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화
싱그러운 연두색이던 나뭇잎들은 이제 짙고 성숙한 녹색을 띠어 갔다. 낮에는 여전히 밝고 따뜻한 햇살이 지면 위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해가 지고 나면 제법 쌀쌀한 공기가 교정을 가득 채우곤 했다.
이제 정말로 가을이었다.
루시 키넌이 기숙사까지 찾아와 책을 받아 간 후, 필릭스는 복도나 교정에서 그녀와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더 이상 그녀 앞에서 아드리안인 척하거나, 그녀의 표정과 반응을 낱낱이 살펴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뭐, 궁금했던 답을 알게 되었으니 흥미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필릭스는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베르크 공자 쌍둥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여학생은 드물었고, 그중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아드리안을 몰래 흠모하는 여학생도 한가득이었다.
어떤 여자애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좋아하건 말건, 그에게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는 뜻이다.
이제 신경 꺼야지.
교정을 걸으며 속으로 다짐하던 필릭스는 주변에서 흘러드는 은밀한 소곤거림과 웃음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근처에서 비밀스럽게 귓속말을 하거나 웃음을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연신 필릭스와 아드리안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필릭스가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함께 걸어가던 다른 남학생 자비스가 대답했다.
“‘문학의 밤’ 때문이겠지.”
“작년에도 베르크 공자 쟁탈전이 벌어져서 꽤 볼만했는데.”
옆에 있던 알렉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아.”
그제야 필릭스는 이해가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학의 밤.
매년 가을, 제노미움 아카데미 도서부에서 주최하는 작은 행사로, 몇몇의 참가자들이 무대로 나와 시를 낭송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발표회였다.
아카데미의 그레이트 홀이 아닌, 도서관 건물에 딸린 작은 홀에서 주최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초대받지는 못하였다.
발표자를 포함하여 쉰 명 안팎의 인원만이 도서부에서 나누어 주는 초대장을 소지한 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장에 대한 경쟁률이 꽤 치열했는데, 특히 아드리안이 도서 부원이 되고 나서부터 여학생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초대장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도서 부원이 아닌 필릭스에게도 여러 여학생들이 다가왔었는데, 그들은 용기 넘치게도 자신들에게 행사에 함께 가자고 ‘신청해 줄 것’을 신청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문학의 밤인지 아침인지 하는 행사 따위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여학생들마다 단호하게 퇴짜를 놓았다.
결국 ‘문학의 밤’에 참여하는 베르크 공자는 아드리안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아드리안을 사이에 둔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작년 가을의 승자는 클레어 헤밀턴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차분한 성격을 가진 클레어는 헤밀턴 후작가의 영애로 아드리안과 같은 학생회이기도 했다.
그날 밤, 홀로 기숙사에 남았던 필릭스는 창가에 서서 아드리안이 클레어를 에스코트하며 멀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아름다운 선남선녀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말이다.
동생의 연애에 별 관심이 없던 필릭스도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이번에도 클레어 헤밀턴과 갈 거냐?”
필릭스가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아드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누구?”
뜻밖의 대답에 알렉이 궁금한 얼굴로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클레어 헤밀턴 말고 너랑 갈 만한 여학생이 있었던가.”
알렉의 질문에 그저 웃기만 하는 아드리안에게, 필릭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로제 밀라드는 어때.”
로제 밀라드는 선명한 붉은 머리에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3학년 여학생이었다. 입학 초에 그녀는 대놓고 필릭스에게 관심을 표했었는데, 베르크 공자씩이나 되는 그가 고리타분한 예절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필릭스가 수 차례 마음이 없음을 명확히 하자 그녀 역시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 후 로제는 필릭스 대신 아드리안에게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로제?”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이번에도 아드리안은 웃기만 했다. 동생의 느긋한 미소를 보며 필릭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루시 키넌은 어때?
걔도 널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러나 필릭스는 턱까지 차오른 그 말을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렸다.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대체 왜 자신이 그런 소릴 하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가 관심 있는 거 아냐?”
“뭐?”
갑작스러운 아드리안의 질문에 필릭스는 길 위에 우뚝 멈추어 섰다.
“무슨 소리야.”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왜 루시 키넌을?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이야?”
예상보다 더 발끈하는 제 형의 얼굴을 보며 아드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이야? 너 사실은 로제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야?”
아아, 로제.
필릭스가 이내 허, 하며 한숨을 뱉어 냈다.
“아냐, 그런 거.”
