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사랑이 흘러넘쳐서 (3)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원로들이 동시에 발레리안에게 인사했다.
“자리에 앉지.”
발레리안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마시얼 백작이었다.
“전하, 크리스나 영식이 대운하 사업에 끼친 손해를 그냥 넘어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어제는 대공비 전하께서 저희에게 당장 돌아가라고 억지를 부리셔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카마시얼 백작이 뻔뻔하게 잘도 지껄이고 있는 반면에, 웨일러스 후작은 기겁하여 발레리안을 돌아봤다.
역시나, 발레리안의 서릿발보다 차가운 시선이 카마시얼 백작을 향해 있었다.
“카마시얼 백작, 언행을 주의하시오, 대공비 전하께 그 무슨 무례란 말인가.”
웨일러스 후작이 대뜸 나서 카마시얼 백작에게 경고했다.
어차피 오늘 발레리안이 원로들을 모조리 걸러 낼 것인 이상, 더는 웨일러스 후작이 원로들의 편인 척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웨일러스 후작은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 발레리안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원로들이 쫓겨난다는 것은, 원로석에 빈자리가 생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 공석에 누구를 채우느냐에 따라서 원로들 사이에 세력이 재정립될 터였다.
이건 어쩌면, 웨일러스 후작이 자신의 세를 불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니 후작은 자신이 아테니아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후, 후작님?”
카마시얼 백작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작보다도 더한 혈통주의자가 웨일러스 후작이 아니던가.
그런 후작이 대뜸 아테니아를 옹호하고 있으니 당황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너무 그러지 말게, 웨일러스 원로.”
돌연, 발레리안이 그런 웨일러스 후작을 말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당연히도 그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천지 분간을 못 할 수도 있지 않겠나.”
발레리안의 시선이 원로들을 두루두루 돌아봤다.
즉, 이 말이 단지 카마시얼 백작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여기 있는 원로들을 가리키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대공 전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셨어도 어찌 그런 말씀을…!”
발레리안의 노골적인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원로들이 하나둘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 반발의 말을 토해 냈다.
촤악, 탁.
그리고 그 순간, 원로들이 앉아 있는 원탁 가운데로 두꺼운 서류들이 뿌려졌다.
“그대들이 천지 분간을 할 줄 알면서도 이런 짓을 했다면… 내가 그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겠군?”
“그게 무슨….”
발레리안의 말에 황급히 서류를 한 장씩을 집어 든 원로들의 표정과 행동이 모두 굳어 버렸다.
거기에는 원로 중 누군가의 비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셈이 느린 자들조차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중에 반드시, 자신의 비리가 있으리라는 점을.
개중에 떳떳한 자들도 있기는 했으나, 그들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발 물러서 당황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눈치 빠른 자들은 뒤로 물러선 이들이 이미 이 상황에서 예외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예외.
자신들도 예외가 될 방법이 필요했다.
비리를 저지른 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두 눈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카마시얼 백작, 그대는 사실 내 아내에게 그런 식으로 굴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마치 원로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정답을 내려 주듯이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대를 충동질하도록 시킨 거지. 그렇지 않나?”
발레리안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마시얼 백작이 갑작스럽게 납작 몸을 엎드리며 외쳤다.
“그… 그렇습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그, 러니까….”
몸을 숙인 채 원로들을 돌아보던 카마시얼 백작이 그 순간 눈에 걸린 원로의 이름을 토해 냈다.
“마틴 남작! 마틴 남작입니다. 저한테 대공비 전하를 몰아낼 중요한 증거라면서 저런 서류를 가져와서는…!”
“카마시얼 백작님!!! 대공 전하, 제가 아닙니다…! 저는…!”
마틴 남작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발레리안이 자연스럽게 남작을 돌아봤다.
“그러니까, 카마시얼 백작의 말은 일의 주동자가 마틴 남작이다?”
발레리안은 마치 오직 카마시얼 백작의 말만이 진실인 양 마틴 남작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틴 남작은 발레리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발레리안은 지금… 밀고를 하란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틴 남작은 망설이지 않았다.
“저도 이즈엔 자작이 시켜서 그랬습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지?”
