앞에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너도 같이 보지 그래?”

필릭스의 말에 모자에 달린 깃털을 툭툭 건드려 보던 루시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전…… 그다지 사고 싶은 옷이 없어요. 필요도 없고요.”

핑계가 아니라 루시는 정말로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콜린과 로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모자와 구두 등을 멀뚱히 구경할 뿐이었다.

“루시! 루시!”

그때 콜린이 달려와 루시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도 와서 봐 봐.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가 있어!”

“난 괜찮은데……!”

콜린은 막무가내였다. 기어코 그녀를 데려간 콜린이 귀여운 디자인의 푸른 드레스를 들어 보였다.

“이 드레스 한 번 입어 봐!”

콜린이 한사코 괜찮다는 루시의 등을 떠밀어 억지로 탈의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잠시 후, 드레스를 갈아입은 루시가 탈의실 안에서 뻣뻣하게 걸어 나왔다. 옷이 영 어색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풋풋하고 수줍어 보였다.

“와! 잘 어울린다, 루시!”

“너무 귀엽잖아?”

콜린과 로제도 루시를 보며 감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뭔가 부족해!”

로제가 루시의 전신을 훑으며 말하더니 리본이 달린 예쁜 모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그것을 루시의 머리에 씌웠다.

“훨씬 귀여운데!”

로제가 손뼉까지 치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곧 필릭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필릭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서 있을 거면 뭐 하러 따라왔냐고!”

로제의 핀잔에 필릭스가 잔뜩 인상을 썼다. 로제가 또 한 번 타박하려는 찰나, 필릭스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귀여워.”

그 말을 들었는지 모자 아래 드러난 루시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로제는 필릭스를 보며 혀를 찼다.

“쯧, 그게 다야? 칭찬에 인색하기는.”

“맞아요, 필릭스 선배! 이 정도면 그냥 귀여운 정도가 아니라 엄청! 귀여운 거라고요!”

“됐다, 저 고고하신 베르크 공자께서 패션에 대에 무얼 아시겠니.”

로제와 콜린은 필릭스에게 신경을 끄고 루시에게 입혀 볼 새로운 드레스를 찾아 거울 앞을 떠났다.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필릭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루시를 보았다. 루시는 새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한지 계속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필릭스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냥 귀여운 게 아니라 엄청 귀여운 거라던 콜린의 말도 틀렸다.

새 드레스를 입은 루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녀가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이 부티크에 있는 비슷한 드레스는 모조리 사들여 그녀의 품에 안겨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내 거울 앞에서 쑥스럽게 서 있던 루시는 자신이 쓴 모자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손에 벗어 들었다. 모자에 달린 가격표를 확인한 루시가 그 금액에 깜짝 놀란 듯 황급히 모자를 내려놓았다.

“저…… 다시 제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요.”

루시가 점원에게 말했다. 곧 점원이 그녀를 데리고 탈의실 안으로 사라졌다.

“어라? 루시는?”

곧 새로운 분홍색 드레스를 가지고 나타난 로제와 콜린이 두리번거렸다.

“옷 갈아입으러.”

필릭스가 탈의실을 가리켰다.

“아, 이 옷도 입혀 보고 싶은데.”

“분명 잘 어울릴 텐데.”

“걔가 너희들 인형이냐?”

필릭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자신이 한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인형 같긴 하지.

“아, 이 모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걸!”

루시가 진열대 위에 벗어 놓은 모자를 자신의 머리 위에 써 보며 로제가 말했다.

“가격도 얼마 안 하네? 내가 살까?”

로제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필릭스가 그녀에게서 모자를 뺏어 들었다.

“쇼핑은 적당히 끝내고 옷이나 갈아입으시지?”

“쳇!”

로제가 샐쭉하게 입을 내밀며 탈의실로 향했다.

* * *

쇼핑을 끝낸 뒤, 그들은 점심을 먹을 식당으로 향했다.

“선배님은 뭘 사셨어요?”

콜린이 필릭스의 손에 들린 커다란 쇼핑백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거기서 살 게 뭐가 있어?”

로제 역시 추궁하는 눈빛으로 쇼핑백을 쳐다보았다.

“신경 꺼.”

“흐음.”

필릭스의 까칠한 대꾸에 로제와 콜린이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빨리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들이 더 이상 그 물건에 관심을 두기 전에 필릭스가 재빨리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이브닝 프로마이즈’라는 식당이었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돈 많은 상인들과 외국인들, 아카데미 학생들을 상대로 운영하기 때문인지, 다른 고급 레스토랑보다는 조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와, 여기도 굉장히 오랜만에 오네요! 어릴 적 어머니와 와 본 기억이 있어요.”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후, 콜린이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어릴 적을 회상하듯 말했다.

콜린은 옆자리에 앉은 루시에게 메뉴를 추천하며 이것저것을 챙겨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제가 말했다.

“너희 정말 친한 모양이구나. 혹시 둘이 사귀니?”

“네에? 그런 거 아니에요!”

루시가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르며 손을 내저었다. 콜린이 루시를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야, 루시 키넌! 너무 정색하는 거 아냐?”

하지만 금방 장난스런 소년의 얼굴로 돌아온 콜린이 로제에게 설명했다.

“사실 저와 루시는 같은 고향에서 자랐거든요. 제노미움 아카데미 입학시험 준비도 저희 집에서 같이 했고요.”

그 말에 필릭스가 대번에 어두워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희 집에서?”

“콜린의 아버지이신 코너 남작님께서 절 후원해 주고 계세요.”

루시가 황급히 해명했다.

“할머니께서 오랜 세월 동안 남작님의 영지에서 약방을 운영하셔서 친분이 있으시거든요. 제가 아카데미에 올 수 있었던 건 다 남작님 덕분이에요.”

“오! 우리 아카데미는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곳인데. 후원을 받아들어올 정도면 너 공부 정말 잘하는 모양이구나.”

로제가 감탄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루시의 뺨이 부끄러움으로 분홍빛이 되었다.

모범생 루시 키넌의 우수한 성적에 대해서는 필릭스도 최근에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1학년 때부터 줄곧 학년 수석을 누구에게도 빼앗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도서부가 유명해진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나. 루시 키넌과 아드리안 베르크, 무려 두 명의 수석이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또 있어요!”

그때 콜린이 또 한 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섰다. 루시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냔 눈빛으로 그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루시는 제 약혼자거든요! 저희 아버지께서 후원을 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푸헥!

필릭스가 마시던 물을 뿜어냈다. 그가 방금 들은 충격적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뭐?

맞은편에 앉은 루시와 콜린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졌다.

루시 키넌이 저 자식의 뭐…… 라고?

“콜린!”

루시가 콜린을 향해 눈을 흘겼다.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황당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남작님께서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저희가 어릴 적부터 자주 함께 놀았거든요.”

필릭스의 시선을 눈치챈 루시가 해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아직까지도 너와 날 결혼 시키겠다고 종종 말씀하시는걸.”

하지만 루시를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콜린이 눈치 없이 킬킬대며 말을 이었다.

“정말 너와 내가 성인이 되면 결혼식이라도 열 기세야.”

“쓸데없는 소리.”

루시가 무뚝뚝하게 받아친 뒤 괜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루시가 단호하게 부인하고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릭스의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식사가 나온 후에도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요리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루시 키넌에게는 짝사랑 상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약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소꿉친구까지 있다는 말이었다.

환장하겠네.

필릭스가 포크로 애꿎은 생선만 쿡쿡 찔러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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