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모든 것은 뜻대로 (1)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알현실을 울렸다.
황제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황태자에게 물잔을 집어 던진 탓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수모란 말이냐!!!”
황제의 어깨가 분노로 인해 들썩거렸다.
물잔은 아슬아슬하게 황태자의 머리 위로 비껴 지나갔지만, 그는 애초에 잔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베르나도 또한 현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상단들이 단체로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황실 전체를 당황하게 만든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황실에 물건을 대던 상단들이 전부 다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물건을 납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평소에 상단들을 경쟁시켜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황실은 각 상단과 한 달 단위로 계약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게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황실에 들어오는 물건들은 모두 당연하게도 최상품의 것들이었다.
그로 인해 황실에서 상단들에 치르는 대금도 어마어마했는데, 상단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손을 떼 버릴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렇게 되면 상단들이 황실에 잘 보이기 위하여 남몰래 받쳐 오던 것들 또한 없어질 게 뻔했다.
황실에서 부리는 사람의 수부터 어마어마했고, 황족들이 누리고 사는 것은 무수하게 많았다.
당장에 식자재부터, 매일매일 새롭게 채워지지 않으면 황족들의 식사는 물론 시녀나 시종들의 식사 배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황족들을 찾아오는 손님은 언제나 많았는데,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그에 걸맞은 티푸드를 내놓는 일조차 못 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 황실은 여러모로 곤란에 빠지게 된 터였다.
황제는 그것이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일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뻔했으니까.
“네놈이 빈켄티우스를 확실히 압박할 수 있다고 해서, 무리한 부탁까지 들어주었다! 그런데 크리스나를 황실 쪽으로 끌어들이기는커녕, 상인 전체를 적으로 돌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추측대로, 일부 지역들에서 상단들이 거래 시 내야 할 수수료를 올린 것은 황태자 독단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황제는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를 확실히 갈라 놓고, 크리스나의 후계를 황태자의 밑에 두게 하여 크리스나를 두고두고 이용할 참이었다.
아직도 귀족들 중 몇몇은 상업을 천박하다 여겼다.
황실이야말로 그런 푸른 피들의 정점에 선 존재였다.
그리하여 상업을 내내 무시하다가, 뒤늦게 황실이 그것의 절실함을 깨달아 상업에 발을 들이고자 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도 기득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제 황실이 상업 쪽으로 손을 넓힐 방법은 상단이 있는 가문과 어떻게든 연이 닿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멍청한 아들 놈으로 인해 크리스나와도 척을 지고 빈켄티우스를 완전히 도발한 셈만 되어 버렸다.
황제로서는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빈켄티우스가 다른 상단들을 저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동안, 네놈은 대체 무얼 한 게야!”
쾅!
황제가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황제는 황녀를 제 후계자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늘 무능한 제 아들의 행태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후계자인데, 아무리 그래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하지만 무능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이토록 어리석을 줄이야.
고작 발레리안에 대한 질투심으로 제 손에 들어온 크리스나의 후계자를 스스로 내쳐 버리다니!
심지어 듣기로는 발레리안과 아테니아는 아이레스가 문제를 일으킨 후 더욱 돈독해졌다고 했다.
차라리 제 아들을 지독하게 귀애하는 크리스나 백작이 아이레스 때문이라도 황태자의 편에 서게 만들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황태자가 대운하 사업에 관한 기밀을 유출한 사람이 아이레스임을 빈켄티우스에 밝혀 버림으로써, 크리스나는 현재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그랬으니 크리스나 백작이 황태자의 행동에 앙심을 품지 않았을 리 없었다.
황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이냐.”
황제가 골치 아픈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상단들이 황실에 납품하여 얻어 가는 수익을 포기했다는 것은, 분명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빈켄티우스에게 제안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건 발레리안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 이상, 상단들이 도로 황실에게 납품하려 할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실에게 납품을 할 다른 상단을 찾아보려 해도 소용없을 터였다.
전국적으로 상단 연합이 만들어졌고 그곳의 주축은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상단들이었다.
