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화
하지만 그와 비슷한 일은 몇 번 더 일어났다.
검술 수업 후, 필릭스와 아드리안이 머리에 똑같이 수건을 뒤집어쓴 채 수련장을 나왔을 때, 우물쭈물하며 다가온 루시는 정확히 아드리안을 구별해 내더니 용건을 말했다.
또 꽤나 굵은 봄비가 내리던 날, 우비용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루시 키넌은 분명, 머리 길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베르크 쌍둥이를 구별하고 있었다.
“야, 알렉. 혹시 내 귀에 점 같은 거 있냐?”
“점?”
필릭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알렉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꺼이 그의 귀를 확인해 주었다.
“없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필릭스가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야, 뭐 해.”
황당해하는 친구의 말을 무시하며 필릭스는 옆에 앉아 있던 아드리안까지 끌어당겼다.
“나랑 아드리안 가마 위치 좀 봐 봐. 어때? 달라?”
“……똑같은데.”
그럴 수가. 가마 위치까지 똑같다니.
필릭스는 새삼 놀라워하며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 사실은 내 도플갱어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점도 아니고 가마도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그것밖에는 없다.
“……아무래도 내가 아드리안보다 좀 더 잘생기긴 했지?”
농담이라기엔 꽤 진지한 얼굴로 묻는 필릭스를 보며 알렉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 둘, 거울을 마주 세워 둔 것처럼 똑같거든!”
결국 루시 키넌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도 못한 채 학기가 끝이 났다. 아카데미는 여름 방학에 접어들었고, 공작저로 돌아간 필릭스는 더 이상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분명 다짐을 했는데.
계속 생각이 났다. 계속 궁금했다.
대체 뭐가 다른 걸까.
그 애 눈에 우리는 뭐가 다른 거지?
루시 키넌의 눈에만 보이는 자신과 아드리안의 다른 점을 알아내든가, 아니면 루시 키넌이 그들 쌍둥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기어코 보아야 이 쓸데없는 고민도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필릭스는 공작저를 떠나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날 밤, 길었던 금발을 스스로 싹둑 잘랐다.
거울 앞에 서서 들여다본 자신은, 놀라우리만치 제 쌍둥이 동생과 똑같았다. 이 정도라면 제아무리 루시 키넌이라도 자신들을 구별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필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째.
패기 넘치게 머리를 싹둑 잘라 버렸던 필릭스는 성급했던 자신의 선택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불만을 토로했을 땐 그저 장난스럽게 웃어넘기고 말았지만, 이제 슬슬 저도 사람들의 착각이 성가시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드리안!”
“나 필릭스야.”
“아드리안 군!”
“필릭스입니다.”
“아드리안? 아니, 필릭스인가? ……아드리안 맞지?”
“필릭스라고!”
몇 번째인지 모를 오해를 받은 끝에 성을 버럭 내 버린 필릭스는 사람들을 피해 복도를 걸어갔다. 이제 아드리안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표정을 짓고 걸어오던 사람과 마주쳤다.
“아드리안.”
사람들이 저에게 그토록 찾아 대던 동생이었다. 그 역시 자신처럼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야, 필릭스.”
아드리안이 무언가에 질려 버린 듯 미간을 좁힌 채 형을 불렀다.
그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 전에 필릭스가 얼른 두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다. 동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기를게, 머리. 그리고 다신 자르지 않을게.”
“……올해 들어 네가 한 말 중 제일 현명한 말이네.”
아드리안이 벽에 기대며 푸스스 기운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졸업반에, 학생회장에, 도서 부장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그 많은 일들을 해내는 동생은 필릭스의 눈에 상당히 지쳐 보였다.
“너 괜찮냐?”
필릭스의 물음에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가득한 형의 얼굴을 본 그가 이내 씩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잠을 좀 설친 것뿐이야.”
미련한 자식.
필릭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히 말할 것이지.
힘들어도 괜찮은 척, 숨어서 바동바동 혼자 애를 쓰는 건 아드리안의 오랜 버릇이었다. 필릭스는 그런 동생이 안타까운 동시에 답답했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냐? 이건 뭔데?”
필릭스가 아드리안이 들고 있던 종이를 뺏어 들었다.
