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화
필릭스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부여잡은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걷어찬 건지 눈물까지 핑 돌 정도였다. 바짓단을 걷어 보니 로제의 구두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로제가 루시 키넌에 관한 일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다시 로제를 마주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교정으로 나온 필릭스는 가까운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로제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다시 찾아온 평온을 누리던 것도 잠시, 그는 슬슬 느껴지는 알레르기 기운에 얼굴을 찡그렸다. 종일 넋을 빼놓고 다니느라 약을 챙기지 않고 나와 버린 것이다.
“아, 정말.”
벤치 주변에는 저번 주보다 더욱 잎이 무성해진 것 같은 마르암 덩굴이 여기저기 자라 있었다.
다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기가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선배님!”
누군가 쾌활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뛰어왔다.
왜소한 몸집에 언뜻 방정맞아 보이기까지 한 발랄한 걸음걸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얼굴, 콜린 코너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런데…… 필릭스 선배 맞으신가요?”
콜린이 눈앞의 베르크 공자가 어느 베르크 공자일지를 고민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왜.”
“저 기억하시죠! 어제 문학의 밤에서 잠깐 뵈었는데요! 콜린 코너라고 합니다! 루시 키넌의 친구요!
콜린은 과하게 기운이 넘치는 모습으로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무슨 일이지?”
필릭스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젯밤 콜린이 루시와 춤을 추던 게 생각나 기분이 안 좋아진 탓이다.
“어제 일에 대해 사과드리려고요! 사실 루시는 제 파트너였고 제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까지 에스코트하는 게 당연했는데……. 루시를 대신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묘하게 약이 오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표정을 숨기며 짧게 대꾸했다.
“됐어. 가 봐.”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괜찮대도.”
필릭스가 귀찮다는 듯 답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콜린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참새처럼 조잘거렸다.
“루시도 아침에 선배님께서 데려다주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죄송해하는 것 같았어요. 오늘 아침 내내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걔가?”
필릭스가 솔깃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선배님.”
갑자기 콜린이 필릭스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코끝을 찬찬히 살폈다.
“왜 이래.”
그가 콜린을 밀쳐냈다.
“혹시 선배님도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가 있으신가요?”
콜린이 물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좋은 약을 알고 있거든요! 황금나비풀로 만든, 금색의 동그란 알약이요!”
금색의 동그란 알약.
그건 아드리안이 구해 온 뒤 자신에게도 나누어 주었던 그 알레르기 약이었다.
필릭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네가 그 약을 어떻게 알아?”
“네? 그야 당연히……! 루시가 그 약을 만드니까요!”
“……그 약을 루시가 만들었다고?”
필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몸을 바로 세워 앉으며 재차 물었다.
“루시 키넌이?”
“네, 주변에 그 알레르기를 앓는 사람이 있다면서 매 가을마다 만들더라고요.”
필릭스가 약에 관심을 보이자 콜린이 기뻤던지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제가 루시에게 부탁해서 구해다 드릴까요? 마침 루시를 보러 가는 길인데.”
“……그럼 부탁하지.”
필릭스는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놀랐지만,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네, 선배님! 맡겨만 주십시오!”
콜린이 그에게 절도 있게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콜린 코너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명랑한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필릭스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콜린이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으신가요, 선배님?’ 하는 표정으로 콜린이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필릭스가 미간을 좁히며 그를 재촉했다.
“뭐 해? 루시 키넌에게 가자고, 당장.”
“아, 예!”
그제야 발걸음의 의미를 알게 된 콜린이 서둘러 도서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 * *
도서관으로 향하는 동안, 콜린 코너는 루시가 알레르기 약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루시는 알레르기 약에 들어가는 제일 핵심 재료인 황금나비풀을 직접 재배하고 있다고 했다.
도서관 뒤뜰에는 아무런 조경도 되어 있지 않고,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버려진 텃밭이 있는데, 그곳에서 황금나비풀을 기른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루시가 고향에서 가져온 다른 몇 가지의 약초들도 함께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대단한 정성이군.
콜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필릭스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마르암 알레르기 약은 척 보아도 만들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일단 황금나비풀부터가 기르기 까다로운 약초였으니.
