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모든 것은 뜻대로 (5)
“그렇다면 아르셀리나의 기사들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십시오. 황후 폐하께서 절대 알지 못하시게 하겠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황비가 20여 년의 세월을 숨죽여 지냈어도, 황제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하긴, 본인이 잘못한 것이 많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그는 지금껏 내내 아르셀리나 가문을 감시하고 있었다.
한 번 규제를 풀어 주는 것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황제는 이 와중에도 아르셀리나 후작가가 이것을 기회로 하여 기사단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될까 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폐하, 정녕 딸을 죽이셔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시선을 내리깐 황비의 목소리에 기어코 원망이 깃들었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나, 충격을 참느라 드레스를 꽉 쥐어 새하얗게 질린 손은 그녀를 더욱 가녀려 보이게만 했다.
그제야 그런 황비의 모습이 황제의 두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제게 닿았음을 안 황비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와 렉산드라가 폐하를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
황비는 황제에게 허가받지 않고 몰래 아르셀리나 후작가의 기사들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먼저 황제를 찾아왔다.
그 점이 황비의 행동에 신뢰성을 더했다.
물론 진짜로 렉산드라가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황비는 절대로 황제 따위 먼저 찾지 않았을 테지만.
“…황비.”
어쨌든, 황비의 행동은 황제에게 먹혀들었다.
그가 직접 몸을 낮추어 그녀를 일으켰다.
황비의 두 손을 꼭 잡은 황제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물씬 묻어났다.
“그리하도록 하시오.”
결국,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가 비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황후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했으면서도, 결국 황비와의 사이에서 렉산드라를 낳았던 황제였다.
그런 그였으니, 이렇게 굴면 분명 약해지리라 예상한 터였다.
황비는 제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황제가 더없이 우스웠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그러나 황비는 제 속내를 숨기며 황제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인내해 온 세월이 무려 20여 년이었다.
고작 이 순간을 참는 것쯤, 그 긴 세월에 비하면 한없이 쉬운 일이었다.
“황태자의 일은….”
말을 꺼내고 나니, 또 돌연 황태자의 일이 걱정된 듯 황제가 뒤늦게 운을 뗐다.
그러자 황비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황녀의 실종에 황태자가 관여되어 있다면… 가장 먼저 폐하께 고하겠습니다.”
황제가 20여 년 전 황비에게 사랑을 약속했던 것처럼 아주 부질없는 말이었다.
***
어쨌든 황녀가 빈켄티우스를 찾아왔으니, 저녁 만찬이 예고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찬장에는 선선대 대공과 선대 대공 또한 자리했다.
“황녀 전하께서 이리 갑자기 저희 북부를 찾아 주실 줄은 몰랐군요.”
선선대 대공은 황녀의 방문이 매우 달가운 태도였다.
혈통주의자인 그는 사실 황태자보다 황녀를 더욱 좋아했다.
황후의 가문은 보잘것없었으나, 황비의 가문인 아르셀리나 후작가는 역사가 깊고 명예와 권세 또한 드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선대 대공의 시선이 분주하게 발레리안과 렉산드라 사이를 오가는 것을 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했다.
물론, 발레리안이 그간 선선대 대공에게 으름장을 놓은 덕에, 선선대 대공은 그런 자신의 속내를 바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선대 대공을 익히 겪어 온 바, 그렇지 않아도 반갑지 않은 이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있는 발레리안의 기분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득이하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선선대 전하.”
황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식사 자리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일찍이 눈치챈 터였다.
그러나 렉산드라는 굳이 자신의 그런 속내를 티 내지 않고 담담하게 선선대 대공에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든 되도록 속내를 감추고 평정을 가장할 것.
황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었다.
“오래 머무셔도 괜찮으니 편히….”
선선대 대공은 황녀가 대공성에 오래 머무르길 바라는 모양새였다.
그런 선선대 대공의 말을 끊은 것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아버지, 식사 자리에서 관심이 쏠리게 되면 황녀 전하께서도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선대 대공이 조용한 목소리로 선선대 대공에게 말했다.
