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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2화 (12/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2화

필릭스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다른 커플들과는 다르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손도 잡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남들의 눈에는 자신과 루시가 데이트를 하러 나온 커플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루시를 의식하듯 흘끔거렸다.

루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필릭스는 궁금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루시는 그들이 지나온 아카데미 정문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필릭스가 묻자 루시가 그를 돌아보더니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루시!”

그때, 누군가 루시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그들 쪽으로 힘차게 뛰어왔다. 그 사람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필릭스의 눈썹이 대번에 삐죽 솟아올랐다. 콜린 코너가 손을 쾌활하게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루시,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필릭스 선배님!”

순식간에 그들 앞에 도착해 헉헉 숨을 몰아쉰 콜린이 명랑하게 인사했다.

“아, 콜린도 함께 가고 싶다고 해서요…….”

루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가 약을 만드는데 제가 당연히 도와야죠! 오늘은 저만 믿으세요! 짐꾼! 가이드! 맛집 안내! 뭐든 자신 있습니다!”

“……꺼져.”

필릭스는 순간 루시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고서 험한 말을 내뱉었다.

“예?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어! 우리 차례가 돌아왔어요! 어서 타시죠!”

콜린이 필릭스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빈 마차의 문을 열었다.

“자, 루시! 내 손을 잡아!”

콜린이 마차에 오르려는 루시를 에스코트하며 또 한 번 필릭스의 속을 긁었다.

저 자식이?

필릭스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타운의 상점가 거리는 오랜만에 가 보네요! 어릴 때 수도에 오면 어머니와 자주 놀러 갔던 곳인데! 아참, 거기서 사 먹는 길거리 음식이 아주 맛있어요! 근데 어머니는 길거리 음식의 위생이 의심스러우셨던지 그렇게 자주 사 주시지는 않으셨죠! 아, 그리고 노점상에도 신기한 물건들을 파는데……!”

열심히 타운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

그 안에서 콜린은 잠시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와 거닐었던 상점가 얘기부터 시작해, 그리 멀지 않은 수도에 위치한 자신의 고모할머니 저택 이야기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필릭스는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모처럼 루시 키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웬 촉새 같은 녀석이 불쑥 나타나 모든 걸 망치고 있었다.

마차 밖으로 던져 버릴까.

필릭스가 창밖과 콜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차가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않았으므로 밖으로 던진다 해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짜로 던져 버려?

바로 그때.

덜컹.

갑자기 마차가 멈추어 섰다.

신나게 떠들어 대던 콜린이 이야기를 멈추고 창밖으로 고개를 뺐다.

“어라. 누가 우리 마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데요?”

그가 재빨리 상황을 전했다.

“아앗! 아가씨, 잠시만요!”

밖에서 마부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밝은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로제 밀라드였다.

로제는 마차 안에 탄 사람들을 특유의 거만한 눈빛으로 둘러보다가 필릭스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뭐야, 너도 타고 있었어?”

로제가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뭐야.”

황당한 난입에 필릭스 역시 험악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볍게 무시하며 마차 위에 올랐다.

“뭐긴 뭐야. 같이 좀 타자. 내가 타고 가던 마차가 갑자기 서 버렸단 말이야.”

그녀가 마차 안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뒤, 길가에 서 있는 마차 한 대를 가리켰다. 그 마차는 바퀴 한쪽이 진창에 빠져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었어. 새 마차가 올 때까지 멍하니 서서 기다리는 것보단 낫잖아?”

그녀가 말했다.

“아, 세상에. 옷이 엉망이 되었네.”

진창을 빠져나오느라 더러워진 드레스의 밑단을 살피며 그녀가 인상을 썼다.

로제의 탑승으로 마차 안은 순식간에 비좁아졌다.

“옆으로 좀 가 봐!”

필릭스의 옆자리에 앉은 로제가 엉덩이로 그를 밀어내며 짜증을 냈다.

그녀의 등쌀에 속절없이 구석으로 몰아붙여진 필릭스가 어금니를 꽉 다물며 이마를 짚었다.

“하아…….”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 * *

달리는 창밖으로 외벽이 화려한 건물들과 편편한 돌들이 깔린 도로가 나타났다. 곧 타운 중심가에 도착한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생각보다 거리의 인파가 대단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 장식용 깃발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축제 기간이라 사람이 많은가 봐요!”

마차에서 내린 콜린이 인파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우! 안 그래도 더러워진 드레스가 너덜너덜해지겠네!”

로제가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치켜들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너흰 어디로 갈 건데?”

로제가 물었다.

“상점가의 약재상에 먼저 들릴 거예요! 그 다음엔 옷가게나 노점상을 구경할 거고요!”

콜린이 제멋대로 세운 계획을 줄줄 늘어놓았다. 필릭스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로제가 먼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아, 부티크에도 들를 거니? 나도 마침 드레스를 보러 가려던 참인데. 잘 됐다, 나도 너네랑 함께 다닐래!”

“약재상에 들를 거라니까?”

