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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104화 (104/111)

104. 모든 것은 뜻대로 (4)

“만약 빈켄티우스에서 황녀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도와드린다면….”

황녀가 긴장한 기색으로 아테니아를 돌아봤다.

빈켄티우스에서 애초에 그냥 협조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셈이 빠른 상인이었고, 발레리안 또한 이득이라면 놓치지 않는 한 가문의 가주였으니까.

아무리 아르셀리나 후작가가 앞장선다고 해도, 어쨌든 빈켄티우스의 이름이 관여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렉산드라는 빈켄티우스에서 당연히 무언가를 요구하리라 예상했던 것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실 경우, 이민족들과의 교류를 공식적으로 허가해 주세요.”

“그건….”

아테니아의 말에 황녀가 멈칫했다.

이민족.

다른 말로, 제국의 많은 이들이 그들을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제국에서는 이민족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대단히 강했다.

그래서 제국은 이민족이 침입할 때마다, 그들을 토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협상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민족의 땅과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북부의 경우, 그들이 침입할 경우 매번 이민족들과 맞서야만 했다.

아테니아는 이것이 굉장히 큰 손해라고 생각했다.

이민족과 맞서기 위해 매번 들어가야 하는 군수품과 군사에 관련된 비용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나마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터였다.

아테니아가 알아본 결과, 이민족들의 침입은 주로 그들의 땅에서 곡식이 나지 않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민족들이 제국에 쳐들어와서 약탈해 가는 품목들만 해도 주로 곡식과 포목류였다.

즉, 그들은 땅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제국에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민족들의 땅은 황무지가 많아서 아무리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려고 해도 그 한계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제국은 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을 위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인구 밀도가 극도로 낮은 지역들이 발생하는 중이었다.

그런 곳에 이민족들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분명 큰 이득이 될 터였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생각은 아무리 북부라고 할지라도 쉽게 실행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빈켄티우스가 아무리 북부의 제왕이라지만, 이민족들은 엄연히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다.

나라와 나라 간의 교역은 황실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불가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이 기회에 이민족들과의 교류를 북부에서 가장 먼저 트고 싶었다.

아무리 상업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점차 그쪽으로 모인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식료품이란 절대 없어선 안 될 것이었다.

지금이야 다들 풍족한 시대이기에 사치품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지만, 결국 인구수가 어느 적정선을 넘어선 순간 식자재값은 폭등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테니아는 지금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물론, 저도 이민족들과 굳이 전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황녀는 이민족들을 야만족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보다 약자였고, 약자를 얕잡아 낮게 이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은 땅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 그 지역은 세율도 극도로 낮았다.

그 땅에서도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만하게 된다면, 황실에게는 분명 이득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별개로 렉산드라는 아테니아의 말에 곧바로 긍정을 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이민족을 극도로 꺼리는 제국민들은 많아요”

그렇지 않아도 렉산드라가 황제로 즉위한다면, 불만을 가질 세력들이 많을 터였다.

어쨌든, 현 황제는 베르나도가 태어난 이후로 오로지 그만을 황태자로 밀어 왔다.

렉산드라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세월이 쌓아 온 베르나도의 지지 기반을 단번에 무너트리는 것은 힘들다는 의미였다.

즉, 렉산드라를 지지하는 자들과 베르나도를 지지하던 자들 사이의 갈등은 예정된 셈이었다.

황녀가 즉위하게 되면 그 갈등을 해소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힘을 들여야 할 터였다.

제국 자체 풍조가 그러해서인지, 귀족 중에는 이민족을 낮잡아 보는 자들이 더욱 많았다.

그런 판국에 새로운 황제가 이민족과 교류하겠다고 하면, 렉산드라의 편을 들던 이들조차 반기를 들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렉산드라의 부담이 커진다.

황녀가 우려하는 점은 그것이었다.

“빈켄티우스 상단이 이민족과 교류하여 나는 이윤의 3%를 황실에 드리도록 하죠.”

빈켄티우스 상단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세금은 북부의 것이었다.

즉, 빈켄티우스 상단이 이민족과 교류하여 이윤을 얻는다고 해도 황실은 크게 이득 볼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말대로라면, 황실도 여기서 얻을 것이 생기는 셈이었다.

“그리고 5%는… 황녀 전하께서 현재 운용하고 계신 복지 재단에 익명으로 하여 매년 기부금을 내도록 하죠.”

