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오직 사랑으로 인하여 (2)
현 상황은 황녀의 실종과 황태자의 기사 사이 연관이 있어 보일지라도, 황태자가 모든 일을 꾸몄다고 완벽히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베르나도가 명령을 내렸다는 명확한 증거나 증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족 시해라는 무거운 죄가 확정되려면, 그만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좌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또 황태자가 무고하다고는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베르나도가 제 기사를 시켜 렉산드라를 따라붙게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황태자의 기사들이 황녀를 미행만 했는지 혹은 위협도 했는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미 신빙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의 가장 큰 문제는 베르나도의 목숨줄이 이 애매한 기로에 있다는 점이었다.
황제와 황후에게는 지금 당장 저울의 무게추를 황태자를 구명하는 쪽으로 기울일 방법이 없었다.
그런 반면, 황녀를 위시한 무리는 달랐다.
그들은 이미 황태자의 기사만이 하사받는 검을 빼돌렸다.
게다가 그 기사가 누군가에 의해 실종된 것처럼 꾸미기까지 했다.
즉, 황제조차도 황녀와 황비 측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져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황태자가 황녀의 살해를 사주했다는 또 다른 증인이나 증거가 나오면 정말이지 끝장이었다.
아르셀리나 후작가나 빈켄티우스 대공가에는 가짜 증인이나 증거를 만들 힘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되도록 여기서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괜히 더한 말이 나오기 전에, 한시라도 빠르게.
“황태자가 명확하게 황녀를 해치려고 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혐의 또한 완벽히 부정할 수 없는 바.”
그리하여 황제가 선언했다.
“황태자는 지금 당장 비바레타 영지로 가거라. 가서 3년간 황실 별장 반경 500m 밖으로 벗어나지 말 것을 명한다.”
어차피 제 동생을 죽이려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베르나도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모든 일에 대하여 몸을 사려야 할 터였다.
그가 어떤 범죄에 조금만 연관되어도, 혈육도 살해하려던 자가 뭘 못 하겠냐는 말이 돌 테니까.
그러느니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유배 갔다가 오는 게 나았다.
“폐하…!!! 제게 어찌 이러십니까!”
베르나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비바레타 영지는 북부에서도 최북단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1년의 4분의 3은 눈이 내리는 혹한의 지역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북부는 빈켄티우스의 영토인 만큼, 황실의 별장이라고 할지라도 황실보다 발레리안의 손이 더 크게 미치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니 황태자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단호하게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당장 짐을 꾸리고 황태자를 마차에 태우거라.”
황제가 황태자를 북부의 영지로 보내는 것은 발레리안의 눈치를 본 행동이기도 했다.
3년간, 지지든 볶든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가 결합한 이상 황태자가 그들과 계속해서 반목하는 것은 황실의 크나큰 손해였다.
그러니 황제는 이 기회에 베르나도에 대한 발레리안의 앙금을 풀어 주고자 했다.
황제는 이 정도면 솔직히 값싼 대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황태자를 얼어 죽게 했다는 오명을 쓸 작정이 아니고서야, 빈켄티우스도 베르나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수도도 아니고 황실의 손이 크게 미치는 곳도 아니니 베르나도도 고생은 할 터였다.
그러나 황제는 오히려 이 기회에 황태자가 고생으로 철이 들길 바랐다.
게다가 3년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 않은가.
황제는 3년이면 황태자가 수도로 돌아와 금방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베르나도의 능력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황제는 자신이 그간 황태자를 위해 해 준 것들이 그리 쉬이 흐지부지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따졌을 때, 앞으로 내내 도덕적 결함이 될 소문을 달고 사는 것보다야, 잠시 유배를 다녀오는 것이 베르나도의 앞날에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어머니…! 폐하를 말려 주십시오. 제가 어찌 그곳에 가서 산단 말입니까…!”
황태자가 황후의 앞으로 달려가 매달렸다.
그러자 황후가 제 아들을 외면하며 말했다.
“황태자, 폐하의 판결을 받아들이세요.”
“어머니…!”
전에 없던 황후의 냉정한 말에 황태자가 충격받아 뒤로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모로 고정하고 있었다.
황후는 황비가 두려웠다.
평생을 눈치 하나로 버텨 온 황후였다.
그리하여 사교계에서 살아남았고, 황제의 사랑도 여전히 받고 있었다.
