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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화 (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화

제노미움 아카데미, 남학생 기숙사.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필릭스가 들고 있던 선물과 편지들을 테이블 위에 쏟아 냈다. 모두 여학생들에게 받은 것이었다.

하나같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들이었지만, 필릭스의 성의 없는 손길에 그중 몇 개가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아드리안이 그것들을 대신 줍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포장지에 적힌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왜 내 선물까지 네가 받아 와?”

아드리안의 물음에 필릭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대답했다.

“너인 줄 알고 주는 걸 어떡해.”

“너 머리 다시 안 기를 거야?”

“덥다니까.”

어느새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띤 필릭스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제 쿠키 선물을 집어 든 후, 선물을 뜯는 사람의 설렘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리본을 풀어냈다.

아드리안은 쿠키를 입 안으로 던져 넣는 필릭스의 짧은 머리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름 방학이 끝난 후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난 필릭스를, 사람들은 종종 그의 쌍둥이 형제인 아드리안으로 착각하곤 했다.

얼굴도, 키도, 목소리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둘을 그들은 오직 머리카락의 길이로 구분해 왔던 것이다.

짧은 금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쪽이 동생 아드리안.

반면 긴 금발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셔츠의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쪽이 형 필릭스.

이건 아카데미 학생들과 선생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알려진 베르크 쌍둥이 구별법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또 다른 쌍둥이 형제로 착각하여 말을 거는 것도 꽤 성가신 일이었으므로, 필릭스와 아드리안은 이 ‘룰 아닌 룰’을 몇 학기 동안이나 고수해 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필릭스가 그 룰을 깨고 긴 머리를 자른 채 나타났던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헷갈려 하잖아.”

아드리안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럼 바꾸자. 이제부턴 네가 길러.”

필릭스는 쌍둥이 동생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생각이 없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이제 아무도 우릴 구분할 수 없게 될걸.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아드리안의 그 말에는 필릭스도 피식 웃고 말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였다.

“머리 길이가 무슨 상관이야.”

마지막 쿠키까지 입 안에 넣은 필릭스가 손을 탁탁 털어 내며 말했다.

“어차피 베르크 공자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신경도 쓰지 않을걸.”

길게 쉴 틈도 없이 필릭스에게는 다음 수업이 남아 있었다. 그는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뒤,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난 이렇게 바쁜데 넌 왜 그렇게 한가한 거야? 수업 없어?”

필릭스가 건들거리며 묻는 말에 아드리안은 또 한 번 이마를 찌푸렸다.

“한가하다니? 곧바로 학생회 일을 처리하러 가 봐야 해. 도서부 일도 있고.”

아드리안은 학생회장과 도서 부장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었다. 필릭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열정이었다.

“그러게 내가 필수 과목은 진작 들어 두랬지? 그동안 수업 안 듣고 팽팽 놀았으니 지금 그렇게 바쁜 것 아냐.”

동생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기미가 보이자 필릭스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아드리안이 한번 훈계를 시작했다 하면 그 누가 와도 말릴 수 없었다.

새로이 시작된 2학기.

달 수로는 가을에 접어들었으나 교정은 여전히 여름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은 따가웠고, 싱그러운 녹색으로 우거진 나무에서는 요란한 매미 소리가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뜨겁게 달궈진 교정을 걸으며 필릭스는 아드리안이 한 말을 생각했다.

‘이제 아무도 우릴 구분할 수 없게 될걸.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부모님조차도 그들 쌍둥이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필릭스는 자신을 몇 번이고 아드리안이라 부르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 애’가 있으니까.

필릭스는 길 위의 돌멩이를 걷어차며 걷다가 우뚝 멈추었다.

악마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 애’가 길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루시 키넌.”

필릭스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구불거리는 연갈색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땋고, 이 더운 날씨에 목까지 셔츠 단추를 채워 입은 고지식한 모습.

걸음걸이마저 반듯하고 올곧은 그 아이는 작은 노트를 보며 길을 걷다가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필릭스를 발견하고 마찬가지로 우뚝 멈추어 선 루시 키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가늘어졌다가, 다시 휘둥그레졌다.

아니, 또 가늘어진다.

흥, 고민 좀 해 봐라.

