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오직 사랑으로 인하여 (1)
빈켄티우스와 아르셀리나 후작가를 대두로 여러 귀족 가문들이 뭉쳐 진행한 일이었다.
황태자의 심문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다음 날에 잡혔다.
“폐하, 추국장을 여시다니요!!!”
그 소식을 들은 황후가 황제에게로 달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어찌 황태자에게….”
하지만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황제는 황후의 투정에 더는 참지 못했다.
“그럼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놀란 황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동안 베르나도 그놈이 터트린 사고가 얼마나 잦았는지 아시오?”
황제가 그간 쌓인 답답함을 더는 참지 않고 터트렸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소. 베르나도가 쓸데없이 빈켄티우스 대공과 반목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번 일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 거란 말이오!”
황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아들에게 화가 솟구쳤다.
도대체가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괜히 덤벼들어서는 이런 분란이 일어나게 만든단 말인가!
골치가 아파 왔다.
솔직히, 아르셀리나만을 상대하는 거였다면 황제가 이토록 피곤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 일에는 빈켄티우스까지 관여되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황제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사태를 넘어섰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베르나도에게 아무 혐의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뿐인 줄 아시오? 황녀가 떠나던 날, 베르나도가 제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을 움직였소. 오늘 자백을 한 기사 외에도 황녀를 뒤쫓던 기사들이 있었지.”
반파된 황녀의 마차에서 황태자의 기사단이 지니는 검이 발견되었을 때, 황제도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조사를 하다가, 황제도 알게 되었다.
황녀가 북부로 향하던 날, 황태자가 제 허락도 없이 멋대로 기사단을 움직였음을.
“그… 그 아이가, 황녀를 해치려고 했을 리 없습니다!”
황후가 당황하여 외쳤다.
그러나 황제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황태자가 기사들을 황녀에게 붙인 이유가 아니오. 하필 황녀가 실종되었던 날, 황태자가 그런 행동을 한 것 자체가 문제지.”
황녀가 실종되었다.
무려 황족의 실종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흐지부지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반드시 범인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황녀가 스스로 자작극을 벌인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황후가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반박했다.
“그렇다면 황녀가 왜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이오?”
물론, 황제도 황녀가 스스로 벌인 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왜냐하면, 베르나도는 일을 꾸밀지언정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만한 담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제 아들을 잘 알았다.
그러나 황녀가 일을 꾸몄다고 하기에는 물증은커녕 심증도 없었다.
“황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권력에 욕심을 낸 적이 없소. 심지어, 황태자가 벌여 놓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황실을 위해 자신이 수습하겠다고 나선 상황에 실종이 벌어졌단 말이오.”
황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태만 두고 봐도 알 수 있었다.
렉산드라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하여 줄곧 스스로를 죽여 왔다.
베르나도가 딸이 가진 신중함의 절반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이렇게 몰리지는 않았으리라.
“그에 반해 베르나도의 이미지는 어떠하냔 말이야. 파고들면, 그 녀석이 제 기사들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귀족들이 못 알아낼 것 같소?”
황제는 아르셀리나 후작가에서 베르나도가 벌인 짓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것을 빌미로 일을 벌인 것일 터였다.
황태자의 잘못으로, 황녀에게 어쩌다가 원치 않게 주목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것을 참지 못한 황태자가 황녀를 시기하여 기사를 몰래 보냈다더라.
그 기사들을 왜 보냈을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황태자와 황녀의 실종 사건을 연관 짓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황제의 말에 황후의 안색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들어도, 제 아들을 구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란 이미지를 팔아먹어 누가 더 지지를 얻냐였다.
베르나도는 그 싸움에서 스스로 자격을 내던져 버린 셈이었다.
황태자의 이미지가 워낙 엉망이기에, 아무리 읍소해도 정황만으로도 아무도 그의 결백을 믿지 않으리라.
그런데 증거까지 있었다.
결말이 황후의 눈에도 빤히 보였다.
“폐하…, 폐하. 저희 아들을 구해 주십시오. 제발.”
황후가 황제의 다리에 매달려 눈물지었다.
