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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화 (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화

가을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하늘을 뒤흔들던 매미 소리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대신 밤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기숙사 창문으로 흘러들었다.

낮에는 시원해진 날씨를 만끽하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모두들 오랜만에 찾아온 이 산뜻한 계절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여기 한 사람만 빼고.

“에취!”

필릭스는 길을 걷다가 간질거리는 코끝을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정말 끔찍한 계절이네.

그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잠깐 벤치에 앉았다. 가방 속에서 알레르기 약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뒤적여도 약통은 보이지 않았다. 기숙사에 놓고 온 듯했다.

“아, 젠장.”

그가 욕을 내뱉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여기저기 줄기를 뻗치고 있는 연두색 이파리들이 보였다.

‘마르암 덩굴’은 매 가을마다 꽃을 피우는, 베로스 제국 어디에나 자생하는 식물이다.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잡초였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은 그 덩굴이 꽃을 피우건 말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를 선천적으로 달고 태어난 필릭스는 그 식물을 볼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를 피해야 했다.

끝없이 튀어나오는 재채기는 물론이고 하루 종일 간질거리는 코끝은 그의 기분을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주치의가 처방해 준 알레르기 약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저 재채기만 멎게 해 줄 뿐이었다.

그런데 작년 가을, 똑같은 증상으로 고통을 받던 아드리안이 어디선가 구해 가져다준 약은 정말이지 신통방통했다.

재채기도 멈추게 해 줄뿐더러, 코끝의 간지러움도 말끔히 없애 주었던 것이다.

아, 그 약이 없으면 안 되는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귀찮았으나, 수업 시간에 계속 재채기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필릭스는 결국 약을 가지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였다. 익숙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루시 키넌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뜻밖의 등장에 필릭스는 잠시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루시는 멀리서 본 자신을 아드리안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가까이 와서 그가 필릭스라는 걸 알아차리고 나면 또 도망칠 게 뻔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는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약통이나 찾으러 가기 위해 벤치 위에 풀어헤친 짐들을 다시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멀어져 갈 것이라 예상했던 발소리는 어쩐지 그에게로 더욱 가까워졌다.

이윽고 동그란 구두코가 그의 시선 아래 멈추어 섰다.

필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루시의 에메랄드 같은 초록빛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지.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뭐야.

눈을 마주치고 나서 몇 초가 흘렀다. 이때쯤이면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피해야 할 루시 키넌이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필릭스는 묘하게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생각했다.

……아드리안으로 착각한 건가? 이번에야말로?

흐르는 침묵이 어색해지려 할 즈음, 루시가 입을 열었다.

“필릭스 선배님. 죄송하지만 선배님이 9월 3일에 대출하신 <무리넨의 역사>가 이틀째 연체되어서요.”

작지만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가 필릭스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목소리는 옷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가을바람처럼 그의 맨살을 서늘하게 만들고 흩어졌다.

그가 몸을 살짝 떨었다.

아아. 책.

그러니까 그녀는 단지 연체 도서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그 책은 대기자가 많아 되도록이면 빨리 반납해 주셨으면 해요.”

필릭스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루시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 덜 읽었는데.”

필릭스가 충동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책은 당장 가방 안에 있었다. 필요한 정보는 이미 노트에 옮겨 적어 두었고, 그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책을 돌려주는 것이 도서관까지 가서 반납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릭스는 왠지 책을 그녀에게 순순히 돌려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충동적인 대답이 루시를 당황스럽게 만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반납 기한을 이틀이나 넘기신걸요. 다들 몇 번씩이나 찾아와서 그 책을 찾고 있어서…….”

그녀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필릭스가 가방 속에서 <무리넨의 역사>를 꺼냈다. 그제야 루시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희고 자그마한 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절히 받아 가길 원했던 그 책은 필릭스의 무릎에서 느닷없이 펼쳐졌다.

“그럼 기다려.”

“네?”

필릭스가 다리까지 꼬고 앉아 시선을 책에 고정시키며 말했다.

“몇 장 안 남았으니까 옆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저…….”