다른 상단들이 황실의 눈치를 볼지, 상단 연합의 눈치를 볼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상단 연합의 주축 중 하나인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가 황실을 적대시하는 시점에, 그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다른 상단들이 황실에 납품하려 들 리가 없었다.
어김없이 황실에서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의 화를 풀어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황제는 황태자를 노려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때, 시종이 말을 고했다.
“황제 폐하, 황녀 전하께서 알현을 요청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황제는 황녀에게서 어떤 대안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렉산드라를 물리려 했다.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 이르거라.”
그러나 황녀는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렉산드라는 알현실의 문밖에서 목소리를 높여 왔다.
“황제 폐하…! 제가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황녀의 말에 황태자가 순간 움찔했다.
제가 친 사고를 렉산드라가 수습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베르나도라고 할지라도, 그런 상황이 스스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황녀를 쫓아내기 위하여 황제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라고 하지 않더냐…! 지금 당장….”
그러나 순간, 황제가 황태자의 말을 끊어 냈다.
“되었다. 뭐라도 방법이 있다면 들어 볼 가치는 있겠지.”
물론, 황제가 황녀에게 무언가를 크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사태를 가라앉힐 방안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렉산드라 따위가 뭘 안다고…!”
황태자가 순간 위기감을 느끼고 황제에게 반발했다.
“시끄럽다! 황녀를 들라 하라.”
하지만 곧장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어, 황태자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사이에 시종이 열어 준 알현실의 문 사이로 황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녀가 우아한 자태로 인사를 건네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인사를 받고는 곧바로 물었다.
“황녀, 네게 이번 일을 처리할 방도가 있다는 게 사실이냐?”
황제의 목소리에 미심쩍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굴욕적이지만,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의 뒤틀린 심기를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황제조차도 캄캄한 터였다.
그런데 렉산드라에게 대안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 않았다.
황녀도 제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황제의 속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렉산드라는 그로 인해 불편한 심기를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황제의 앞에서 진정한 속내를 숨기는 것쯤은 황녀에게 일도 아니었다.
“예, 폐하. 다만….”
황녀가 힐끔, 황태자의 쪽을 쳐다봤다.
마치 베르나도에게는 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렉산드라, 너…!”
그에 발끈한 황태자가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였다.
“황태자는 자중하라! 현재 누구 때문에 상황이 이토록 엉망이 되었는지 잊었더냐!”
황제의 꾸중에 황태자의 입이 꽉 다물렸다.
베르나도가 이를 악물며 황녀를 노려봤다.
그러나 렉산드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황제는 황녀가 바라는 대로 황태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황태자는 이만 나가 보라.”
“아바마…!”
황태자가 울컥하여 황제를 돌아봤다.
그러나 황제는 베르나도의 반발을 끝까지 들어 주지도 않았다.
“내 말에 감히 토를 달 셈이냐!”
황제의 싸늘한 일갈에, 베르나도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황태자는 입술을 꽉 깨물며 굴욕감에 몸을 떨다가 홱 알현실을 나서 버렸다.
그렇게 베르나도가 알현실을 나가고 문이 닫힌 뒤에야, 황녀가 말을 이었다.
***
황태자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황제가 자신을 쫓아내고 렉산드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니!
분이 치밀었다.
제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항상 자신을 발레리안보다 못한 놈으로 보더니, 이제는 심지어 렉산드라 때문에 자신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베르나도는 속이 뒤집혀 어쩔 줄을 몰랐다.
“당장 렉산드라의 뒤를 캐 보도록 해.”
제 방에 들어서자, 황태자는 곧바로 제 보좌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베르나도가 어리석다지만, 그는 사는 내내 황태자이자 차기 제국의 주인으로 산 사람이었다.
그런 베르나도의 감에, 하필 이 시점에 렉산드라가 나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황제의 명령을 받은 황녀가 마차를 타고 북부로 향했다.
그런 황녀의 마차를 황태자의 수하가 몰래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