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화
이윽고 모든 발표 순서가 끝났다.
도서 부원들이 여러 개의 촛대에 불을 밝혔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이던 홀 안이 금세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곧 촛불의 일렁거림에 맞추어 흥겨운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진지하고 차분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던 학생들은 신이 나서 파트너를 댄스홀로 이끌었다.
로제 밀라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춤을 추지 않겠다고?”
테이블 구석에 앉아 사과주만 홀짝이는 필릭스에게 로제가 따지듯 물었다.
“춤을 추지 않을 거면 나랑 여긴 왜 온 건데?”
“그야 문학을 즐기기 위해서지.”
필릭스가 로제의 성난 음성에도 여상한 말투로 대꾸했다.
“애초에 네가 먼저 나에게 오자고 한 거잖아!”
“그리고 너도 내 신청을 수락할 때 약속했었지. 나에게 춤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필릭스의 말에 로제가 분한 듯 씩씩거렸다. 그녀로선 정말로 그가 자신과의 춤을 거절할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이럴 거야?”
로제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녀가 그리 화를 내는 것도 이해되었다. 그녀는 오늘 밤 필릭스를 이용해 가십지에 한 번이라도 더 실려 보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겐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명성을 얻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듯 보였다. 그 계획에 제일 중요한 도구였던 베르크 공자가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으니 잔뜩 성이 난 모양이었다.
로제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변을 기웃거리던 남학생 몇 명이 그들을 흘끔거렸다. 필릭스는 그들이 로제에게 춤을 신청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니어도 너랑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남자는 아주 많아 보이는데.”
필릭스가 로제 뒤를 알짱대는 남학생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로제가 뒤를 흘긋 보더니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필릭스의 태도는 절대로 춤을 추지 않겠단 의지로 확고해 보였다. 로제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너.”
그녀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대신 홀을 퇴장할 땐 확실히 에스코트해 줘야 해. 기숙사로 돌아갈 때까지.”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을.”
로제가 홱 몸을 돌리더니 아까부터 자신을 흘끔거리던 남학생들에게로 다가갔다. 남학생들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앞다투어 로제에게 춤을 신청했다.
로제는 베르크 공자와 춤을 춘 유일한 여학생에서, 제일 많은 남학생으로부터 춤을 신청받은 여학생이 되기로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남학생들에게 휩싸여 로제는 순식간에 홀 중앙으로 멀어져 갔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된 필릭스는 목을 꽉 졸라매는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홀 안을 둘러보았다.
몇 시간이고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두르거나 체력 단련을 할 때보다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의 눈에 루시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그녀는 콜린 코너의 손에 붙잡혀 댄스홀로 이끌려 나왔다. 연신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굉장히 당혹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콜린 코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코 그녀를 홀 중앙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곧 루시가 콜린의 리드에 맞춰 마지못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정쩡한 자세. 경직된 미소.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두 발.
루시 키넌의 춤 실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날아다니듯 춤을 추는 콜린 코너와는 다르게, 루시는 그의 손에 붙들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꼴에 가까웠다. 마치 조종되는 목각 인형 같았다.
필릭스는 그녀의 형편없는 춤을 보며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그처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또 없었다. 그 어느 발표자들의 시 낭송이나, 연주보다 더 기억에 남을 장면이었다.
그렇게 웃던 것도 잠시, 시간이 흐를수록 필릭스의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홀 중앙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과 구석 테이블에 앉아 사과주를 홀짝이는 자신 사이에 커다란 벽이 세워진 것만 같았다.
그냥 로제와 춤이라도 출 걸 그랬나.
하지만 댄스홀 한가운데서 남학생 하나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며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는 로제를 보자 그 생각이 싹 달아났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홀 밖으로 나왔다. 시끄러운 음악과 멀어져 테라스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그는 얼마 동안 테라스를 서성거리며 밤바람을 만끽했다. 이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는 밤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필릭스.”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빈 병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혼자 뭐 해? 로제는?”
필릭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대답했다.
“댄스홀을 장악하고 계시지.”
아드리안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넌 뭐가 그렇게 바쁘기에 보기가 힘드냐.”