황태자라고 할지라도 황족을 시해하는 것은 크나큰 죄였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나도를 구할 것은 결국 황제뿐이었다.
황제는 그간 황비의 가문을 견제해 주었으나, 동시에 황후의 가문이 외척으로서 세력을 키우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황제의 힘으로 황후가 되었다.
그 탓에, 처음부터 황후에게는 황제의 뜻에 반목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만약 황제가 돌아선다면, 황후는 그 순간부터 쭉 자신 홀로 힘을 키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황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황비와 결혼을 한 의미가 뭐겠는가.
황후가 홀로 지나치게 내궁의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 수를 둔 것이다.
그래서 황후는 내내 친정의 힘을 키울 수도 없었다.
그 탓에 지금, 베르나도를 구명하기 위해 매달릴 상대는 황제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다시 올 수 있으니.”
황제가 황후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황제의 얼굴에 눈물짓는 제 아내를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렇듯, 여전히 황후를 꾸준히 사랑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권력을 제외하고 사랑만을 주었다.
“나는 아직 건강하고, 황위를 물려주려면 한참이나 남았소. 그사이에 베르나도가 복권하면 될 일이오.”
“예…, 폐하. 저는 폐하만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후는 황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사랑에 의해 황후가 되었으므로.
***
다음 날, 베르나도의 심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정황이 완벽했고 그에 따른 증거들도 존재했다.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로 황녀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원형의 테이블 한가운데, 베르나도가 서 있었다.
그는 추국장의 중앙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읍소했다.
“이것은 누명입니다! 누군가가….”
“황태자 전하의 기사들만이 하사받는 검이 황녀 전하의 실종 현장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제는 황태자 전하의 기사가 자백서를 써 둔 뒤에 실종되었죠.”
“그 기사가 자백하지 못하도록 누군가 손을 쓴 게 아닙니까?”
아르셀리나 후작을 필두로, 두 명의 귀족이 더 말을 보탰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황녀 실종 사건의 범인이 황태자임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안단 말이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어찌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란 말인가!”
황태자가 답답해하며 소리쳤다.
당연하게도 한 일을 증명하기보다,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하기가 훨씬 더 힘들었다.
“그렇다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녀 전하께서 북부로 떠나시던 날, 왜 미행을 붙이셨습니까.”
하지만 아르셀리나 후작이 황태자에게 그가 한 일에 관하여 묻는 순간, 황태자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관하여 증명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무슨 의도로 황태자가 제 기사들을 몰래 움직였나.
모두의 시선이 베르나도에게 그것을 묻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증명을 해내지 않으면, 몰래 기사들을 움직인 그 의도까지 합쳐져 곡해받게 될 터였다.
후작은 황제의 예상대로, 황태자가 자신의 기사단을 움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황녀를 훼방 놓는 일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제 기사들을 시키려 했던 게,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었다.
하긴, 황태자가 사람을 사서 했더라도, 결국 후작가에 들켰을 테지만.
“황녀를 보호하기 위해….”
“황녀 전하께는 황실에서 붙여 준 기사들이 이미 있지 않았습니까.”
황태자가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발레리안이 그것을 단번에 차단해 버렸다.
“대체 황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네 기사들을 몰래 따라가게 했더냐.”
황비가 황태자를 몰아붙이듯 추궁했다.
“그것은 그저….”
황태자가 우물쭈물 말을 늘어놓지 못했다.
아무리 베르나도라도 황녀가 혹시라도 일을 잘 해결하여 귀족들 사이 명성이 높아질까 봐, 그것을 훼방 놓으려 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것도 그가 저지른 일을 렉산드라가 해결하려고 했던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그에 대하여 발언하는 순간, 황태자의 이미지는 진창에 빠져 짓밟힐 터였다.
그리하여 베르나도는 망설이는 수밖에 없었다.
“되었다, 황태자의 심문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그때, 황제가 황태자의 발언권을 빼앗았다.
어차피 어젯밤, 황비를 통해 아르셀리나 후작과 발레리안을 만나 황태자의 처분을 어떻게 할지 이미 결정해 놓은 터였다.
황후조차도 황태자의 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황태자만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황제는 더는 그 이야기를 듣지 않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