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106화 (106/111)

106. 나를 사랑하지 않는 (1)

선대 대공이 물리적으로 멀어지면, 그래서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않게 되면 제 마음이 편해질까?

그간은 발레리안에게 그런 것을 생각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선대 대공이 늘 발레리안의 저 멀리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발레리안도 선대 대공을 되도록 잊고 살았다.

그게 자신의 평온을 위해서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선대 대공과 마주해 보니,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발레리안은 선대 대공에 관한 문제에 한하여, 한시도 평온한 적이 없었다.

발레리안은 늘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폭탄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 때도 그러셨죠. 선선대를 막기는커녕, 어머니의 희생을 발판 삼아서 당신의 평온을 취하셨어요.”

발레리안에게 아버지란 늘 그런 사람이었다.

상황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 멀리 물러나 버리는 사람.

그건 도망이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제 아버지가 싫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 발레리안은 깨달았다.

자신도 더는 제 안의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는 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건 네 오해다, 발레리안…! 나도, 나도…, 아버지께서 그러시는 걸 보며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어.”

“그랬다면 맞서 싸우셨어야죠! 할아버지와 부딪히는 게 싫어서 비겁하게 어머니한테 미안하다, 조금만 참아 달라, 그따위의 말을 할 게 아니라!”

그래서 발레리안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속내를 터트렸다.

“어머니를 데리고 할아버지의 영향권을 벗어나 살 자신도 없고, 할아버지에게 맞서서 그 패악을 막을 자신도 없고, 당신께서 하신 일은 어머니의 고통을 방관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발레리안은 말이 제 안에서 흘러나갈수록, 자신이 늘 이런 원망을 뱉어 내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이제 다 컸으니, 당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보여 주고 싶었던 그 마음은 오기였던 것이다.

그 오기로 선대 대공의 존재를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겨 왔지만… 그러니 응어리가 풀릴 턱이 없었다.

선대 대공의 입이 다물렸다.

발레리안의 말은 하나같이 선대 대공의 정곡을 찔렀다.

그래, 선대 대공이 고작 마음이 편치 않을 동안 그의 아내는 속부터 썩어들어 갔다.

발레리안의 말은 하나도 옳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는 비겁하기 그지없었고, 최악의 남편이었어.”

결국, 선대 대공은 그 말을 인정했다.

선대 대공이 죄인처럼 들지 못하던 고개를 들어, 제 아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쩌면 이 순간이 앞으로 아들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악의 아버지지.”

그래서 선대 대공은 마침내 발레리안에게 늘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네 어머니가 죽은 건 네 탓이 아니다, 발레리안. 어린 네게… 말도 되지 않는 원망을 토해 냈어.”

발레리안이 제 말을 듣고 싶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들을 위하여 한 번쯤은 해야 했던 말이었다.

“미안하다, 리안. 나를 용서하지 마렴.”

그리고 그 순간, 발레리안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네가, 건강하게만 태어났어도….’

선대 대공이 제게 했던 원망의 말이 발레리안의 머릿속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발레리안도 알았다.

아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절대 그 아이의 탓이 아니란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여전히 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건강하여 처음부터 선선대 대공이 원하는 빈켄티우스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더라면.

자신이 당시에 조금 더 나이가 있어, 어머니의 방패가 되어 줄 수 있었더라면.

그 생각들은 너무 오랜 기간 발레리안을 괴롭혀 왔고, 그 누구도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참의 침묵 끝에, 발레리안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감히, 내게 사과를 합니까.”

자신이 겪은 모든 일에 대하여, 발레리안은 제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도 편해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선대 대공이 제게 사과하여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에게 용서를 빌 자격 따위 없어요.”

“…안다, 알고 있어.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 사과 받아 줄지 말지 또한 네 몫이지. 다만… 넌 내게 사과 들어야만 해. 그건 네 권리다.”

사과와 용서는 별개의 일이었다.

선대 대공은 적어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대 대공이 그럴수록, 발레리안은 점차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발레리안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가, 떠나고자 한 것은… 내 존재가 자꾸만 네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발레리안이 말이 없자, 선대 대공이 말을 이었다.

자신이 또 도망가는 것 같아 아들을 분노하게 했다면, 최소한 그에 대하여 설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네가 결혼을 거부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나와 아버지 탓일 테니까.”

제 아들은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

선대 대공은 그 행복을 더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만 네 인생에서 빠져 준다면, 더는 네 행복을 방해할 게 뭐가 있겠니.”

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을 설득하듯이 말했다.

“이 성에, 너와 네 아내 그리고 너희가 낳은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 찬다면 너도….”

쾅!

그 순간, 발레리안이 책상을 내리쳤다.

“저도 뭐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요?”

발레리안이 순간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기나 하십니까?”

감히, 당신이 내 행복을 논하는가.

발레리안의 안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혹시나 그 아이가 테나를 닮지 않고, 선선대나 당신… 혹은 나를 닮을까 봐. 그래서 사랑할 수 없을까 봐!”

발레리안이 화를 참지 못하고 감정이 들끓는 눈으로 제 아버지를 노려봤다.

유년기에 빼앗겨 버린 것은 뒤늦게 어쩐다 한들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제 와서, 자신만 사라지면 마치 모든 것을 쉬이 돌릴 수 있을 것처럼 구는 아버지의 태도가 발레리안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그게 당신 말대로, 고작 당신 하나 사라진다고 해결될 쉬운 문제로 보이십니까?”

선대 대공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제 아이는 스스로를 저만큼이나 미워하고 있구나.

그것을 확인한 마음이 무너졌다.

선대 대공은 그제야, 아버지로서 제가 지은 업보를 제대로 마주했다.

“나는 당신 같은 아버지가 되기 싫습니다.”

선대 대공의 안색이 어떻든 간에, 발레리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이를 제대로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무책임하게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그것은 비난이자 무엇보다 솔직한 발레리안의 속내였다.

“팔레르몬으로 떠나고 싶다면 떠나십시오.”

발레리안이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단, 그게 날 위한 거라는 같잖은 생색 따위 내지 마시란 말입니다.”

숨조차 못 쉴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아버지의 존재.

그것이 너무나 거슬려, 발레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집무실을 나와 버렸다.

***

도망.

선대 대공에게 그 단어를 꺼내면서, 발레리안이 깨달은 게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아테니아와의 문제에서 매번 자신은 당장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도망을 다녔으니까.

그래서 한참 정원에서 차가운 밤바람을 맞던 발레리안은 돌연 걸음을 돌려 아테니아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테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막 황녀와의 대화를 끝내고 쉬고 있던 아테니아는 그런 발레리안의 방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아이의 일로 말이 오간 이후,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어와요, 리안.”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찬 바람에 머리를 식힌 발레리안이 조금 멋쩍은 기색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저번에 제멋대로 그녀와의 대화에서 단절을 선언한 것은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맞아 주는 아테니아가 고마웠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마주 앉자마자, 뜸 들이지 않고 말을 꺼냈다.

“저번에… 아이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멋대로 그렇게 가 버려서 죄송했습니다, 테나.”

그로 인해 아테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레리안이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인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염치없으나… 아이를 가지는 일에 대하여,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런 아테니아를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한 발레리안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