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랑이 흘러넘쳐서 (5)
아테니아가 내민 것은 대운하 사업의 모든 권리를 빈켄티우스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서류와 투자 제안서였다.
“대운하 사업의 공동 사업자로서는 물러나셔야겠지만, 투자자로서 이익을 배분받게는 해 드릴게요. 그리고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 드리죠.”
대운하 사업은 앞으로 나라의 많은 것들을 바꾸게 될 것이다.
당장, 며칠을 둘러 가야 할 길도 이어진 운하를 통해 가로질러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대운하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크리스나 상단의 이미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었다.
표면상으로나마 계속 그런 모습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 남느냐, 아니면 빈켄티우스에게 사업을 모조리 빼앗기느냐에 따라 앞으로 크리스나 상단의 위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테니아로서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지금 나보고 껍데기로나마 만족하라는 것이냐?!”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의 제안에 얼굴을 붉히며 모욕감을 느꼈다.
하긴, 백작이 평생 제 딸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 봤을 리 없었다.
“아무리 사내가 좋아도 그렇지, 네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아비를 등져!”
크리스나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역시나 그는 제 딸이 어떤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크리스나 백작은 영락없이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 의해 종용당하여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그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틀리셨어요.”
제 아버지가 너무나 한결같아서, 아테니아가 크리스나 백작을 미워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아버지가 싫은 거예요.”
아테니아의 말에 크리스나 백작의 모든 행동이 뚝 멈췄다.
“딱, 이렇게 굴 만큼 저는 당신께서 제 아버지라는 사실이 싫어요.”
마침내, 크리스나 백작의 입이 완전히 다물렸다.
백작이 셀레니아에게 너는 내 딸이 아니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그녀가 백작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을 터였다.
그렇게 크리스나 백작은 둘째 딸을 잃고도 달라지지 않아서, 또 아테니아에게 그녀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절연하겠다는 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건 부모라는 위치를 이용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로 인해 제 자식의 마음이 저에게서 떠나갈 수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으레 다들 착각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은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그 착각에서 강제로 깨어날 때였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정말 존경스러워요.’
크리스나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는 문득 자신의 생일마다 가장 먼저 선물을 챙기던 아테니아를 떠올렸다.
크리스나 백작에게 그녀는 그런 딸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존경하고, 제 뜻에 무조건 따르던 딸.
그건 사랑이었다.
자식들은 부모를 사랑한다.
부모는 화가 난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하거나, 연을 끊자는 말을 툭툭 던지고는 하지만 자식은 그런 종류의 말을 대체로 생각조차 못 해 보는 것.
그게 자식들이 부모에게 갖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크리스나 백작은 결코 아테니아에게서 제가 얼마나 싫은지에 관하여 들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것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백작의 자식들 중에서도, 제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던 딸이었으므로.
“그 서류들은 오늘 안으로 북부로 부쳐 주세요.”
크리스나 백작이 아무런 말도 더는 하지 못하자, 아테니아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언쟁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로 마지막 인사였다.
이제는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가 사업상으로 크게 얽히지도 않을 테니, 그녀가 크리스나 백작을 마주해야 할 일은 정말로 없을 것이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크리스나 백작님. 건강하시고요.”
아테니아가 곧바로 뒤를 돌아 응접실을 나섰다.
덧붙인 말은 진심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건강해야만, 혹시라도 앞으로 그녀가 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 일이 없을 테니까.
응접실의 문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크리스나 백작과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아테니아의 두 등을 갈라 놓으며 완전히 닫혔다.
***
아테니아는 그 길로 수도의 가장 유명한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그녀가 원로들에게 아이레스로 인한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아테니아가 디저트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지배인이 곧바로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북부를 떠나며 미리 연락해 두었던 대로 황녀가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대공비 전하.”
아테니아가 황녀와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피차 이곳에서 만나게 된 이유를 알고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를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황녀가 먼저 대화의 운을 뗐다.
