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모든 것은 뜻대로 (2)
황녀의 행렬은 비공식적이었다.
남의 눈에 황실이 빈켄티우스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인식을 대놓고 줄 수는 없었으니, 렉산드라가 최대한 조용히 마차를 타고 북부로 향하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황녀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비공식적이었기에, 기록상으로도 남지 않아 렉산드라가 황제 몰래 행렬을 꾸리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황녀의 행렬에는 빈켄티우스에서 붙여 준 기사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아르셀리나 후작 가문의 기사단은 현재 황제의 명령에 의해 수도에 주둔하고 있어,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귀족 가문이든 수도에 기사단을 두려면, 황실의 특별한 허가가 있어야만 했다.
이것은 일견 특권 같아 보였으나, 아르셀리나 후작가의 입장에서는 족쇄에 불과했다.
후작가는 수도에 기사단을 두어도 그들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후작가의 기사단이 365일 황실에 감시당하는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렉산드라에게 빈켄티우스가 가장 필요했던 이유기도 했다.
황실에 허가받아 사사로이 기사단을 키울 수 있는 가문은 많지 않았기에, 결국 황녀가 황실 몰래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기사의 수는 개인 호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빈켄티우스는 초대 황제가 그들에게 북부의 전권을 위임한 만큼, 빈켄티우스의 기사단 또한 황실이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었다.
황제 몰래, 렉산드라가 무력을 빌려 오기에 딱 알맞은 상대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황녀는 빈켄티우스와 손을 잡기로 한 이후, 가장 먼저 발레리안에게 자신이 따로 부릴 수 있는 기사를 요청하였다.
“꼬리가 달린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
발레리안의 기사들은 확실히 실력이 뛰어났다.
황녀의 행렬이 출발하자마자, 황태자가 붙인 미행을 알아차리고 기사가 렉산드라에게 말을 전해 왔으니까.
기사의 보고에 잠시 고민하던 황녀가 말을 전했다.
“…그냥 따라오게 두게.”
“예, 황녀 전하.”
기사는 황녀의 말에 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났다.
렉산드라의 결정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양새였다.
빈켄티우스의 기사들은 유독 충직하다더니, 한동안 황녀의 말을 따르라는 제 주인의 말을 충실히 이행할 모양이었다.
일순, 렉산드라는 발레리안이 부러워졌다.
그러나 황녀는 곧 그 마음을 떨쳐내 버렸다.
전쟁이 없는 시대였고, 그렇기에 황실의 허가도 없이 개인적으로 무력 집단을 키웠다가는 눈에 띄어 반역죄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렉산드라는 지금 당장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기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 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제왕이 모든 것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누군가가 제왕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테니.
군주는 그것을 얻어 내는 것이 그 능력이라.
황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황녀가 수도에서 막 출발할 무렵, 아테니아는 황녀보다 먼저 북부로 향하여 빈켄티우스의 대공성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아테니아가 도착하자마자 모든 원로가 대공성 앞에 나와 있다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비 전하.”
아테니아가 떠날 때와는 달리, 원로들의 태도는 대단히 정중했다.
발레리안이 으름장을 놓은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는 아테니아에게 꼬투리를 잡을 일이 없는 탓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아이레스와 황태자가 일으킨 사태를 단 일주일 만에 빈켄티우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으니까.
“몇몇 원로들이 보이지 않네.”
원로들을 둘러보던 아테니아가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 역할을 다 못 한 모양이지.”
아테니아의 말에 몇몇을 제외한 원로들 대다수가 크게 움찔했다.
아테니아의 말대로, 원로들의 수는 그녀가 떠나기 전보다 줄어 있었다.
발레리안이 원하는 정보를 끝내 가져오지 못한 원로들이 그 자리를 강제 반납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이미 원로 중 누가 쫓겨났는지, 그들이 왜 쫓겨났는지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원로들을 내치는 일에 관하여, 이미 수도에 다녀오기 전 그녀와 발레리안이 상의를 끝냈다는 소리였다.