그런 황후였기에, 본색을 드러낸 황비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황비가 제 아들의 목을 죄어 오는 상황에, 황제가 내려 준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황후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가시지요, 황태자 전하.”
기사들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황태자를 데리고 가려 했다.
“감히 내 몸에 손대지 마라…!”
황태자가 순간 광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유배 가는 지경이라고 할지라도, 베르나도는 여전히 황태자였다.
그렇기에 잠시 기사들이 멈칫한 사이, 황태자가 어느덧 발레리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있었다.
“황태자!!!”
황제가 순간 노하여 황좌의 손잡이를 쾅 내리쳤다.
베르나도가 치미는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기어코 발레리안의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이게 모두 다 너 때문이다…! 너만 없었어도!”
저를 두고 경악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베르나도는 이미 눈이 돌아가서 보이는 게 없어 보였다.
일전에, 자신이 아니라 황녀를 황위에 올릴 수도 있다고 했던 발레리안의 말이 베르나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게다가 황녀를 구했다며 저를 음해하는 증언까지 했다.
그로 인해 황태자는 이 일이 전부 발레리안이 꾸며 낸, 그의 탓으로 일어난 일처럼 여겨졌다.
베르나도는 이성을 잃었고 황후는 사색이 되었다.
황비는 그 모습을 보며 한심함에 혀를 찼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황태자에게 일부러 멱살을 잡혀 준 발레리안이 고개를 숙여 베르나도의 귀에 속닥거렸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발레리안의 도발에 베르나도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쿵!
그 순간, 황태자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그 위를 나뒹굴었다.
발레리안이 그 치켜든 팔을 잡아 꺾어 황태자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황태자 전하께서 폭력을 행사하시길래 방어를 하려다가 그만.”
발레리안이 두 손을 얼굴 양옆으로 들어 올리며 능청스레 말했다.
누가 봐도 과잉 방어였다.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황태자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이… 이!”
내동댕이쳐진 충격으로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황태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본 황제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빠르게 외쳤다.
“황태자를 내보내라! 지금 당장!”
“이거 놔! 놓으란 말이다!!!”
황태자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억센 기사들이 여럿 달라붙어 베르나도를 끌어내는 탓에, 그는 결국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정말이지, 마지막까지도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퇴장이었다.
***
수도에 있는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 황태자의 유배 소식이 전해졌다.
황녀와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아테니아가 시녀에게 전해 들은 소식을 황녀에게 말해 주었다.
“모두 황녀 전하의 뜻대로 되었군요.”
황녀 측에서 처음부터 노린 것은 황태자의 목이 아니라 유배였다.
어차피 베르나도의 목이 잘릴 만큼의 죄를 입증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라면 못 할 것도 없었으나 그렇게 될 경우, 황제 또한 사활을 걸고 막았을 터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황녀가 자백서를 쓴 기사를 실종 처리한 후 새 신분과 돈을 주고 저 먼 나라로 보낸 것이었다.
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기사를 죽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지 못하도록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황제에게 붙잡혀 추궁당하도록 둘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빈켄티우스는 그렇게까지 황위 싸움에 진심으로 끼어들 생각 따위 없었다.
오늘날 황태자를 저 멀리 눈 밖으로 치워 버린 정도.
빈켄티우스는 딱 그 정도에 흡족했다.
그러니 만약 황제가 사활을 건다면, 아르셀리나 후작가 또한 사활을 걸었어야만 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황실이든 후작가든 피차 손해가 막심했다.
차기 황위를 노리는 렉산드라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란 의미였다.
그러니까 황녀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나머지는 스스로 이루어 내면 되니까.
“이번 일에 주신 도움, 잊지 않겠습니다.”
황녀가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황녀 전하.”
이민족과의 교류 허가.
그 조건을 잊지 말란 소리였다.
무엇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법 없는 아테니아의 모습에 렉산드라가 한숨 쉬듯 웃고 말았다.
하여간, 빈켄티우스 대공 부부는 누구 하나 쉽지가 않았다.
“그럼요. 앞으로도 제가 잘 부탁드려야 할 것을요.”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렉산드라는 결코 제 오라비와 같이 빈켄티우스와 반목하여 어리석은 결말을 맞을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저 멀리 대문 밖으로 마차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일을 끝낸 발레리안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