그러나 발레리안은 이번에는 손쉽게 믿어 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그대가 한 말은 방금 카마시얼 백작의 말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마틴 남작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는 발레리안이 방금 전 카마시얼 백작이 말한 것보다 더 상세한, 무언가를 원한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이즈엔 자작이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제가 자작에게 빌린 대금의 이자를 탕감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 아닙니다, 대공 전하, 저도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이즈엔 자작이 자신도 억울하다는 듯이 무릎을 꿇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다들 자신이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며, 이전 사람보다 더 많은 것들을 토설해 냈다.
그 순간 그곳에 있는 자들의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은 하나였다.
남들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저만 살면 그만이지.
그 이기적인 생각들이 지금껏 똘똘 뭉쳐 있던 원로들의 사이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
발레리안이 원하던 대로였다.
“아닙니다! 이 일은 모두 에킬레샤 자작이 꾸민 일입니다! 자작이 자금난을 해결해 주겠다며 저희를 모아 놓고 회합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로들에게서 발레리안이 가장 바라던 말이 터져 나왔다.
원로들의 폭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무 말도 없이 그것들을 듣고만 있던 발레리안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에킬레샤 자작에게 자금난을 해결해 줄 돈이 어디 있어서?”
발레리안이 반응을 보이자, 원로들의 두 눈이 마치 구명줄이라도 만난 듯 번뜩였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에킬레샤 자작에게 받아먹은 게 있는 이들이라면 한두 마디씩 보태 자작이 그간 벌인 짓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폭로가 끝났을 때, 발레리안이 피식 웃었다.
“아, 그러니까… 다들 에킬레샤 자작의 돈이 황태자에게서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먹었다.”
궁지에 몰린 자들은 대개 이성이 흐려지고 판단력을 상실하기 마련이었다.
발레리안이 말을 꺼내자, 그제야 그들은 에킬레샤 자작의 비리를 폭로하는 일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최소한, 자작의 죄를 알고서도 침묵한 것이었으니 그들에게도 충분한 죄가 있었다.
그래, 발레리안은 처음부터 원로들을 용서해 줄 생각이 일말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시늉이나마 한 것은, 어차피 비리를 들켜 낭떠러지에 몰린 자들이 확실히 그 아래로 자진하여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었다.
원로들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중에서 당연하게도, 얼굴이 가장 창백해진 것은 에킬레샤 자작이었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로 이런 짓들을 벌인 것인가를 인지했다.
그들도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씩, 조금씩 저질렀던 비리들이 발레리안이 모르는 듯 가만히 있자, 욕심이 점차 커져 이렇게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발레리안이 빈켄티우스에 별 관심이 없다 못해 싫어하는 것은 원로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둘 잘못이 추가되어 이미 들킬 수위가 넘어섰는데도 제재가 들어오지 않자 그들은 발레리안이 끝까지 나서지 않을 줄 알았다.
그들은 간과한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황제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북부의 왕이었다.
쿵!
“…살려 주십시오, 대공 전하!”
삽시간에 십여 년은 늙어 버린 것처럼 얼굴이 핼쑥해진 원로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북부 귀족의 작위 수여권을 빈켄티우스가 가지고 있듯이, 그것을 거둬 가는 것 또한 빈켄티우스였다.
자신은 죄가 없음을 알고 꼿꼿하게 서 있는 원로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자들은 작위 박탈을 당할 명분이 충분한 죄를 지었다.
귀족으로서의 권한을 잃으면 그들을 지켜 줄 기사도 두지 못하게 된다.
빈켄티우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북부에서, 빈켄티우스에게 죄를 지은 채로 최소한의 호위도 없다면… 발레리안이 그들을 어떻게 처분하든, 찍소리도 못하고 당할 터였다.
소리 소문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란 소리였다.
그 생각에 벌벌 떠는 원로들을 보며, 발레리안이 일부러 더욱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대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했겠지. 그렇지 않나?”
발레리안은 솔직히 말해서 죄를 지은 모든 자를 쳐 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원로들의 행동이 평민들에게조차 영향이 갈 만큼 극악하지만 않다면 저들끼리 지지고 볶아도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원로들이 지금껏 빈켄티우스의 재산을 조금 갉아먹었다고 하여 티도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발레리안은 소수의 몇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원로직에 이들을 남겨 둘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자신이 써먹기에 편할 것이니까.
물론, 솎아 내야 할 자들도 그 골수까지 이용해 먹다가 버릴 테지만.
“내가 그대들에게 시킬 것이 있어. 이걸 잘 해내면… 죄를 조금은 사해 줄 수도 있지.”
그리하여 발레리안이 드디어 원로들을 몰아붙인 이유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