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화
둘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기숙사 앞에서 출발한 내내 킬킬대고 소곤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루시 키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들뜬 표정으로 자신의 파트너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조잘거리는 중이었다.
뭐야.
필릭스의 얼굴이 또다시 삐딱하게 구겨졌다.
아드리안 외의 남자와도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였어?
갑자기 필릭스는 루시가 아드리안에게 파트너를 신청할 수 있도록 자리까지 비켜 주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로제의 파트너를 자처하면서까지 말이다.
루시는 아드리안의 파트너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따윈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웃고 떠들며 남들처럼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필릭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앞서가는 작은 한 쌍을 노려보았다.
계속 보다 보니 둘은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둘 다 조그맣고, 앳되어 보이는 인상에, 서로를 보며 조잘조잘 떠드는 것이 마치 다람쥐 부부 한 쌍 같았다.
갑자기 필릭스의 마음 한구석에서 짜증이 왈칵 치솟아 올랐다.
“필릭스 베르크.”
귓가에 로제 밀라드의 화난 음성이 날아들었다.
“너 진짜 내 얘기 안 들을 거야?”
“아, 미안.”
필릭스가 루시의 뒤통수에서 눈을 떼었다. 로제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행사에 가는 걸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네가 먼저 나에게 제안한 거잖아?”
로제가 자리에 우뚝 서더니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그럼 수락해 준 나에게 잘 맞춰 줘야 할 거 아냐. 넌 오늘 밤 내가 머리에 쓴 티아라 같은 거야.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라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빛날 수 있도록. 내 말 알아듣겠어, 베르크 공자님?”
말을 끝낸 로제가 새침한 얼굴로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 * *
도서관 홀은 가을 분위기의 황금빛 장식물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입구에 있던 선인장과 꽃 화분들은 어딘가로 치워지고, 대신 호박 등이 그 자리를 은은하게 밝히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발표자들이 시를 암송할 무대 앞에서는 행사의 책임자이자 사회자인 아드리안과 문학 담당인 피터 선생, 사서 에린 부인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체크하고 있었다.
홀 앞에 도착한 학생들이 하나둘씩 입장하기 시작했다. 안으로 밀려 들어온 쉰 명가량의 인원들이 자리를 잡느라 주위가 온통 어수선했다.
“이쯤에 앉자.”
로제가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쪽이 아니라?”
필릭스가 웬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를 고른 로제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쯤이 좋아. 여기서 무대까지의 거리가 내 우아한 걸음걸이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딱 적당한 거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필릭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으나, 로제는 대답 없이 의자에 앉으며 들고 있던 부채를 천천히 팔랑거렸다.
필릭스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자,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루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파트너인 남자애와 무언가 즐거워 보이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각각의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로 홀 안이 웅성웅성했다.
잠시 후, 아드리안이 무대 위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술렁이던 장내가 곧 잠잠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그에게로 쏠렸다.
무대에 오른 아드리안이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가을밤>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었다.
사회자가 제일 먼저 무대에 올라 시를 암송하는 것은 ‘문학의 밤’의 중요한 관례였다.
아드리안의 차분한 목소리가 홀 안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시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그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에 홀린 표정이었다.
심지어 아드리안에게 거절을 당한 뒤 줄곧 불만을 품고 있던 로제마저도 그를 황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필릭스는 슬쩍 시선을 옮겨 루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 역시 입을 헤 벌린 채 아드리안의 시 낭송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맑은 초록색 눈이 유독 반짝반짝 빛났다.
아드리안의 낭송이 끝나자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를 쳤다. 박수는 그가 다음 발표자를 소개하고 무대에서 내려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앞선 낭송자의 대단한 인기에 기가 죽었는지, 1학년 학생 하나가 긴장한 얼굴로 단상 위에 올라왔다. 곧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시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문학의 밤’에서는 시 낭송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와 노래 등, 다양한 재주들을 발표할 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바이올린 연주를 보여 주었고, 또 어떤 학생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들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낭송자들의 시 낭송은 감미로웠고, 연주자들의 연주는 아주 훌륭했다. 밤이 점점 깊어 갔고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었다.