필릭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분명 자신 앞에 선 베르크가 아드리안 베르크인지, 필릭스 베르크인지 머리를 쥐어짜 내며 고민 중일 테지.

필릭스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드리안이 자주 짓는 미소였다.

누구나 그를 아드리안으로 착각하게 만들 만한, 상냥한 미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얼굴에 친근한 미소를 띤 루시 키넌이 성큼성큼 자신에게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필릭스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아드리안 선배, 이따가 학생회실에서 회의가 있으시다고…….”

들릴 듯 말듯 작고 맑은 목소리로 말을 걸며 다가오던 루시 키넌은, 하지만,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떠오른 당혹감만이 그녀의 표정을 가득 채웠다.

“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낸 루시 키넌이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아주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지는 루시 키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필릭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음속을 만족스럽게 채워 주던 승리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가 거칠게 자신의 금발을 헤집었다.

“열 받네.”

* * *

필릭스가 루시 키넌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건 지난 1학기. 그와 아드리안이 똑같은 모자를 쓰고 나타났던 어느 봄날이었다.

필릭스는 긴 머리를 말아 올려 모자 속에 감추었으므로, 아드리안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졌다.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은 물론이고, 제일 친한 친구인 알렉마저 그들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무슨 수작이야? 빨리 벗어.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잖아.”

그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며 쌍둥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안 돼. 오늘 아버지께서 오시기로 하셨어.”

“베르크 공작님께서?”

아서 베르크 공작은 베로스 제국 내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권력가이자 재력가로서, 제노미움 아카데미에도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두 아들은 그에게 한 치의 꼬투리도 잡히지 않기 위해 말끔하고 완벽한 옷차림을 갖추고 등교했던 것이다. 심지어 필릭스는 답답하다며 멋대로 생략하고 다니던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아버지가 다녀가시기 전까진.”

필릭스가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거칠게 바로잡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오면 그와 아드리안 역시 교장실로 부름을 받아 가게 될 터였다. 성가신 아버지의 아카데미 방문이 어서 끝났으면 싶었다.

“저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필릭스와 아드리안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여학생이 신비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도서부 신입 명부’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도서 부장인 아드리안에게 명부를 전하기 위해 온 듯싶었다.

그제야 필릭스는 그 여학생이 도서관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도서 부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심심하던 차에 필릭스는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는 아드리안이 먼저 나서기도 전에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여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그는 여학생이 자신에게 명부를 건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종이를 든 채로 멀뚱히 필릭스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

이윽고 그녀가 굳어진 얼굴을 들며 우물쭈물 말했다.

“이건 아드리안 선배님께 드릴 도서부 신입 명부인데요…….”

그러고는 곧장 종이를 아드리안에게 내밀었다.

“야, 장난치지 마.”

아드리안이 팔꿈치로 필릭스를 한 번 쿡 찌른 뒤, 종이를 받아들었다.

“미안해, 루시. 내가 학생회 일로 바빠서 너한테 큰 짐을 떠안겨 버린 꼴이 되고 말았네. 도서 부장은 난데.”

아드리안이 말하자, 루시라고 불린 여학생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에요! 2학년 부장은 저인걸요! 그리고 전 그다지 바쁘지도 않아요.”

“그래,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아드리안이 상냥한 말투로 대답했다. 시종일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던 루시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필릭스는 놀란 눈빛으로 지켜보며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이름표를 달고 있거나, 이름이 써진 책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학생은 망설임 없이 그를 아드리안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한눈에 그들 쌍둥이를 구별해 낸 것이다.

명부를 전달한 루시는 선배들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쟤 이름이 정확히 뭐라고?”

그녀가 사라진 모퉁이를 바라보며 필릭스가 물었다. 그러자 알렉이 그를 향해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뭐야, 필릭스! 관심이라도 있어?”

아드리안도 난감한 표정으로 필릭스에게 핀잔을 주었다.

“야, 너 설마……. 그러지 마라. 루시는…….”

그러나 아드리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필릭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니다. 안 알려 줘도 돼. 그냥 별 뜻 없이 물어본 거야.”

필릭스는 저 애가 그저 감으로 찍어 맞추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뭐, 정말로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그게 아니면 어떻게 부모님도 구별 못 하는 우리를 한눈에 알아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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