제조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처음 아드리안에게 그 약을 나누어 받았을 때, 이런 정성 가득한 약을 만들어 그에게 갖다 바친 사람이 누굴까, 잠시 궁금하긴 했었다.
그런데 그게 루시 키넌이었단 말이지?
필릭스는 몰래 조소했다.
하긴, 부모님도 몰라보는 남자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푹 빠져 있는 앤데, 그 정도쯤은 놀랄 일도 아닌 거겠지.
오히려 그 약을 루시 키넌이 만들었을 거라고 진작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눈치가 없었던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들은 도서관 뒤뜰에 도착했다. 뒤뜰 한구석에는 정말로 콜린이 설명한 텃밭이 있었고, 그 앞에 연갈색 머리를 뒤로 땋아 내린 여학생이 쭈그려 앉아 작물들을 돌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텃밭을 보는 순간 필릭스는 놀라고 말았다. 아주 조그만 밭이었지만 족히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여러 가지 약초가 동시에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이거 학교에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루시, 식당에서 네가 말한 꿀 얻어 왔어.”
콜린이 가방에서 꿀이 든 작은 유리병을 꺼내며 말했다.
“휴, 새로 오신 린다 아주머니가 어찌나 생색을 내시던지. 전에 계시던 아주머닌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그냥 주셨는데.”
콜린이 투덜거리자 루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구해다 줘서 고마워. 거기 돌담 위에 놔둬 줄래?”
“그런데 역시 만드라고라 뿌리 좀 나누어 달라는 소리까지는 못 꺼냈어. 그러면 정말로 린다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실 거 같아서…….”
“하는 수 없지. 주말에 타운에 나가서 사 와야겠다.”
루시의 어깨너머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그런데 만드라고라 뿌리는 비싼 편인데.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으려나…….”
근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루시가 곧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저금통의 배를 갈라야 할 때가 온 것 같…….”
근심스런 표정으로 뒤돌아서던 그녀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필릭스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필릭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술에 취한 채로 필릭스의 등에 업혀 기숙사까지 실려 갔던 것이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기억은 하려나.
필릭스는 자신의 머리칼 속으로 헤집고 들어오던 손가락의 감촉을 떠올렸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여 웅얼거리던 그 술주정 같은 고백도.
“아, 루시! 필릭스 선배님이 네가 만든 알레르기 약을 얻고 싶으시대!”
콜린이 뒤늦게 필릭스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선배님도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가 있으신가 봐.”
“아…….”
필릭스가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지, 루시는 자리에 우뚝 선 채 알 수 없는 소리만 흘렸다.
“아드리안에게 알레르기 약을 준 게 너야?”
필릭스가 물었다.
“……네.”
루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루시!”
콜린이 다시 끼어들었다.
“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던 사람이 아드리안 선배였어?”
“그게…… 아드리안 선배와 얘기 중에 마르암 알레르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마침 내가 그 약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기도 하고…….”
루시의 말이 웅얼웅얼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럼 진작 말해 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린다 아주머니께 빗자루로 얻어맞는 것 정도는 감수하고 만드라고라 뿌리 좀 달라고 졸라 봤을 텐데.”
콜린이 쾌활하게 떠들어댔다. 그러더니 필릭스를 돌아보며 별안간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루시가 만든 약의 효능은 정말 최고예요! 믿으셔도 좋아요! 제가 보장합니다!”
콜린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마치 자신이 그 약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루시네 할머니께서 약방을 하시거든요. 잘 듣는 민간요법을 많이 알고 계시죠!”
이 자식은 뭔데 루시 키넌의 가족에 대해서도 아는 척이야?
침까지 튀겨 가며 루시를 자랑하는 콜린을 향해 필릭스는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다. 보면 볼수록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 약의 효능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알아.”
그가 툴툴거리듯 대꾸했다.
“아드리안이 줘서 써 봤거든. 사실 베르크 가의 주치의가 처방해 준 약보다 훨씬 잘 듣더군.”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이라며 약의 효능에 대해 의심하던 베르크 가의 주치의도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가 만든 약은 수도의 제일 뛰어난 약방에서 만든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필릭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에게도 그 약을 만들어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