필릭스가 묻자 아드리안이 들고 있던 상자를 살짝 기울여 보여 주었다.
“난 이 행사 책임자니까. 남들처럼 마냥 즐긴 순 없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아.”
필릭스가 동생에게 다가가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어디다 두면 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형에게 아드리안이 작게 미소 지었다.
“도서관 뒷문 옆에 작은 창고가 있어. 거기다 두면 돼. 아, 그리고 새 사과주 상자를 가져다 테이블에 채워 줄 수 있어?”
“걱정 말고 가 봐.”
아드리안이 고맙다고 인사한 후 급히 홀 안으로 들어갔다. 필릭스는 상자를 들고 창고로 향했다.
도착하니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그 안에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 필릭스의 기척을 느낀 루시가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 키넌.”
홀 안에 있는 줄 알았던 그녀와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리자 살짝 당황한 필릭스가 저도 모르게 이름을 내뱉었다.
“어…….”
루시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사과주를 가지러 왔어요. 모자란 것 같아 채워 두려고요.”
그녀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묻지도 않은 것을 말했다.
기숙사를 나올 때의 말쑥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루시는 어딘가 흐트러지고 꿈꾸듯 몽롱해 보였다.
자신의 파트너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닌 여파인지, 기숙사를 나설 때만 해도 차분하게 빗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연한 베이지색의 드레스 역시 밑단이 구겨지고 허리에 맨 리본은 조금 풀려 있었다.
두 뺨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그스름했다.
멍하니 서 있던 루시가 그에게서 눈을 떼고 근처에 있던 사과주 상자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몸집의 그녀가 그처럼 무거운 상자를 한 번에 들어 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상자가 꼼짝도 하지 않자 당황한 루시가 몇 개의 병을 덜어 내 옆에 세워 두었다. 그런 뒤 그녀는 다시 상자 들어 올리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상자는 제자리에서 들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난감한 얼굴이 된 루시가 또 몇 개의 병을 빼 옆에다 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릭스가 말했다.
“그러다 상자만 들고 가려고?”
그가 루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빼 둔 병을 다시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 갈 테니 넌 새 잔이나 챙겨서 들고 와.”
무릎을 꿇고 병을 주워 담는 필릭스의 눈앞에 바구니를 챙기려 돌아서는 루시의 가느다란 발목이 보였다.
“잠깐.”
필릭스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너 피 나.”
필릭스가 그녀의 발뒤꿈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루시가 재빨리 엉거주춤 앉으며 발목께밖에 오지 않는 드레스로 뒤꿈치를 가리려 안간힘을 썼다.
“구두가…… 제 것이 아니어서요.”
루시는 곧 제 발목을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잔이 든 바구니를 들고 창고를 나가려 했다.
필릭스가 루시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시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잠깐 앉아 있지 그래?”
루시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필릭스가 루시를 천천히 당겨 나무 궤짝 위에 앉혔다.
“그건 이리 줘.”
그는 루시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건네받아 상자 위에 대충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루시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흠칫 놀라는 루시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뭐야, 자리라도 비켜 주길 바랐던 건가.
하긴, 저를 볼 때마다 도망치기 바쁜 애니 이렇게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필릭스는 더욱 그 자리에서 비켜 주기가 싫어졌다.
잠깐 안절부절못하던 것도 잠시, 루시는 고개를 아래로 힘없이 떨어트리더니 바닥만 내려다봤다.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어색한 침묵의 시간만 흘렀다.
“……구두 안 벗어?”
마침내 필릭스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졸린 듯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던 루시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두 뺨은 아까보다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녀가 느릿느릿 구두를 벗더니 옆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 후엔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음?”
필릭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거렸다. 아까부터 어디선가 술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그때 루시의 고개가 그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필릭스는 어깨 위에서 느껴지는 작은 머리의 무게에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루시?”
그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루시 키넌?”
그러나 루시는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눈을 감고서 색색 숨만 내쉬었다.
“루시!”
그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며 루시를 흔들었다.
코끝을 맴돌던 알코올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필릭스는 미간을 좁히며 루시의 얼굴 주변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너 설마…… 술 마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