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1화
필릭스의 부탁에 루시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드리안 선배가 필릭스 선배님 것까지 받아 갔는데…… 혹시 부족했나요?”
“아니, 쏟았어. 바닥에.”
필릭스가 냉큼 대답했다. 물론 알레르기 약은 그의 기숙사 방, 책상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필릭스의 말이 거짓인 줄은 까맣게 모르는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여분의 알레르기 약을 더 만들려고 했어요. 마르암 덩굴은 11월까지도 피어 있곤 하니까요. 완성되면 아드리안 선배를 통해 전달해 드릴게요.”
“아니, 아드리안을 통해서 받고 싶지 않아.”
필릭스의 입에서 즉각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는 이미 루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찾아와 약을 만들어 달라 하는 것도 그녀의 입장에선 성가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릭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너한테 직접 받고 싶어.”
루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필릭스가 한 말의 의미를 고민하듯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아휴, 선배님! 뭘 그렇게 진지하게 부탁하세요? 당연히 루시가 직접 가져다드려야죠!”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침묵을 깨트리며 콜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루시가 어제 일로 선배님께 미안해하고 있다고요!”
“그, 그 얘긴 왜 꺼내!”
루시가 주먹 쥔 손으로 콜린의 등을 콩콩 때렸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입술을 불퉁스럽게 내민 채 콜린을 노려보던 그녀가 필릭스 쪽으로 돌아섰다.
“어젯밤에는……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선배님. 약은 꼭 만들어 드릴게요.”
루시는 필릭스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젯밤 일이 어지간히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필릭스에게 사과한 뒤, 돌담 위에 있던 꿀을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뜰을 떠났다.
“저도 선배님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루시가 약을 만드는 걸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요!”
루시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필릭스에게 콜린이 말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돌연 험악한 표정이 되어 콜린의 귀를 움켜잡았다. 어젯밤 피터 선생에게 잡혔던 그 귀였다.
“너, 앞으로 여기에 오지 마.”
“아악! 갑자기 왜 이러세요!”
“오면 죽는다.”
콜린 코너의 비명 소리가 도서관 뒤뜰을 가득 울렸다.
* * *
필릭스는 다음 날에도 도서관 뒤뜰로 향했다. 혹시 루시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필릭스는 텃밭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루시가 열을 맞춰 심어 놓은 약초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두색의 가녀린 잎을 가진 황금나비풀부터 시작해서 필릭스는 이름조차 모르는 꽃들까지. 약초학을 담당하는 에스트리드 선생이 본다면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루시가 매일 이 앞에 쭈그려 앉아 약초들을 정성껏 가꾸는 모습이 그려졌다.
바스락.
뒤에서 들린 작은 발소리에 필릭스가 돌아보았다. 루시가 서 있었다.
“선배님? 여긴 무슨 일이세요?”
“……꽃이 언제 피는 건가 궁금해서 와 봤어. 약이 빨리 완성되었으면 해서.”
필릭스가 변명처럼 말했다.
루시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많이 가려우신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필릭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그의 얼굴 피부를 자세히 살폈다. 필릭스는 헉, 숨을 들이쉰 뒤 호흡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얼굴과 목이 빨개졌다. 그 부위에서 오르는 열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필릭스의 빨개진 피부를 본 루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필릭스의 빨개진 얼굴을,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돼, 됐어. 참을 만해.”
필릭스가 뒷걸음질치며 말을 더듬었다.
“꽃이 폈나 확인 차 와 본 거야.”
그는 불안정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며 말한 후, 서둘러 뒤뜰을 떠났다.
자신의 허둥대는 꼴을 스스로 비웃으며.
* * *
필릭스는 루시 키넌을 먼저 찾아가지 말자고, 그녀가 만든 약을 가져다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삼 일 후 그의 발걸음은 다시 도서관 뒤뜰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조차 예측할 수 없는 스스로의 행동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도서관을 돌아 뒤뜰에 가까워질 무렵,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흘러나왔다.
필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콜린 코너 자식이 또 와 있나.
그 녀석은 처음 봤을 때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없는 건지 볼 때마다 루시와 딱 붙어 있는 모습 하며,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 묘하게 거슬렸다.
오늘은 기필코 쫓아내 버려야지.
필릭스는 다짐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그의 예상대로 루시 옆에는 한 남학생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콜린 코너가 아니었다.
“아드리안.”