실제로, 결혼식을 치른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렉산드라와 아테니아의 재회는 빠르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황녀 전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아테니아가 망설임 없이 말을 꺼냈다.
부탁이라고는 했으나, 선택권은 애초에 황녀에게 없었다.
이미 렉산드라는 아테니아와의 협상에서 빈켄티우스가 자신을 지지해 주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로 약속했으니까.
“부탁이 뭔가요?”
황녀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아테니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테니아에게서 나온 말에 렉산드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셀리나 후작가에서 키우고 있는 상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황비의 친정에서 남들 몰래 만든 상단의 존재를 아테니아가 알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황녀가 잠깐의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르셀리나 후작가가 가진 상단의 존재는 만들어질 때부터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렉산드라는 잠시 상단 이야기에 관해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라도 뗄까 고민했다.
그러나 황녀는 그 생각을 아테니아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곧바로 접어 버렸다.
아테니아의 두 눈이 이미 확신에 차 있었으니까.
“황녀 전하께서 제 결혼식에 하시고 오신 브로치… 일부 상단만 알음알음 거래하는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더군요.”
에티오피나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아테니아도 일전에 클라이브의 장부 조작 사건으로 백작의 집무실을 드나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이었다.
이제 막 채굴이 들어간 광산에 관한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채로 알음알음 정보가 빠른 상단 사이에서만 돌고 있었다.
그 당시 아테니아는 홀로 살아갈 작정이었으니 돈을 벌 수단이 필요했고, 심지어 투자에 흥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니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아냈는데 두 손을 놓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 길로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나 결국 아테니아는 그곳에 투자할 수 없었는데, 해당 광산의 소유주가 비밀 유지를 위하여 딱 세 군데의 상단과만 거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는 구경도 못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의 곳에서 그 다이아몬드를 보게 되었다.
아테니아는 결혼 준비를 하던 와중, 자신의 목걸이를 이룬 다이아몬드들이 일반적인 다이아몬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덕이었다.
어린 날부터 상단을 드나들어 온갖 보석을 봐 온 그녀였다.
게다가 아테니아는 누릴 만큼 누리며 부족함 없이 자라 귀금속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이 하고 다니는 장신구의 보석이 무엇인지 즈음은 감정사 없이도 스스로 구분하고 싶다는 이유로 공부까지 한 터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물어 자신의 목걸이에 사용된 것이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임을 확인받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녀에게서 똑같은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것이다.
당연히, 아테니아는 이 정보도 놓치지 않았다.
그 길로 그녀는 빈켄티우스의 힘을 이용해,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 상단 외에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상단을 알아냈다.
“황녀 전하께서 어떻게 그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계셨는지 조사를 하다 보니, 유통 경로를 알게 되었죠. 디시어스 상단이라는 곳이 황녀 전하께 그 다이아몬드를 바쳤더군요.”
상단이 그냥 황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면, 굳이 그들이 바치는 것이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의 귀함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그것을 선물한다는 건, 상단의 손해였다.
그렇지만 디시어스 상단이 굳이 알려지지 않은 다이아몬드의 정보를 황실에 발설할 이유가 없었다.
괜히 정보를 드러냈다가, 황실에 이득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디시어스 상단은 렉산드라에게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를 바쳤다.
그렇다는 건 상단이 이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를 선물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자연스럽게 다이아몬드의 존재를 황녀에게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즉, 황녀는 적어도 디시어스 상단의 중요한 정보를 알 만한 상단의 주요 인물이란 뜻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가 황비의 친정 가문이 상단을 몰래 숨겨 키우고 있다고 확신한 것이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눈썰미가 좋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에티오피나산 다이아몬드와 다른 다이아몬드의 차이는 일류 감정사들이나 알아볼 만큼 세세한 것이었다.
황녀가 아테니아가 그 차이를 알아볼 줄 전혀 몰랐던 것처럼 혀를 내둘렀다.
“황녀 전하, 저를 떠보는 건 그만두시죠.”
그러나 이어지는 아테니아의 말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