원로들은 새삼스레, 아테니아가 대공에게 끼치는 영향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새삼스럽지만,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대공비에게 보였던 태도가 걱정되었다.
“테나,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원로들의 사이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왔다.
일부러 대공비의 존재를 원로들에게 더욱 확실히 각인시키려 한발 늦게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리안.”
아테니아가 한걸음에 달려가 발레리안을 껴안았다.
다소 빠른 걸음으로 품에 뛰어들 듯했는데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그제야 아테니아는 자신이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서로의 체향이 코끝을 간질이자, 고작 며칠일 뿐이었는데도 참고 있던 그리움이 두 사람의 마음에 물씬 밀려들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잊은 채,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흠, 흠.”
시녀들을 부려 아테니아의 짐을 마차에서 내리고 온 시녀장이 그 장면을 보고 헛기침을 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아테니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발레리안에게서 떨어졌다.
그녀가 제 품에서 벗어나자, 그는 노골적으로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것을 힐끔 본 그녀가 발레리안의 손을 잡아 주며 원로들에게 말했다.
“다들 마중 나와 줘서 고맙네. 이제 돌아가도 좋아.”
“예, 대공비 전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제야 원로들이 인사하느라 경직된 자세를 풀며 대답했다.
그들이 발레리안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물러나자마자, 아테니아가 그의 팔에 팔짱을 껴 왔다.
“그럼 우리는 올라갈까요?”
“네, 테나.”
발레리안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부부.
그런 이들이 결혼하자마자 떨어져 있다가, 며칠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여독을 풀기 위하여 씻고 나온 후, 발레리안과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묘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안, 날 기다린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 방 안에서 발레리안을 발견하고 욕실 문 앞에 멈춰 서 있던 아테니아가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발레리안의 시선이 못 박힌 것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따라붙었다.
“…예, 오늘은 하루 종일 테나와 있고 싶었거든요.”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발레리안의 시선 탓에, 아테니아의 온 신경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화장대 앞에 앉으면서도 거울 너머의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테나.”
발레리안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못 박힌 듯, 제게로 다가오는 그를 거울을 통해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긴 다리로 훌쩍 다가온 발레리안이 말했다.
“머리, 제가 말려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아테니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리안이 그녀에게서 수건을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는 순간, 그들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막 목욕하고 나왔기 때문인지 아테니아의 피부는 습기를 머금어 촉촉했다.
그 탓인지 서로의 피부가 닿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서 발레리안이 그녀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부드럽게 말려 주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서투르지만, 한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로 인해 아테니아가 나른해져 있던 그때, 그가 돌연 입을 열었다.
“테나, 사실은… 제가 일부러 시녀들을 물려 두었습니다.”
나른함에 반쯤 감겨 있던 아테니아의 두 눈이 크게 떠져 거울 너머의 발레리안을 향했다.
그가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대와 단둘만 있고 싶었거든요.”
발레리안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 붉음이 아테니아에게 옮겨 온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따뜻한 목욕물로 인해 상기되어 있던 그녀의 볼이 더욱 발갛게 물들었다.
“……사실, 저도 그래서 일부러 목욕 시중이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아테니아가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워낙 방 안이 고요했던 데다가, 발레리안은 그녀의 지척에 서 있었다.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역시나, 들은 게 확실한지 그가 아테니아의 머리칼을 말려 주던 손을 멈칫했다.
곧,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빠르게 서로를 쫓았다.
아테니아의 몸이 발레리안에 의해 그의 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화장대를 짚은 채로, 몰아붙이듯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숨결까지 앗아갈 듯 두 입술이 깊게 맞물리고, 아테니아의 몸이 점차 뒤쪽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두 팔을 발레리안의 목에 감았다.
그의 팔이 단단하게 아테니아의 등을 받쳤다.
그녀의 호흡이 흐트러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때까지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발레리안이 그녀의 입술을 놔주었을 때,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열에 달뜬 채였다.
그런 발레리안을 바라보며, 아테니아가 불쑥 말했다.
“리안, 나… 당신과 아이를 갖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