그가 미심쩍은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안과 친구들의 눈길을 뒤로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루시 키넌?
그가 몰래 헛웃음을 지었다.
참나, 말도 안 되는 소리.
* * *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필릭스와 아드리안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서관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휴게 공간에 앉아 쉬었다.
쉬는 중에도 아드리안은 테이블 위에 ‘<문학의 밤> 발표자 명단’이라고 적힌 종이를 올려놓고 열심히 검토하느라 바빴다. 발표자들의 명단과 발표 내용을 미리 확인하는 것은 도서 부장인 아드리안의 몫이었다.
반면 도서부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필릭스는 창밖을 바라보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루시 키넌이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녀는 북 카트를 끌며 반납된 책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필릭스는 일부러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며, 창밖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끄는 카트의 바퀴 소리가 계속 그의 귀를 자극했다. 더군다나 바퀴 소리는 멀어지지 않고 계속 가까워지기만 했다.
잠시 후, 필릭스는 루시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일부러 그들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카트 위의 반납 도서는 이미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고, 루시는 괜히 책장의 책을 빼었다 꽂았다 하며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곧 필릭스의 시선은 루시의 교복 재킷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문학의 밤’ 초대장에 가 닿았다.
설마.
필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고 싶은 건가?
주변에서 쭈뼛거리며 서성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인 것 같았다.
정작 아드리안은 그런 루시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발표 예정자들이 제출한 시를 읽고 있었다.
루시는 가끔 아드리안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필릭스가 신경 쓰인다는 듯 초조한 눈길로 흘끔대기도 했다.
아.
그러니까, 내가 방해꾼인 셈이네.
본의 아니게 루시 키넌의 파트너 신청을 방해한 것이 되어 버린 필릭스가 왠지 모를 짜증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흥, 비켜 줄 줄 알고.
필릭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까지 꼬았을 때였다.
도서관 출입문이 홱 열리더니 한 여학생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장미처럼 화려한 얼굴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로제 밀라드였다.
그녀는 도서관을 한 번 휘 둘러본 뒤,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필릭스와 아드리안을 발견하고는 곧장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쌍둥이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 도서관인데. 조용히 등장해 줄래?”
필릭스가 의자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핀잔을 주었다. 그제야 로제는 이제 알겠다는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아드리안 베르크.”
그녀가 좀 전의 필릭스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조금도 낮추지 않은 목소리로 아드리안을 불렀다.
“너 클레어의 파트너 신청을 까 버렸다며?”
그녀의 거침없는 언행에 아드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중히 거절했다고 표현해 주면 고맙겠어.”
“그럼 네 파트너 자리는 비어 있겠네?”
로제가 아드리안의 말을 싹 무시하며 물었다.
“그럼 문학의 밤에 나랑 같이 가자.”
로제의 입에서 익히 예상했던 제안이 흘러나왔다.
필릭스는 곧바로 루시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쪽으로 등을 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카트 손잡이를 꼭 잡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로제와 아드리안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어봐 준 건 고맙지만.”
아드리안이 로제의 저돌적인 신청에 조금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파트너 없이 사회만 충실히 보려고 해.”
그가 에둘러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내가 주관하는 마지막 도서부 행사일 테니까.”
하지만 로제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나도 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파트너라고 해서 나에게 대단한 신경을 써 줄 필요도 없고. 그냥 입장할 때와 퇴장할 때 에스코트만 해 주면 되잖아?”
하지만 로제의 요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필릭스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제는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받기를 좋아했고, 참여하는 무도회마다 화려한 춤 솜씨를 뽐내며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곤 했다.
그런 로제가 아드리안에게 고작 에스코트만을 원할 리가 없었다.
로제의 끈질긴 설득과 아드리안의 곤혹스런 거절이 담긴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시 키넌의 어깨가 축 처지고 있는 것을 필릭스는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뒤통수가 왠지 시무룩해 보였다.
저 바보.
필릭스의 마음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답답해 죽겠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여학생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아드리안 베르크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겠다고 감히 마음을 먹은 루시 키넌이 우스웠었다.
그런데 지금은, 좋아하는 선배를 남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한 채 축 처져 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나는 것이었다.
대체 내가 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루시 키넌 때문에 왜 답답하고 화가 나는지 필릭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드리안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네가 관심 있는 거 아냐?’
필릭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루시 키넌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가는 건 어때, 로제?”
필릭스의 입에서 충동적인 말이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