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화
필릭스는 눈을 크게 떴다.
헛것인가.
그러나 긴장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서서 에메랄드빛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분명 루시였다.
“……안녕하세요.”
루시가 조그만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드리안을 보러 온 것인가.
그녀의 인사에 대꾸하는 것조차 잊은 채 필릭스는 생각했다.
이어 루시가 만나러 온 사람이 자신이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문가에서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루시는 잠시 주저하더니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초대받지 않은 모임에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저…….”
마침내 루시가 필릭스를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루시?”
침대에서 아드리안이 부스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루시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남학생 기숙사는 여학생 출입 금지잖아.”
제노미움 아카데미에서는 이성 간의 기숙사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말에 루시는 종이 하나를 들어 보였다. ‘출입 허가서’라고 적힌 그 종이에는 남학생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감 로렌의 서명이 휘갈겨져 있었다.
“로렌 사감님께 허락을 받았어요.”
“알 만하다. 로렌 사감은 언제나 여학생들에게 마음이 약하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아드리안이 잠이 완전히 깨 버린 듯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그도 루시가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루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필릭스를 향해 돌아섰다.
“필릭스 선배님. 오늘은 꼭 책을 받아 가야 해요.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그 책을 찾으러 온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어요.”
“책? 설마 <무리넨의 역사>?”
대답은 필릭스가 아니라 아드리안에게서 날아왔다. 그가 금발을 쓸어 넘기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 책을 연체시킨 게 너였어?”
아드리안까지 저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그 책을 빌리러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이 들이닥친다는 루시의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았다.
“대체 그 책이 뭐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 대는 거야?”
필릭스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르켈 선생님이 이번 학기에 내주신 과제에 그 책이 필요하다잖아. 역사 수업을 듣는 2학년들은 모두 그 책을 구하려고 수도의 온 책방을 뒤지고 다닐 정도라고.”
아드리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쌍둥이 형에게 설명하더니, ‘양심이 있으면 당장 반납해라’ 하고 덧붙였다.
아침부터 열을 내느라 이제 완전히 잠이 깨 버린 것 같은 아드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난 후, 잠옷 위에 가벼운 외투만 걸쳤다.
“고생이 많다, 루시. 못난 우리 형 대신 내가 사과할게.”
기지개를 한 번 쭉 켠 그가 방을 가로질러 가며 말했다. 곧장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 식사를 할 참인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이 방을 떠나자 순식간에 고요함이 밀려들었다.
“선배님, 책은…….”
정적을 뚫고 루시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꺼냈다.
필릭스는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더니 가방 속에서 책을 끄집어냈다. 그는 뒤쪽에서 페이지 몇 장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루시에게 보여 주었다.
“아직 이 정도 남았어. 금방 읽고 줄 테니 저기 앉아서 기다려.”
그가 엄지로 자신의 침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황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루시는 필릭스가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 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쭈뼛거리며 침대에 가 앉았다.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숨 막히는 정적 가운데서 필릭스가 이따금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나 필릭스의 머릿속은 솟아나는 의문과 당황으로 꽤나 소란스러웠다.
뭐 하러 또 책 읽는 척을 하는 거지? 그냥 줘 버리면 되잖아.
스스로의 행동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는 책을 읽는 척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자신의 침대에 조용히 앉아 있는 루시 키넌의 기척을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해 신경을 바짝 세우며.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냥 돌아갈걸, 하며 후회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선배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기다리라 명령한 자신에게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필릭스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는 후회하는 표정도, 짜증 난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필릭스의 침대 맡에 걸어 둔 그림 하나를 애정 어린 눈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어릴 적 모습을 그려 놓은 초상화였다.
그림 속 어린 필릭스의 표정은 뚱하고 무뚝뚝해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을 바라보는 루시의 입가에는 곧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어 그녀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림 속 아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필릭스의 눈이 놀람으로 휘둥그레지고, 입술은 슬며시 벌어졌다.
……왜 내 얼굴을?
심장이 뭍 위로 올라온 고기처럼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늘 아침 자신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드리안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팔딱대던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졌다.
탁.
힘 빠진 그의 손안에서 책이 스르륵 덮였다.