루시가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정말로 자리에 버티고 앉아 묵묵히 책을 읽으려는 것 같은 필릭스의 기세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책을 읽는 척하는 필릭스의 두 눈이 제 발치에서 어쩔 줄 모르며 서성거리는 구두를 흘끔거렸다.

그냥 가 버리려나?

그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원체 저만 보면 피하기 바쁘던 애가 아닌가.

그런데 발길을 돌리나 싶던 루시가 천천히 벤치 끝으로 걸어가더니 최대한 필릭스와 떨어진 끝자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벤치가 아니라 차라리 허공에 앉았다고 표현하는 게 알맞을 정도로 그녀의 자세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필릭스는 곁눈질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를 슥 당겨 웃었다.

루시 키넌은 정말 웃긴 애였다.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저를 피해 도망갈 때는 언제고, 이제는 책 한 권 받아 가겠다고 불편한 자세를 감수하며 기다리는 꼴이라니.

필릭스가 몰래 피식피식 웃는 것도 모른 채 루시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발을 까딱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기도 하고, 주변의 나무 덤불을 괜히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필릭스는 읽고 있지도 않은 책을 계속 들여다보며 이따금 책장을 넘기는 척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코끝이 간질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을 만큼.

“아드리안!”

평온함을 깨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가까운 건물에서 알렉을 선두로 필릭스와 같은 3학년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필릭스를 발견한 그들이 곧장 벤치로 다가왔다.

“엇, 아드리안은 이런 눈으로 날 보지 않는데.”

알렉이 자신에게 살벌한 눈빛을 쏘아 대는 필릭스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드리안이 아니라 필릭스겠지!”

다른 남학생 하나가 필릭스 옆에 털썩 앉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벤치는 필릭스 주변으로 모여든 남학생들 때문에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저리 안 가?”

필릭스가 얼굴을 삐딱하게 구기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더욱 그에게 엉겨 붙어 왔다. 손바닥으로 아무리 얼굴을 밀어내도 그들은 꿈쩍도 안 했다. 도리어 더욱 장난스럽게 들러붙을 뿐이었다.

난리판 속에서 필릭스는 고개를 돌려 벤치 끝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곧 벤치에서 멀어지고 있는 루시 키넌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틈에 무릎 위에 있던 <무리넨의 역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필릭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뒤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나한테서 당장 떨어져!”

* * *

결국 책은 다시 필릭스의 가방으로 들어간 뒤, 그대로 잊혀져 버렸다.

그는 알레르기 약을 가지러 기숙사로 되돌아갔다가 수업에 늦지 않으려 교실로 뛰어가는 등 바쁜 하루를 보냈다.

수요일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늦은 저녁까지 수업이 꽉꽉 들어차 있었고, 중간에 괜한 오기로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척하는 바람에 더욱 일정이 꼬여 버렸다.

결국 마지막 수업이었던 검술 대련까지 마치고 돌아온 필릭스는 샤워를 끝내자마자 침대에 아무렇게나 쓰러졌다.

“야, 거긴 내 침대야.”

같은 방을 쓰는 아드리안이 소파에 앉아 말했다. 필릭스는 대꾸하기 귀찮다는 듯 손만 휘휘 내저었다.

아드리안이 무어라 덧붙이는 말은 필릭스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열어 놓은 창밖으로 날아가 흩어져 버렸다.

필릭스는 뺨에 와 닿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환히 밝아 있었고 어디선가 새들이 시끄럽게 울어 댔다. 몸을 일으키자 자신의 침대를 빼앗긴 채 필릭스의 침대에서 잠이 든 아드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그날의 첫 수업은 오후에 있었다. 필릭스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아드리안은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힌 채였다. 그가 그렇게 늦잠을 자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 역시 자신 못지않게 빠듯한 어제를 보낸 모양이었다.

필릭스는 쌍둥이 동생의 몸 위에 이불을 바로 덮어 주고 소파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노크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필릭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베르크 쌍둥이의 방을 찾아올 친구들 중에 문을 저렇게 소심하게 두드릴 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필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 문가에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교복 차림의 루시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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