두 장에 걸쳐 책의 이름들이 빽빽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번 학기에 들여올 도서 목록이야. 도서관에 갖다줘야 해.”
제노미움 아카데미 도서관의 운영은 사서인 에린 부인을 도와 도서부에서 함께 담당하고 있었다. 그 사실과 함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에 필릭스가 눈을 빛냈다.
“이건 내가 갖다줄게.”
필릭스가 종이를 챙기며 말했다.
“넌 빈 교실에 들어가서 잠깐 눈 좀 붙이지 그래?”
쌍둥이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아드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드리안은 곧장 빈 교실을 찾아 복도를 떠났다.
필릭스도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비장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는 마지막으로 루시 키넌과 마주해 보기로 했다.
며칠 전 교정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녀는 필릭스를 알아본 듯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잠깐 그를 아드리안이라고 부르며 착각할 뻔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연기만 완벽하면, 루시 키넌을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 앞에 도착한 필릭스는 복도에 설치된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단정하게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자 소름 끼치도록 아드리안 같아 보여 그는 잠깐 진저리를 쳤다.
필릭스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서인 에린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책장 근처에서 여학생 하나가 분주히 책을 빼어 바닥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루시 키넌이었다.
필릭스가 조심스레 다가가도 일에 열중인 그녀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책장 아래쪽에 있는 책을 빼내느라 교복 치마 밑단에는 하얗게 먼지가 묻어 있었다.
필릭스는 또 한 번 목을 가다듬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시는 흘끔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다시 책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선배.”
그녀가 필릭스의 얼굴을 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책장 앞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그녀는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도저히 <아쉴라드 전집>을 꽂아 둘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아요.”
루시는 책장의 마지막 책까지 빼어 이미 높게 쌓아 올려진 책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책 기둥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그녀가 황급히 중심을 바로잡았다.
“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학교에 책장을 더 구비해 달라고 요청할 걸 그랬어요. 지금 요청서를 써 봤자 당장은 안 들어올 테고.”
조잘대며 말을 쏟아 내는 루시를 보며 필릭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서 목록인가요?”
루시가 필릭스의 손에서 종이를 휙 낚아채어 갔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목록을 훑어 내려갔다.
“<아쉴라드 전집> 40권…… <제국의 정령들>…… 이건 기존에 있던 책은 버려야겠어요. 너무 낡아서 몇 장이 뜯어졌더라고요. ……<베르트나 신부 설교집>? 이건 왜 또 들어오는 거죠? 빌려 가는 사람도 없는데.”
필릭스의 눈에는 그녀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이는 모습도 신기해 보였다. 그와 마주하면 항상 굳은 표정으로 도망만 치던 그녀가 그토록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줄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목록을 모두 확인한 루시가 종이를 책장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
“일단은 이 책들부터 서고로 옮기는 게 좋겠어요.”
루시는 제일 가까이에 있던 책 더미를 들어 올린 뒤 필릭스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기를 안겨 주듯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넘겨주었다. 필릭스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루시가 넘겨준 책에서 손을 떼려다 말고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선배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으시죠?”
책 더미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선 루시에게서 쌉싸름한 약초 냄새가 뒤섞인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났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루시가 웃으며 다시 책들을 빼앗아 갔다.
“콜린을 불러서 같이 옮기면 금방 끝날 거예요.”
필릭스가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서 대꾸 없이 서 있기만 하자,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어디 아프…….”
무언가 말하려던 루시가 말을 뚝 끊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흘리는 루시의 안색은 금세 창백해져 있었다.
투두둑.
그녀가 들고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죄, 죄송해요!”
루시가 외쳤다.
“저는 아드리안 선배인 줄 알고…….”
“아, 난…….”
필릭스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때 뒷걸음질 치던 루시가 높게 쌓아 둔 책을 건드리는 바람에 책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당황한 루시가 급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순간 필릭스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도와주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자신이 아드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유령이라도 본 듯한 루시의 표정이 떠올라서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의 도움을 원치 않을 것만 같았다.
결국 필릭스는 몸을 돌려 도서관을 나왔다.
그는 발 닿는 대로 복도를 걸으며 제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편한 거지?
아드리안과 있을 때는 잘만 웃고 떠들면서 자신과 마주하면 괴물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굳어 버리는 루시 키넌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