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107화 (107/111)

107. 나를 사랑하지 않는 (2)

“테나, 저는…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결심하고 왔음에도, 발레리안의 목소리는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쩌면 아이가 저를 닮아서, 그리하여 제가 아이를 사랑하지 못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발레리안의 말에 아테니아는 슬퍼졌다.

그의 말이 의외이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휘어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그녀에게 드러냈던 상처를 기억한다면, 지금의 말이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제가 태어났는데… 하필, 몸이 약했어요.’

하필.

그 단어에서 발레리안이 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얼마나 커다란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의 할아버지는 몸이 약한 아이를 매번 모자란다며 깎아내리고, 엄마를 잃어 충격적일 아이에게 아비는 네 탓이라 책임 전가를 했다.

아이가 스스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것이 여전히 발레리안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것이었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테나. 저는 괜찮아요.’

발레리안의 탓이 아니라는 아테니아의 말에 그는 알고 있다고 했다.

괜찮다고도 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키워 왔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난 미움이 한 순간에 뿌리째 뽑힐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알고 있다고 해도 괜찮아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제가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서, 그 아이가 저 때문에 불행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발레리안이 차마 아테니아를 마주 보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물질적인 풍요만이 아이를 책임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미숙하고, 때로는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잘못도 한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아이를 답답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당연한 것을 아이에게는 설명할 수 있는 인내심이 부모에게는 필요했다.

그 지지부진한 상황은 아마 있던 사랑도 닳게 만들지도 몰랐다.

실제로, 많은 연인 사이가 서로를 이해시키기를 포기하면서 그 끝에 도달하지 않던가.

그러나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끝이란 존재해서는 안 됐다.

아이가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아이의 가장 큰 세상은 부모였다.

부모가 제멋대로 끝을 선언하면, 아이의 세상에는 종말이 찾아온다.

발레리안은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부모의 사랑이 모두 저를 떠나간 순간, 그의 세계는 메말랐다.

발레리안은 늘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렸다.

그의 마음은 아테니아를 만나기 전까지, 그런 고통밖에 줄 게 없는 황무지였다.

발레리안은 이런 고통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에게 사랑을 줄지 말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 있든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테나. 저는… 그런 저 때문에 당신이 불행하거나 제게 실망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아테니아는 발레리안과 함께라면 기꺼이 불행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사랑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원했으니까.

“리안, 당신은… 선대 전하를 많이 사랑했군요.”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테니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건 발레리안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서 들으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선대 전하께서 당신에게 등 돌렸던 그 날이… 여전히 지독히도 아픈 거예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두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발레리안의 두 눈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당장 아테니아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확답해 줄 수 있는 것도 분명 있었다.

아테니아는 선대 대공처럼 발레리안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에요.”

그러니 당신은 또다시 너무나 사랑했던 이로 하여금 상실을 겪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불행해진다고 해도, 그것은 내 선택에 의한 것이고… 또 당신에게 실망한다고 해도,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아테니아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나는 평생에 걸쳐 증명할 자신이 있어요.”

그것은 평생 발레리안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저는 아버지와 절연해서 돌아갈 가문도 없잖아요?”

아테니아가 조금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이 우습게도 무엇보다 발레리안을 안심시켰다.

그녀는 크리스나 가문과 연을 끊었고, 그의 곁을 선택했다.

발레리안에게로 오는 순간, 아테니아는 최후의 보루를 남겨 두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새삼스레 인지했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두고 어리석다고 할지도 몰랐다.

이미 한 번 클라이브 칼스이턴에게 모든 것을 걸었기에, 모든 것을 잃을 뻔했던 아테니아가 아니던가.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그녀는 자신만의 것들을 충분히 챙길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테니아는 자신과 발레리안, 또는 자신과 빈켄티우스를 분리하려 들지 않았다.

발레리안과 결혼한 후부터 그녀는 온전한 빈켄티우스가 되어, 그와 빈켄티우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테니아는 이미 발레리안에게 증명하고 있던 셈이었다.

자신이 발레리안을 믿고 있으며, 영원토록 그의 곁에 머무르리란 것을.

발레리안은 클라이브가 아니고, 자신의 그런 사랑을 충만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으니까.

문득, 그것을 깨닫자마자 발레리안의 뺨을 타고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발레리안의 눈앞에 자신을 원망하며 뒤돌던 아버지의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 그는 그제야 인정했다.

그 등이… 여태껏 지나치게 아팠음을.

어머니만큼이나 아버지를 사랑했다.

‘사랑한다, 우리 아들.’

유약했지만 다정했던, 그리하여… 늘 어린 아들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속삭여 주던 아버지를.

그렇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가 등을 돌린 것보다, 원망하던 아버지가 등을 돌린 것이 덜 아프니까.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까지.

어린 발레리안이 겪은 상실은 너무나 컸다.

그는 그 상실이 주는 고통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늘 벌벌 떨었던 것이었다.

지독한 상실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채워 온 사랑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갈까 봐.

그렇게 아테니아를 잃고 나면 정말로 그 상실을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아….”

발레리안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그가 심장 위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의 드레스가 눈물로 젖어 갔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슬픔.

어린 날의 그 슬픔을, 발레리안은 이제야 토해 냈다.

그는 한참을 울고 울었다.

아테니아는 내내 그런 발레리안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자신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발레리안이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아테니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리안, 당신이… 당신을 닮았다는 이유로 아이를 사랑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면.”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

“그러면 당신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그만큼 리안을 더 사랑할게요.”

그 말은 즉, 발레리안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말이었다.

아테니아는 기꺼이 또다시, 그를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리안도… 이것만 알아 줘요. 당신은, 내가 충분히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발레리안이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 당신이 사랑스럽다.

눈물이 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아테니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에서는 눈물의 맛이 났다.

***

그 후, 평화로운 나날이 며칠간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셀리나 후작가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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