그 소리에 루시가 화들짝 놀라 그림에서 손을 거뒀다.
“아…….”
필릭스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필릭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그가 루시를 쳐다보지 않고 팔만 그녀에게 내뻗으며 책을 내밀었다.
“자.”
“더, 덜 읽으신 거 아니에요?”
등 뒤에서 루시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됐어, 가져가.”
이윽고 가벼운 발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필릭스의 손안에서 책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책을 받아든 루시가 서둘러 문으로 걸어갔다. 머리칼을 뒤로 꽂은 귓등이 새빨갰다. 그녀가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었을 때, 필릭스가 그녀의 등 뒤에다 대고 말했다.
“저거 내 초상화야.”
아드리안이 아니라.
루시가 홍당무 같은 얼굴로 잠깐 그를 돌아보더니 재빨리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필릭스가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널브러졌다.
루시 키넌이 초상화 속 그의 얼굴을 아드리안인 줄 알고 쓰다듬었다. 그것도 꽤나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로써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쌍둥이 아드리안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 *
그러니까 우리를 한눈에 구별해 낼 수 있었던 게 다 ‘사랑의 힘’이었단 거지?
그날 저녁, 필릭스는 침대 위에 삐딱한 자세로 걸터앉아 아드리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뒤에서는 언제나 후광이 비친다, 뭐 그런 건가.
자신이 몇 달 동안이나 의문을 품고 고민했던 문제의 답이 고작 그런 유치한 이유였다고 생각하니, 필릭스는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진작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조금 짜증이 났다.
자신과 마주쳤을 땐 무표정하던 얼굴이, 아드리안과 마주치면 환한 웃음을 짓는다. 자신과 있을 땐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아드리안과 있을 때만 끊임없이 조잘댄다.
너무나 정직하고 확실한 표현이 아닌가.
“넌 좋겠다.”
필릭스가 옷을 갈아입는 중인 아드리안의 뒤통수를 향해 불쑥 말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뭐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우리를 구별 못 하시던 거 기억나냐?”
“지금도 그러시잖아.”
아드리안의 심드렁한 대답에 필릭스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지금도 그러시긴 하지.”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필릭스의 머릿속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옛 기억들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릴 적의 베르크 공자 쌍둥이는 하나의 주형틀에서 찍어 낸 것처럼 똑같이 생겨 도저히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베르크 공작과 공작 부인조차도, 태어나자마자 필릭스의 허벅지 안쪽에 장남이라는 뜻으로 새겨 둔 가문의 문장을 통해서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문장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므로, 공작 부부가 쌍둥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름을 잘못 부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드리안.”
“아드리안.”
필릭스는 어머니가 자신을 동생의 이름으로 부르던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자, 아드리안.”
자신을 몰래 빈방으로 데려가 손에 과자를 쥐어 주던 어머니.
“필릭스가 오기 전에 어서 먹어 치워라.”
자꾸만 문밖을 확인하는 어머니의 불안한 눈빛을 보며 차마 자신이 아드리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던 어린 날의 필릭스는, 그저 어머니가 쥐여 준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필릭스에게 말해선 안 돼.”
입가에 묻은 과자를 보드라운 손으로 다정하게 털어 주던 어머니.
“아드리안에게만 주는 거니까. 알겠지? 엄마가 몰래 주는 것들, 모두 필릭스에겐 비밀로 하거라.”
어머니를 실망시켜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린 날의 그는 자신의 슬픔을 감추어 두었었다. 왜 자신은 아드리안처럼 사랑해 줄 수 없었느냐는 물음도 함께.
“그래서.”
옷을 마저 갈아입은 아드리안이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내가 뭐가 좋겠다는 건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흐음, 글쎄.”
필릭스는 일부러 동생을 약 올리며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너를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한 너를 그 애가 알아봐. 단지 좋아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릭스는 왠지 화난 어조로 동생에게 소리쳐 주고 싶은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소리치고 싶은 마음과 절대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싸워 댔다.
잔뜩 약이 오른 아드리안에게서 별안간 베개가 날아왔다. 폭신한 베개에 얻어맞은 필릭스가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