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나를 사랑하지 않는 (3)
황태자의 기사가 실종되었다.
그런데 그 사라진 기사의 방에서, 자신이 황태자의 명령을 받아 황녀를 해하려 했다는 자백서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황궁의 알현실은 아침부터 시끌벅적해졌다.
“폐하! 황태자 전하를 심문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아르셀리나 후작이 황제를 향해 외쳤다.
“폐하, 사건의 진위를 파헤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아르셀리나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황제가 서늘한 표정으로 역정을 냈다.
“아르셀리나 후작,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황제는 지금, 황비가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분명 조용히 해결한다고 그에게 약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르셀리나 후작이 모아 온 사람들의 수를 보라.
이것은 절대 조용히 넘어가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폐하, 사라진 기사의 방에서 자백이 적힌 편지가 발견된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나 아르셀리나 후작은 황제와 비견되게 매우 침착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황제와 달리, 아르셀리나 후작은 황비와 마찬가지로 이 순간만을 오래도록 기다려 온 사람이었다.
황제가 치는 호통 따위, 후작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황족의 실종 사건입니다. 이렇게 명백한 증좌가 나왔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르셀리나 후작이 황제의 앞에 자백서를 내밀었다.
황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순간, 황제의 안에서 황비에 대한 배신감이 들끓었다.
저딴 게 발견될 줄 알았다면, 아르셀리나 후작가의 기사들에게 조사를 맡기는 게 아니었다.
사건 조사를 위하여 후작가의 기사 중 일부를 황궁에 드나들도록 허락해 준 것이 황제였다.
황비가 증거를 발견하면 황제에게 먼저 가져오겠노라고 철석같이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이 쉽게 믿은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무려 20여년이었다.
그 20여년의 세월 동안 살을 맞대고 살면서 황비는 황제에게 원망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솔직히 황제도 이쯤 되니, 황비가 가진 과거의 원망도 퇴색되었으리라 생각 들었다.
그리고 그 착각이 오늘날의 일을 만들었다.
황제가 속으로 침음했다.
황비가 숨죽여 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러다 보니 방심했다.
황제로서 황비를 견제해 온 세월이 얼마였던 간에, 그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황제 폐하, 황비 전하께서 알현을 요청하십니다!”
그때,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문을 노려보았다.
황비가 지금 알현실에 들어와서 그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방문을 막아 봤자, 아르셀리나 후작을 위시한 무리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을 터였다.
“황비를 들라 하라.”
황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황비가 특유의 우아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차림새는 평소와 달랐다.
지금까지는 황실에서 측정되는 내탕금에 한해서, 부족해 보이지 않고 고상함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물품들만을 사용하던 황비였다.
그것은 황후의 가문이 따로 황후가 운용할 자금을 챙겨 줄 수 없는 미력한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황비가 황후의 수준에 맞춰 준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황비가 입은 드레스는 평소의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것은 아니었지만, 드레스는 샹들리에의 불빛에 비출 때마다 은은하게 반짝이며 광택이 돌았다.
제국에서 항해를 통해 왔다 갔다 하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린다는 먼 대륙의 장인들이 짜 낸다는 그 천으로 만들었음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이번에 새로 선보인 패턴의 레이스가 겹겹이 드레스 치맛자락을 두르고 있었다.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법한 드레스였다.
반대로, 이 드레스의 천이나 레이스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면 수수해 보일 법도 했다.
이런 게 본디 황비의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녀는 특별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온, 아르셀리나 후작가의 딸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황비가 본디 제가 즐겨 입던 차림을 한 의도는 선명했다.
현재, 20여년째 수도의 유행은 천과 레이스 등의 고급화보다 드레스를 장식하는 방식에 있었다.
그것은 황후가 그것을 원했고, 황비가 그에 장단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황비의 뜻은 그 거짓된 장단을 이제는 모두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비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가볍게 굽혀 인사했다.
황제와 그녀의 시선이 서늘하게 맞부딪혔다.