이것은 즉, 황녀가 아르셀리나의 이름도, 황실의 이름도 빌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산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익명의 이름으로 기부한다는 것은, 기부되는 자금에 대하여 그 이후 어떻게 사용되든 빈켄티우스가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테니아의 말에 렉산드라의 얼굴에 고심하는 기색이 어렸다.

굳이 발레리안의 의견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만약, 그가 반대할 것이었다면 진즉에 나섰을 테니까.

이미 아테니아 또한, 발레리안이 제 의견에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는 듯했다.

“황녀 전하께서 즉위한 반년 동안은 수도에 머물러 드리죠.”

아니, 발레리안은 오히려 아테니아의 제안에 힘을 실어 주었다.

현재 상황상, 렉산드라의 즉위에 있어 아르셀리나 후작가와 빈켄티우스 대공가가 그 세력의 주축이 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공 부부가 수도에서 머무르겠다는 이야기는, 즉위 후 빈켄티우스가 바로 손을 떼지 않고 반년간은 렉산드라의 힘이 되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반년.

솔직히 말하자면,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렉산드라의 정치적 능력을 시험하기에는 아주 확실한 시간이기도 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결국 한참을 침묵하던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렉산드라와 빈켄티우스는 비밀 계약서를 한 부씩 나눠 가졌다.

***

지금쯤 북부에 도착했어야 했을 황녀의 소식이 끊겼다.

그 사실이 마침내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황녀가 사라지다니!”

“폐하,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리고 소식이 전달되자마자, 황비가 질겁을 하여 황제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그것이… 슬리피아 숲 한가운데에 황녀 전하의 마차가 반파된 채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로 기사가 난감한 얼굴을 하며 말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사의 손에는 검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황제가 확인하기도 전에, 황비가 먼저 휙 집어 들었다.

“황비…!”

황실에 관해 일어난 모든 일은 황제가 먼저 하달받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황비는 절차를 무시했다.

그 태도에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황비는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황태자의 기사단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냐!”

아니, 오히려 황비는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가 드물게 차분한 기색을 잃고, 두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황제를 돌아봤다.

“폐하, 황녀의 실종에 황태자가 관련된 게 틀림없습니다!”

쾅!

“황비는 말을 자중하시오!”

황제가 노하여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는 황태자라고 할지라도 쉬이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란 듯, 황비가 황제의 앞에 검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황녀가 실종된 곳에서 이것이 어떻게 발견되었단 말입니까!”

그러자 황제의 입이 다물렸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베르나도를 후계자로 밀어 온 황제라고 할지라도 눈앞의 명확한 물증에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틈을 틈타, 황비가 먼저 말을 이었다.

“폐하, 렉산드라도 폐하의 자식입니다.”

황비의 목소리에는 절절 끓는 애 탄 마음이 가득했다.

“제가 지금껏 폐하께 언제 한 번 이렇게 소리를 높인 적이 있더이까.”

그에 황제가 움찔하고 말았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 내내 아르셀리나 후작가를 견제해 왔다.

자신이 황비를 속이고 다른 여인을 황후로 올려 제 발이 저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황비는 황제에게 배신당했음을 안 이후로도 단 한 번도 그에게 원망 따위 쏟아내지 않았다.

물론 황제도 처음에는 방심시킨 뒤에 보복하려는 것인가 의심했다.

그러나 황비는 황제와 결혼한 뒤 20년이 넘도록 황후를 박해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리를 얌전히 지켰다.

그런 황비를 보며, 황제도 나름 인간인지라 알게 모르게 마음의 빚이 쌓였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 황비가 이렇게 나오니 황제로서도 더 강하게 나갈 수가 없는 터였다.

“황비…! 뭐 하는 것이오, 일어나시오.”

황비가 황제의 앞에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었다.

“황실 기사들을 움직여 황태자의 궁을 수색해 주세요. 황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증거가 이것뿐 아닙니까.”

그러나 황비는 결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가 이어 읍소했다.

“저도 황태자가 아니길 바랍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모녀가 그간 얼마나 숨죽여 지냈는지요. 그렇지만 폐하, 우리의 딸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침음했다.

황비의 말이 옳았다.

황제가 아는 한, 황비와 렉산드라는 차기 황위에 욕심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쉽게 황비의 말을 허락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하는 순간 그의 연인… 즉, 황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황제를 보며 황비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당신이 그리 나올 줄 알고 있었더란다.

이제는 서운함도 들지 않았다.

황비는 그저 분노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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