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모든 것은 뜻대로 (3)
아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발레리안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결혼과 아이.
그 둘은 그에게 있어 연관된 문제임과 동시에,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했다.
애초에 발레리안은 아테니아 말고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였으나, 제 가문을 끔찍이 여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테니아를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발레리안이 아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전까지 아이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하나였다.
발레리안은 아이를 갖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는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었으니까.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고 했다.
발레리안의 아버지는 결코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선대 대공을 닮을까 봐 두려웠다.
게다가… 아테니아가 곁에 남아 준 것과는 별개로 그는 여전히 자신의 핏줄을 혐오하고 끔찍이 여겼다.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의 핏줄을 타고난 아이를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특히나 아이가 아테니아를 닮지 않는다면?
그건 가정만으로도 최악이었다.
아이의 모습에서 선선대 대공이나 선대 대공의 모습이 비친다면, 자신은 그 죄 없는 아이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발레리안은 스스로가 건넨 질문에 그 어떤 확답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빈켄티우스의 피조차도 증오했다.
발레리안은 자신에게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테나, 저는….”
그렇지만 발레리안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테니아가 그의 곁에 남아 있겠노라 한 순간부터, 발레리안의 욕심은 이미 그가 세워 둔 벽을 범람한 지 오래였다.
욕심이 커져 넘실거릴수록,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실망하게 할까 봐 점점 더 무서워졌다.
단언컨대, 그는 지금껏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오만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너무 사랑했고, 그 사랑은 그를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스스로를 사랑해 본 적 없는 발레리안의 마음속 무게 추는 늘 자신과 그녀 중, 아테니아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그의 머리는 애석하게도 자꾸만 그녀가 자신을 떠날 이유들만 떠올리게 되었다.
발레리안에게 있어 아테니아는 행복하고 또 행복해도 모자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녀가 원하는 행복을 앗아 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아테니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갖는 일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인생뿐 아니라, 태어날 아이의 인생조차도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
아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물리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결핍 없이 자라도록 하는 일.
그게 부모가 해야 할 책임이었다.
빈켄티우스에서 물리적으로 풍족하게 해 주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에게 주어야 할 내리사랑은 달랐다.
발레리안이 그것을 흉내 내고 싶어도,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신 뒤로 겪어 본 적이 없었기에 잊은 지 오래였다.
이런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정신적, 정서적으로 행복하게 해 준단 말인가.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불신했다.
“리안,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손을 잡아 왔다.
그녀의 시선은 빈틈없이 오직 그만을 향해 있었다.
아테니아라면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되어 줄 터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더더욱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오로지, 그에게 있었으므로.
“…테나, 우리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서 결국, 발레리안은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쉬어요.”
“리안.”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가 버리기 전에, 그녀가 물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라면, 제게 그 이유라도 말해 줄 수 있잖아요. 네?”
아테니아에게 있어서 그간 아이를 갖는 일에 가장 걸렸던 것은, 발레리안과 자신이 언젠가 이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해결된 터였다.
그런데도 그 이후로도 그는 그녀와 키스 그 이상의 것을 하기를 매번 주저했다.
그래서 사실 아테니아도 발레리안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러한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자, 그녀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테나, 그냥 우리 둘이 행복할 수는 없겠습니까?”
발레리안은 늘 그랬듯이, 차마 아테니아의 손을 내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물론, 아이가 행복한 결혼 생활에 있어 필수 요소는 아니겠죠. 저도 강요하려는 건 아니에요. 아이를 낳는 일은 부부간에 상의해서 결정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다시 한번 발레리안을 채근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발레리안의 침묵이 계속되자, 아테니아가 답답함에 말을 덧붙였다.
“나를 납득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저 당신의 생각이 궁금한 거라고요.”
그것은 호소였다.
그러니까 제발, 무언가 말이라도 해 달라는 짙은 호소.
하지만 그럴수록 발레리안의 입은 더더욱 다물렸다.
때로는 상대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누군가는 발레리안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반응할 수 없는 이런 자신의 이면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한지, 평생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똑똑똑.
그래서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 준 것은, 발레리안에게 있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공 전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북부로 오던 황녀 전하의 마차와 소식이 끊겼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
발레리안이 황녀에게 붙여 준 기사들은 전서구를 통하여 그들의 소식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빈켄티우스에서 마차로 날아간 전서구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황녀의 마차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 있는 곳으로 기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기사들은 의외로 고작 하루 만에 아주 빠르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곁에는 매우 멀쩡해 보이는 렉산드라도 함께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황녀는 단 하나도 다친 구석이 없었다.
갑자기 연락이 끊길 이유가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발레리안이 의아함을 담아 질문하자, 황녀가 태연하게 답을 내놓았다.
“제가 일부러 마차를 반파시켰어요.”
그로 인해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표정이 모두 이상해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자 쪽에서 저한테 미행을 붙였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황녀는 평이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그 상황에서, 황실과 빈켄티우스에서만 알고 있는 제 행방에 이상이 생기면… 의심받을 사람은 몇 없지 않겠어요?”
황태자가 미행을 붙였을 때, 황녀가 그것을 기사에게 그냥 두라고 한 이유.
그것이 마침내 드러났다.
“이것을 건네면 황제 폐하께서도 황태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겠죠.”
황녀가 옆에 있던 기사에게 지시하자, 그 기사가 황태자의 기사단이 하사받는 검을 내밀었다.
렉산드라는 일찍이 아르셀리나 후작을 통하여 자신의 세작을 황태자의 기사단에 심어 놓은 터였다.
그러니 검을 빼돌리는 일 정도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었다.
이 검은 황실의 무기만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직접 작업한 것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따라서 만들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황태자가 자신의 기사단을 움직인 사실쯤은, 황제가 조사하면 금방 드러날 일이었다.
“황태자의 기사에 의해 큰일이 날 뻔한 황녀 전하를 빈켄티우스에서 구했다. 지금 그런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
발레리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같은 황족 간이더라도, 황족을 시해하려고 한 죄는 컸다.
즉, 그런 모함을 덧씌우는 일의 대가도 작지 않다는 말이었다.
빈켄티우스가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가.
발레리안의 질문은 그런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번 일에 빈켄티우스는 뒤로 물러나 계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아르셀리나 후작가에서 앞장설 거니까요.”
현 아르셀리나 후작은 자신의 누나가 황비 자리의 앉은 이후, 내내 몸을 낮추어 왔다.
황제 탓에 후작가의 기사단이 수도에 매여 내내 황실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제 조카가 당한 일에 분노하여 기사단을 운용하겠다고 한다면, 그보다 좋은 명분은 없었다.
황녀는 그것을 노리는 것이었다.
지금껏 버젓이 존재함에도 그녀가 이용할 수 없던 아르셀리나 후작가의 기사단이었다.
렉산드라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때, 아테니아가 돌연 황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