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화
덜컹!
필릭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고 문이 활짝 열렸다. 문가에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아드리안과 문학을 담당하는 피터 선생, 그리고 피터에게 귀를 잡힌 콜린 코너였다.
“아야야!”
콜린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필릭스가 황당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이 녀석이 글쎄, 몰래 술을 숨겨 왔지 뭐냐!”
피터 선생이 콜린의 한쪽 귀를 잡아 늘이며 대답했다. 그가 무서운 표정으로 콜린에게서 압수한 휴대용 술병을 공중에 흔들어 보였다.
아드리안 역시 엄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콜린 코너! 건전한 예술 문화 행사에 술을 반입하다니, 대단히 훌륭한 행동이야. 네 덕분에 문학의 밤이 한층 성숙해졌으니 어떤 상을 내려야 할까!”
“시 낭송 전에 긴장을 풀려고 가져온 것뿐이에요! 이것 좀 놔주세요, 피터 선생님!”
“긴장을 풀어?”
피터 선생이 더욱 세게 콜린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악!”
“긴장을 풀고 싶으면 심호흡이나 할 것이지, 이렇게 도수 높은 술은 왜 가져와?”
“정말이에요! 무대 오르는 게 너무 긴장돼서 혀만 살짝 담갔다 뺐다니까요!”
콜린의 해명에도 피터 선생과 아드리안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꾸 헛소리할래? 이번 일은 반성문 백 장으로는 어림도 없을 줄 알아!”
“아얏!”
또 한 번 비명을 내지르는 콜린을 보며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릭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는 곧 제 형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는 루시를 발견했다.
“루시?”
아드리안이 다가와 루시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루시는 미동도 없었다.
“술 냄새! 설마 너도 마신 거야?”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피터 선생이 콜린을 추궁했다.
“뭐야! 네가 루시에게 술을 먹였어?”
“헉! 저렇게까지 취할 줄은 몰랐는데……. 춤추는 걸 너무 부끄러워하기에 긴장하지 말라고 딱! 한 모금만! 주스에 섞어 주었…… 아아악! 피터 선생님! 귀 떨어져요!”
“콜린 코너! 넌 정말 혼 좀 나야겠다. 당장 내 사무실로 따라와.”
“으아아!”
결국 콜린은 피터 선생에게 귀를 잡힌 채로 창고에서 끌려나갔다.
“하아. 내가 못 살아.”
아드리안이 멀어지는 콜린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이마를 짚었다.
“얜 어떡할 거야?”
필릭스가 잠든 루시를 보며 말했다.
“당장 방으로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난 남아서 행사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아드리안이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필릭스를 향해 말했다.
“네가 루시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어?”
* * *
자정이 가까운 시각.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어둡고 조용했다.
필릭스는 밤하늘의 달과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희미하게 밝혀 주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등에는 곤히 잠든 루시를 업은 채.
등에서는 루시의 체온이, 귓가에는 루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만날 저만 보면 피하기 바쁘던 애가, 지금은 얌전하고도 아주 평온한 얼굴로 자신의 등에 업혀 있었다.
참 황당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이건 백 년 치 놀림감이야. 나중에 술에서 깨면 조금 골려 줘야겠어.
그는 필시 당황할 것이 분명한 루시의 표정을 상상하며 슬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우응…….”
그때 루시가 천천히 몸을 꿈틀거렸다. 아직 취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다가, 혀 꼬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선배…….”
루시가 입을 열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선배…….”
갑자기 루시가 축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필릭스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손이 느리고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내렸다.
“뭐, 뭐야.”
필릭스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취한 루시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었어요…… 선배의 금발…….”
루시가 필릭스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두피에 맞닿는 손끝의 온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으음…… 역시 부드러워…….”
온몸을 휘감는 오싹한 전율에 필릭스는 모든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대던 루시가 다시 조용해졌다. 필릭스의 머리칼을 헤집던 손도 이내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하…….”
