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화
“뭐?”
로제가 홱 고개를 돌렸다. 뭘 잘못 먹었냐고 묻듯이 필릭스를 쳐다보았다.
반면 아드리안은 놀란 표정으로 필릭스를 보다가 이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드리안의 미소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필릭스는, 로제만큼이나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 키넌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수작이야?”
로제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릭스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로제를 향해 관심을 표현했던 적이 없었다.
로제가 먼저 그에게 호감을 표현했을 때에도 줄곧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랬던 그가 돌연 자신에게 파트너를 신청한 것에 대해, 그녀는 어딘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한편 필릭스는 또 한 번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어 버린 자신에 대해 무척 화가 났다.
루시 키넌의 답답하고 소극적인 행동에 순간적으로 열이 받아 나섰다기엔 너무 과했고, 자신이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랬다기엔 그렇게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필릭스는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아드리안을 한 번 노려봐 준 후 대답했다.
“수작이라니. 네가 아드리안에게 하도 졸라 대는 게 측은해서 그러지.”
“너랑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데.”
로제는 예전에 필릭스에게 여러 차례 거절을 당했던 경험 때문에 그다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얼굴도 똑같은데 나와 가도 상관없잖아?”
필릭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제를 문밖으로 부드럽게 떠밀며 말했다.
“그러니까 불쌍한 내 동생은 그냥 놔두자고.”
필릭스는 그녀를 데리고 도서관을 나서기 전, 루시를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루시는 입을 헤 벌린 채 멍한 눈으로 그와 로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어디 한번 잘해 보라고, 루시 키넌.
필릭스가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 * *
루시 키넌의 짝사랑을 도와주기 위해 충동적으로 선택한 결과는 생각보다 처참했다.
로제는 필릭스의 파트너 신청을 수락하며 더 이상 아드리안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대신 그에게 ‘에벨로자 무곡’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냐고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녀는 베르크 공자에게 단순히 에스코트만을 받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발표회가 끝나면 간소한 파티와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래. 너랑 홀 가운데서 춤을 춘다면 적어도 수도 신문에는 실리지 않겠어? 베르크 공자의 파트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 이름도 좀 더 유명해지겠지.”
“그 좁다란 홀에서 에벨로자 무곡을 추겠다고? 나랑?”
에벨로자 무곡에는 매우 격정적이고 외설적인 동작이 많았다. 시 낭송회 뒤풀이 무도회에서 추었다간, 제노미움 아카데미 역사에 길이 남아 두고두고 회자되기에 딱 좋은 춤이었다.
필릭스는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로제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로제는 한발 뒤로 물러나 춤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좀 더 우아하고 격식에 맞는 춤으로 알아보겠다며 돌아갔다. 필릭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벌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과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모든 일정이 끝난 저녁, 기숙사 방에서였다.
“그래서 너…….”
“너 말이야…….”
둘은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말을 꺼냈다.
“먼저 말해.”
필릭스가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말했다.
“로제랑은 어때.”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로제에 대한 필릭스의 마음을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
“뭐가.”
“문학의 밤 말이야.”
“일단 같이 가기로 했어.”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이 휘파람을 불었다.
“잘해 봐.”
“그런 거 아니거든.”
아드리안의 표정을 보니 필릭스가 아무리 해명한다 해도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넌……?”
필릭스는 오해 풀기를 포기하고서 아드리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 뭐?”
“넌 누구랑 갈 거냐고, 그래서!”
필릭스가 답답하다는 듯 버럭 성을 냈다.
“말했잖아. 난 이번에 사회만 충실히 볼 생각이야.”
“뭐?”
필릭스는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답답한 루시 키넌! 결국 말도 꺼내 보지 못했구나!
저 때문에 나는 로제와 춤까지 추게 될지도 모르는데!