루시와 화단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필릭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필릭스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당장이라도 콜린 코너를 쫓아낼 기세였던 필릭스는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드리안 베르크. 콜린 코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적.
“내 알레르기 약이 잘 자라고 있나 확인하려고 왔지.”
필릭스가 말했다.
“네 알레르기 약?”
“그래, 내 약.”
필릭스는 화단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루시와 아드리안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양쪽으로 갈라진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필릭스는 짐짓 그들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화단을 내려다보는 척했다.
“알레르기 약이 완성되면 필릭스 선배에게도 드리기로 했거든요.”
아드리안의 얼굴에서 의아한 표정이 떠나가지 않자, 루시가 설명했다.
“안 그래도 루시에게 받으면 너에게도 나누어 주려고 했는데. 내가 예전에 너에게 준 약도 루시가 만든 거야.”
“알아.”
아드리안의 말에 필릭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필릭스가 화단을 바라보는 척하는 사이에, 루시와 아드리안은 알레르기 약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황금나비풀은 이틀 내로 개화할 것 같아요.”
루시가 작게 솟아오른 꽃봉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말에 타운에서 만드라고라 뿌리만 구하면 금방 약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함께 가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드리안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말에도 학생회 일로 바빠서 불가능할 것 같네. 미안해서 어쩌지.”
“아니에요!”
루시가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루시. 원래 네 친구에게 주려고 만들던 약인데. 우리 것까지 만드는 수고를 보태어서 미안해.”
그 친구가 바로 너란다, 동생아.
루시 키넌에게는 널 위해 약을 만드는 시간조차 결코 수고롭지 않을 거야.
필릭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 동생을 향해 속으로 삐딱한 웃음을 날렸다.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에요.”
루시가 아드리안의 미안함을 덜어 주기 위해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미안해하는 선배와 기꺼이 수고스러움을 감당할 준비가 된 후배 사이의 훈훈한 대화는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럼 만드라고라 뿌리를 구입하는 비용은 내가 낼게.”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만드라고라는 꽤 비싼데.”
“제가 다른 곳보다 싸게 파는 곳을 알고 있어요.”
“그럼 같이 가 주기만이라도 하면 좋을걸.”
“바쁘시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정말이지 화기애애했다. 필릭스는 끼어들 틈조차 없을 정도로.
“그럼 내가 갈게.”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필릭스가 불쑥 말했다. 루시와 아드리안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둘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을 떨쳐 낼 수가 없다.
그는 명확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주말에 타운 말이야. 내가 함께 가 주겠다고.”
“네가?”
아드리안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그 약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루시 널 혼자 보내는 것보다야 낫겠지.”
아드리안이 루시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데려가서 짐꾼으로 마음껏 써먹어.”
루시는 별다른 거부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영 불편하다는 얼굴로 황금나비풀만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필릭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몰래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아드리안이 아니라서 아쉬운가 보지?
대신 내가 잊을 수 없는 주말을 만들어 줄 테다, 루시 키넌!
* * *
루시와 약속한 주말 당일.
필릭스는 바쁘고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전날 미리 준비해 둔 옷을 진작 차려입고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머리를 거듭 손질하기도 했다.
아드리안이 학생회 일로 일찍이 기숙사를 나선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필릭스의 이런 초조한 모습을 보았다면 필시 이상하게 생각했을 테니까.
외출 준비를 끝마친 필릭스가 방 안을 서성거리기를 한참, 마침내 태양이 하늘 제일 높은 곳까지 떠올랐다. 필릭스는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확인한 후 기숙사를 나섰다.
필릭스가 아카데미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루시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의 단정한 교복 차림이 아닌, 짙은 밤색의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뒤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필릭스가 다가가자 루시가 뻣뻣한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루시.”
필릭스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답했다.
주말 점심에 루시 키넌과의 외출이라니.
광대뼈가 자꾸만 올라가려는 것을 꾹 참느라 필릭스의 얼굴은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정문 앞, 마차가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말이면 타운으로 외출을 나가는 제노미움 아카데미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마차들이 몰려와 승객을 기다리곤 했다.
필릭스와 루시도 마차를 타기 위한 행렬에 줄을 섰다. 필릭스는 줄을 서 있는 학생들 중에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남녀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말을 맞아 데이트를 나온 커플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필릭스는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루시를 보며 생각했다.
이것도 마치 데이트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