“흠, 흠! 아니, 너는 내가 얼마나 말을 했다고….”
갑작스러운 선대 대공의 태도에 선선대 대공이 헛기침을 했다.
선선대 대공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의 앞에서 아비의 말을 끊냐고 소리치지는 못하는 듯했다.
“아무리 아버지께서 편하게 대해 주셔도, 젊은이들에게는 그들보다 한참 나이 높은 이들의 말이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선대 대공이 살살 선선대 대공을 달래듯이 말했다.
제 아버지가 폭발하지 않을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아주 잘 아는 행동이었다.
선선대 대공은 선대 대공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기는 듯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사실, 선선대 대공은 누군가가 자신을 어렵게 여기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황족들조차도 감히 빈켄티우스를 쉽게 대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우선 식사는 편하게 하시고, 후에 차를 마시며 자리를 갖는 게 어떨는지요.”
선선대 대공이 조금 넘어온 듯하자, 선대 대공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발레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왠지 화가 치밀었으나, 그것을 꾹 내리 참았다.
선대 대공이 왜 또 안 하던 짓을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쨌든, 선대 대공의 말에 화답하듯 황녀가 말을 꺼냈다.
“선선대 전하께 고견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저야말로 좋은 기회일 따름이지요.”
하긴, 황녀가 당장에 돌아갈 것도 아니었으니 급할 필요가 없었다.
“황녀 전하께서 그렇게 말한다면야….”
얼마든지 시간을 낼 듯한 황녀의 태도에 선선대 대공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만찬장의 분위기는 제법 평화로웠다.
발레리안도 그사이에 완전히 표정을 갈무리한 터였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발레리안의 시선은 종종 선대 대공을 향해 있었다.
***
만찬이 끝나고 황녀는 선선대 대공이 귀찮게 굴기 전에 아테니아가 데려갔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집무실로 돌아온 터였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발레리안, 들어가도 되겠느냐?”
선대 대공의 목소리였다.
발레리안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들어오십시오.”
발레리안이 대놓고 반기지 않는 분위기를 풍겼음에도 불구하고 선대 대공은 조심스러운 기색만 드러낼 뿐,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불유쾌한 감정이 드는 것은 발레리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라는 걸까.
선대 대공을 곱게 대하지 않을 때마다 발레리안의 속도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대 대공을 평범한 부자 사이처럼 대한다는 것은 발레리안에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마음이 발레리안은 정말이지 마뜩하지 않았다.
“바쁜 것 같으니 오랜 시간을 끌지 않으마.”
선대 대공은 마치 그런 발레리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대 대공과 길게 마주하고 있고 싶지 않았으므로, 발레리안은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함께 팔레르몬 영지로 내려갈까 한다.”
그 순간,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팔레르몬 영지는 북부의 광활한 영지 중, 빈켄티우스 영지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심지어 그곳은 주변 산세가 험하여 자주 외부로 나고 들기도 어려웠다.
한 마디로, 선대 대공의 말은 자체적으로 선선대 대공과 함께 유배 비슷한 것을 가겠다는 소리였다.
“이제 아버지도 나이가 드셨고, 쉬실 때가 되셨지.”
발레리안이 말이 없자, 선대 대공이 멋쩍음에 말을 덧붙였다.
팔레르몬 영지는 산세는 험하나, 산으로 둘러싸인 영지의 중심 부분에는 넓은 평야가 존재했다.
그 덕에 팔레르몬 사람들은 자급자족하여 먹고살 수 있었다.
게다가 외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으니, 팔레르몬 영지는 대체로 소박하고 조용했다.
사실, 휴양지로 생각한다면 팔레르몬 영지도 그다지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휴양지에 틀어박혀 휴식만을 취하기에는 선선대 대공은 너무나 정정했다.
당연히, 그보다 젊은 선대 대공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거기서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까?”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래.”
선대 대공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대 대공이 죽고 나면, 선대 대공은 홀로 그 영지에서 지나치게 긴 세월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도 선대 대공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어쩐지 발레리안의 속이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반사적으로 날 선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신께서는 또 도망가시는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