망연한 얼굴로 침대에 엎어진 필릭스가 두 손으로 금발을 헤집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드리안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필릭스는 계속해서 제 머리칼만 쥐어뜯을 뿐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얼굴은 귀신같이 알아볼 정도로 좋아하면서 함께 행사에 가자고도 말 못 하는, 답답한 루시 키넌 같으니라고.
* * *
문학의 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화단에서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여학생 기숙사 앞에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학생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곧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들이 계단을 내려와 자신의 파트너를 찾아갔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필릭스 역시 자신의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깔끔하게 넘긴 그의 금발이 밤하늘 아래서 유독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다른 남학생들보다 여실히 큰 체격과 늘씬한 근육질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 주었다.
몇몇 여학생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파트너 몰래 흘끔거렸다. 필릭스도 그 사실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딱히 내색하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이 소란스러운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다는 사실이 불만스럽고 귀찮을 뿐이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그는 꼼짝없이 로제 밀라드를 에스코트해야 했고, 속으로 홀 한가운데서 그녀와 격정적인 춤을 추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계단 위로 시선을 돌렸을 때.
옅은 베이지색이 감도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 하나가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그 드레스는 목 주변을 금실로 수놓은 나비 문양 외에는 수수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프릴이 잔뜩 달린 데다 온갖 장식들로 화려한 다른 여학생들의 옷차림에 비하면 묻히기 딱 좋았지만, 필릭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에 뒤로 땋고만 다니던 연갈색 머리를 어깨 아래로 자연스레 풀어헤친 루시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어정쩡한 자세로 걷는 모습이 마치 처음 발걸음을 떼는 모습처럼 어색해 보였다.
문득 필릭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루시가 그와 눈을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어느 남학생에게로 급히 걸어갔다.
필릭스는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루시에게 환하게 웃음 짓고 있는 남학생을 훑어보았다.
키는 루시와 비슷했고, 얼굴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왜소한 남자애였다.
그 남자애가 무어라 농담을 던진 듯 루시가 잠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그 이름 모를 남학생이 내미는 팔을 살짝 움켜잡았다.
필릭스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저건 뭐야.
아드리안에게 함께 가자는 말도 못 꺼낸 주제에 웬 다른 남자애의 에스코트를 받는 루시 키넌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때 누군가 필릭스의 어깨에 가뿐히 손을 짚었다. 돌아보자 로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백조를 형상화한 것 같은 새하얗고 가슴이 잔뜩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까지 우아하게 틀어 올린 뒤 깃털을 꽂은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한 마리의 백조 같았다.
그 자리에 서 있던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홀린 눈으로 로제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필릭스.”
그의 이름을 우아하게 부르며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 오는 로제는, 그 시선과 관심들이 아주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필릭스가 삐딱한 얼굴로 묻자 로제가 냉큼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지금 내 모습이 안 보여? 이게 다 시간을 투자한 결과야. 그리고 내 투자를 헛되게 만들면 가만두지 않겠어. 웃어.”
그러더니 로제가 오싹할 만큼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주변을 항해 매혹적인 미소를 날렸다.
그런 로제를 보며 필릭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곧 그는 자신의 파트너를 에스코트하며 도서관 홀로 향하기 시작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앞쪽에서 루시가 예의 그 남학생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높은 구두를 처음 신어 본 것처럼 계속 삐걱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 구두를 몰래 신고 나온 어린아이 같아서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웃겨?”
로제가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뭐?”
“그 망할 신문사에서 내 이름을 잘못 실은 게 웃기냐고. 방금 웃었잖아.”
그녀가 언짢은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그녀는 줄곧 지난 학기에 있었던 아카데미 주최의 무용 대회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나, 베른 데일리라는 한 졸속 신문사가 그녀의 이름을 엉뚱한 이름으로 기재하는 바람에 큰 수모를 당했다.
로제에게는 퍽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지금 필릭스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돋는 이야기 주제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베른 데일리 기자의 대수롭지 않은 실수보다 앞쪽에서 걸어가고 있는 한 쌍의 커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에 더 관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