하지만 몇몇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몰래 하품을 하기도 했다. 시나 음악이나 모두 아름다웠지만, 그들에게는 살짝 지루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무언가 색다르고, 가라앉은 장내 분위기를 흥겹게 바꾸어 줄 만한 발표자가 나와 주었으면 하고 사람들은 내심 바랐다.
그때, 아드리안이 뜻밖의 이름을 호명했다.
“다음 순서는 3학년의 로제 밀라드입니다.”
그동안 필릭스의 옆에서 줄곧 박수도 치는 둥 마는 둥 앉아 있던 로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뭐야?”
놀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필릭스를 무시한 채, 로제는 드레스를 살랑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무대 위에 올랐다.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로제 밀라드가 움직일 때마다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곡선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남들의 이목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로제가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줄곧 졸린 눈을 하고 있던 남학생 몇 명이 번뜩 정신을 차리며 박수를 쳤다.
곧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이 무대 위에 흐르고, 로제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노랫말로 유명한 가곡인 <황금의 여왕>이었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우아한 손짓.
로제는 평소에 우쭐대고 남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거만함이 바로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로제 밀라드는 무용에만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재주라면, 무용, 노래 등, 그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섭렵한 듯했다.
필릭스가 무심코 바라본 루시 키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모두가 황홀경에 빠진 듯 로제의 노래를 감상하는 와중에 루시만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로제랑 경쟁할 생각을 하니 막막한가 보지?
필릭스가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름답고 집안도 좋은 데다, 언제나 당당한 로제 밀라드는 어디서든지 눈에 띄는 여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먼저 아드리안을 찾아가 자신을 파트너로 삼아 달라 제안을 하지 않았던가.
루시의 눈에 그녀는 자신의 짝사랑 상대를 언제든 채어 가 버릴 무시무시한 독수리처럼 보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루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루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곧 그녀가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앞을 보았다.
필릭스도 얼른 시선을 돌렸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쳐다보는 거야.
필릭스의 심장이 이유를 모르고 쿵쿵 뛰었다.
그 후 루시는 로제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뻣뻣하게 앉은 채로 로제가 있지도 않은 무대 어느 구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노래가 끝이 났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하고 커다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로제는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며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어땠어?”
자리로 돌아온 로제가 필릭스에게 물었다.
“훌륭했어.”
필릭스가 그녀를 항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온 신경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몇 차례의 발표가 더 지나간 후, 드디어 마지막 순서만이 남았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루시 키넌의 파트너로 온 자그마한 남학생이었다.
슬슬 지겨워지던 차에 다리를 꼬고 느슨하게 앉아 있던 필릭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남학생의 이름은 콜린 코너였다. 작은 몸집의 콜린은 마지막이라는 부담스러운 순서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뚜벅뚜벅 무대로 걸어 나갔다.
콜린 코너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외모에 사람들은 별 기대 없이 그 작은 학생을 바라보았다. 오직 루시만이 작게 박수를 치며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윽고 콜린이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시 낭송이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자세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의 낭송을 들으며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시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아름다운 내용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저건 어디에 나오는 시야?”
로제가 팔짱을 낀 채 필릭스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나 필릭스 역시 그런 시는 어떠한 시집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으므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콜린의 낭송이 끝났다. 그는 허리를 숙여 사람들에게 인사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은 시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를 듣는 동안 줄곧 감동받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사람들이 콜린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심지어 아드리안이나 로제에게 보냈던 박수보다 더 큰 호응이었다.
“뭐야, 그렇게까지 잘 쓴 건 아니었잖아?”
자신보다 더 큰 관심을 받는 콜린 코너를 보며 로제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그러나 필릭스는 로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또다시 루시에게 향해 있었다.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으며 콜린 코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그를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