필릭스가 이마를 찡그리며 로제에게 말했다.

“넌 거기 볼일도 없잖아.”

“뭐 어때. 나도 가서 구경하면 되지!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 나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지 않겠어?”

“애초에 왜 혼자 나온 거야?”

“내 맘이야!”

난데없이 필릭스와 로제의 싸움이 벌어졌다. 필릭스는 그녀에게 험한 말을 쏘아붙이려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를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흠흠.”

그가 황급히 목을 가다듬는 척했다.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꼬여 가고 있었다. 저 망할 콜린 녀석도 모자라, 로제 밀라드까지 달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필릭스가 포기한 듯 말했다. 그러나 속으론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둘 다 떼어 내 버려야지.

그리하여 네 사람은 함께 타운 중심가를 걷게 되었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붐볐다. 그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도 좁다랬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둘씩 나뉘어졌다.

앞에서는 루시와 콜린이, 뒤에서는 필릭스와 로제가 나란히 짝을 지은 것처럼 걷게 되었다. 필릭스는 상당히 짜증이 났다. 어째 문학의 밤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앞에서 걷고 있는 다람쥐 한 쌍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리를 구경하느라 바빠 보였다. 거리 풍경에 두 눈을 빼앗긴 루시의 얼굴에서도 줄곧 호기심이 떠나지를 않아 보였다.

그들은 곧 상점들이 즐비해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루시가 말한 약재상도 그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쌉싸름한 약초의 향기가 코끝으로 진득하게 풍겨 왔다. 이따금 루시의 몸에서 꽃향기와 섞여 은은하게 풍기던 냄새였다.

상점 선반에는 약재로 쓰이는 말린 식물뿐만 아니라, 괴상하게 생긴 콩이라든지 괴이하게 뒤틀린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욱, 토 나올 것 같아.”

로제가 사람의 뇌처럼 생긴 말린 열매를 보며 메스껍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갈래?”

필릭스가 그녀를 위해 출입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싫은데?”

로제가 샐쭉하게 내뱉고서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산대에서는 루시가 만드라고라 뿌리를 주문하고 있었다. 약재상 주인은 계산대 뒤의 커튼 너머로 사라지더니 곧 종이에 쌓인 만드라고라를 가지고 나왔다.

“5골드입니다.”

주인이 가격을 말하자 루시가 지갑을 열었다.

“내가 계산할게.”

필릭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루시가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돈 있어요.”

“나 때문에 재료가 두 배로 들게 되었잖아? 원래 아드리안을 위해서 만들었던 건데……. 나까지 빈손으로 얻기엔 양심에 찔려서.”

“그건…….”

루시가 잠시 망설이더니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딱히 아드리안 선배 때문에 만든 건 아니에요.”

필릭스가 스르륵 팔을 내렸다.

아드리안 때문에 만든 게 아니라고?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루시가 얼른 값을 치렀다.

“필요한 재료는 다 샀어요. 이제 가요.”

물품을 구입한 후, 그들은 약재상을 나와 로제가 이끄는 부티크로 향했다.

어쩐지 콜린이 로제보다 더 신난 표정으로 가는 내내 부티크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로제 선배님, 혹시 아르베나 부티크라고 아세요?”

콜린의 질문에 로제의 얼굴이 환해지며 대꾸했다.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 거긴 여성복만 취급하는 곳인데!”

“아휴! 선배님, 뭘 모르시는군요! 아르베나 부인은 여성복뿐만 아니라 남성복 디자인에도 아주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세요! 저의 고모할머니께서 부티크의 오랜 단골이셔서 가끔 제 옷을 주문하기도 하죠!”

“어쩐지 오늘 너의 옷 스타일을 보고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너 스타일에 대해 뭘 좀 아는구나?”

“선배님이랑은 말이 통할 것 같아요!”

콜린과 로제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 나가며 어느새 앞쪽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필릭스와 루시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서로가 입은 옷을 칭찬하거나, 다른 부티크 샵을 추천해 주느라 바빴다.

자연스럽게 필릭스와 루시가 나란히 그들의 뒤에서 걷게 되었다.

“이리 줘.”

필릭스가 루시의 손에서 약재상에서 산 짐들을 빼앗아 들었다.

“무겁잖아.”

“감사합니다.”

루시가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필릭스는 루시와 나란히 걷게 된 이 구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부디 콜린과 로제가 부티크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며 자신들을 잊어 주기를 바랐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상점가에도 많았다. 워낙 사람이 바글대는 통에 일행을 놓치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앞서가는 두 사람이야 놓쳐도 상관없었지만 루시를 놓치는 건 곤란했다.

“딱 붙어서 걸어.”

필릭스가 루시를 부드럽게 자신의 곁으로 이끌며 말했다.

루시가 또 얼굴을 붉혔다.

불쾌한 건 아니겠지.

필릭스는 딱딱하게 굳은 루시의 표정을 보며 걱정했다.

내가 너무 친근한 척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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