필릭스는 참고 있던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잠깐 멈춘 게 아닌가 싶던 심장이 이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
한낮의 교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안은 웅성대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면서 학생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소란 속에서 홀로 책상에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쁜 학생회 일로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 필릭스를 걱정스런 얼굴로 살폈다.
“야, 필릭스.”
그가 어깨를 살짝 흔들자 정신을 차린 필릭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하루 종일 왜 이래?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있는 거야.”
“아…….”
필릭스는 아드리안의 걱정스런 말에도 좀처럼 빠릿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천천히 가방을 챙겨 들었다.
넋을 놓고 뒷문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보며 아드리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필릭스의 이상 행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옆 교실에서 나오던 1학년생 하나가 미처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베르크 선배님!”
사색이 된 1학년이 거듭 허리를 굽히며 필릭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는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냥 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향한 채.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한층 더 근심스러워졌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채, 필릭스는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넋을 놓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흡사 괴담 속의 좀비 같았다.
그가 어느 빈 교실 앞을 지나갈 때였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더니 빈 교실 안으로 잡아끌었다.
난데없는 손길에 필릭스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의 앞에는 로제 밀라드가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서슬 퍼렇게 뜬 채 서 있었다.
아아, 맞다. 로제.
그제야 떠오른 기억에 필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젯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정신을 빼놓고 있느라 로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야, 너…….”
그녀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는 모습이 방금 지옥에서 올라온 복수의 화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필릭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임기응변을 시도해 보았다.
“아, 미안. 나 필릭스 아닌데.”
로제의 얼굴에 살벌한 웃음이 서렸다.
“아아, 그래? 아까 만난 베르크도 똑같은 말을 하던데.”
그녀의 미소가 점점 더 오싹해졌다.
“둘 다 아니라고 하니 어쩌지. 그냥 둘 다 죽여 버릴까.”
전혀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 말에 필릭스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며 실토했다.
“미안, 내가 잠깐 착각했다. 나 필릭스 맞아.”
“너 장난해?”
로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즉각 필릭스에게 쏘아 댔다.
“감히 나를 내버려 두고 혼자 가 버려? 네가 말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정말 미안해. 사과할게. 다만 어제는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
“예기치 못한 일이 뭔데? 날 에스코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냐고!”
로제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루시 키넌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 같았다.
“으음, 그냥 갑자기 돌아가 봐야 했었어. 일부러 너에게 창피를 주려던 게 아니었단 것만 알아줘.”
그렇게 말한 필릭스가 로제에게 한쪽 뺨을 내밀었다.
“때릴래?”
로제가 그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필릭스가 조건 하나를 더 제시했다.
“저기서 때릴래?”
그가 창문 너머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는 교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크 공자의 에스코트를 받은 여학생’보다 ‘베르크 공자의 뺨을 후려갈긴 여학생’한테 더 많은 인터뷰가 들어오지 않을까?”
필릭스의 말에 로제가 잠깐 혹한 듯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이내 냉랭한 얼굴로 내뱉었다.
“미쳤니? 공작님 아들 얼굴에 손자국을 냈다가 무슨 소릴 들으라고!”
로제가 팔짱을 끼고 서서 필릭스를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눈빛은 여전했지만, 무서운 얼굴로 쏘아붙여 대던 아까 전보다는 화가 조금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됐고, 이번 일은 네가 나한테 빚진 거야.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 없어. 이 빚은 어떻게든 받아 낼 테니까 각오해.”
그 말을 끝으로 로제는 돌아섰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는 그녀를 보며 필릭스가 숨을 돌리던 찰나.
갑자기 돌아본 그녀가 필릭스의 발목을 냅다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필릭스는 신음을 흘리며 발목을 감싸 쥐었다.
“윽.”
“이건 이자.”
로제는 마지막으로 필릭스를 쏘아봐 준 뒤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