황비가 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황녀가 실종된 사건 현장에서 발견했던 기사의 검이었다.
“폐하, 방금 이 검이 자백서를 적은 기사의 것임을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황비가 가지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황태자의 기사들이 하사받는 검은 칼날에 해당 기사의 일련번호와 특수한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일련번호와 문양은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서고에 있는 책 혹은 해당 기사를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황비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정식으로 요청드립니다, 폐하.”
황비가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며 말했다.
“황태자와 그 수족들을 심문하소서.”
“그 기사가 독단으로 일을 벌였거나, 거짓을 말한다는 가능성도 지울 수 없지 않소.”
황제가 다급하게 대꾸했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미래의 국본을 심문할 수는….”
황제는 어떻게든 황태자를 심문하는 일을 막아야만 했다.
황태자가 여러 차례 벌인 일로 인해, 이미 현재 귀족들 사이에서 황태자의 평은 가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제 이복동생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게 된다?
황태자의 정치적 생명은 한동안 재기 불능이 될 터였다.
하지만 황제의 말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황제 폐하,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알현을 요청하십니다!”
시종이 또다시 문밖에서 말을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부에 있어야 할 빈켄티우스 대공이 왜 갑자기 이곳에 등장한단 말인가.
좋지 않은 예감이 황제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당황한 것은 단언컨대 황제뿐이었다.
황비와 아르셀리나 후작은 이미 황녀가 빈켄티우스와 한 거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미 사람들이 와 있으니….”
이미 황제는 황비와 아르셀리나 후작 무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발레리안의 알현을 거부하려고 했다.
“폐하, 황녀 전하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문밖에서 전해 온 발레리안의 말에 황제는 그조차 할 수 없어졌다.
이미 황비와 아르셀리나 후작 무리의 시선은 문으로 향해 있었다.
“……들라 하라.”
결국, 황제는 이번에도 알현 요청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게.”
발레리안이 가볍게 목례 하자, 황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등장한 게 발레리안이었다.
황제도 허투루 그간 제국을 다스려 온 것은 아니었으니, 이쯤 되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황녀의 실종은 시작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그것도 황제를 제외한 이 자리의 모두가 공모자였다.
“…빈켄티우스 대공, 그대가 황녀의 서신을 가져왔다고.”
황제가 잔뜩 기운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덫에 완벽히 걸려들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런들 이미 이들의 책략에 넘어갔으니 황제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예, 여기 이것입니다.”
발레리안이 황제의 시종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황제가 시종에게서 그것을 받아 들어 펼쳤다.
거기에는 황녀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황제가 서신을 확인하는 동안, 발레리안이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수도와 북부의 경계를 넘은 후, 소식이 끊기셔서 슬리피아 숲으로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슬리피아 숲은 수도와 북부의 경계를 조금 지난 초입에 있었다.
북부의 전역이 빈켄티우스의 것이었으니, 수도에서 북부로 통행을 하게 되면 발레리안도 알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곳에서 습격당한 황녀 전하를 발견하고 지금껏 보호해 온 것이고요.”
정말이지, 완벽한 정황 설명이었다.
하긴, 황녀가 북부로 가는 일부터 짜 맞췄을 테니 빈틈이 있을 리 없었다.
황제의 눈에도 이 상황에서 황태자를 구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황녀를 일찍이 발견했다면, 왜 곧바로 알리지 않았는가.”
“황녀 전하께서 황궁으로 돌아오기를 두려워하셨습니다. 황녀 전하의 이동 경로를 아는 것은 황실 사람들뿐이었는데, 공격을 당했으니까요.”
황제의 이어지는 질문에도 발레리안의 대답은 매끄러웠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가리키고 있는 사건의 주범은 하나였다.
결국, 황제가 한참의 침묵 끝에 다시 말을 꺼냈다.
“…추국장을 열라. 내 직접 황태자를 심문할 것이다.”
황제를 제외한, 이 자리의 모두가 기다리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