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사랑이 흘러넘쳐서 (1)
발레리안의 호소에 아테니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여기서 그녀가 괜찮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결코 괜찮을 수 없을진대.
빈켄티우스에 대한 발레리안의 증오심은 그의 생애 전반을 이루는 뿌리 깊은 나무였다.
그것을 드러내면, 기필코 그 땅의 주인인 그에게까지 움푹 팬 흔적이 남을 게 뻔한.
물론 아테니아는 결코 발레리안의 그 증오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어찌할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저 증오심이 있는 한 그는 절대로 그녀를 빈켄티우스에 두지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발레리안에게 있어 빈켄티우스란, 세상의 모든 끔찍함을 다 모아 둔 곳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아테니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테나, 제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빈켄티우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어깨를 잡아 저에게서 떨어트리며 그녀를 마주했다.
아, 내가 그대를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그의 얼굴이 웃음과 동시에 일그러졌다.
“테나, 사랑해요.”
지금도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녀가 그것으로 제 곁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는 거리의 비렁뱅이보다 더 비천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 문제는 그것이었다.
행복.
아테니아가 이 끔찍한 곳에서 언제까지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발레리안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감히 그녀의 행복을 가지고 도박할 수 없었다.
“이토록 사랑하는 그대에게 불행을 강요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발레리안이 반쯤 무너지듯이 아테니아의 양어깨를 붙잡고 매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저는 그대를 보내야만 합니다, 테나. 그러니 절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그대가 내게 끝을 고할 때마다, 사실 나는 너무나 두렵다.
그 끝에 그대가 나를 미워할까 봐.
그리하여 그대가 내게서 너무 멀어질까 봐.
발레리안은 늘 그게 두려웠다.
마침내 모든 두려움을 드러낸 그는 마치 천둥 속에 벌벌 떠는 어린아이 같았다.
“…제가 이런 당신을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양 뺨을 감싸서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이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은 발레리안을 설득하는 것도, 그의 증오심을 풀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제가 당신의 곁에 있어 불행하다면.”
자신은 그저, 발레리안의 곁에 있어 줘야만 했다.
아테니아가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당신과 함께 불행하고 싶어요.”
나는 내가 당신 때문에 불행해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 불행이라 생각한다면….
기꺼이 불행하리라.
아테니아의 단호한 말에 순간 투둑, 발레리안의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그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테나, 테나….”
세상에 아테니아밖에 없는 듯이 발레리안은 그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입술이 닿고, 떨어질 때마다 그게 유일한 호흡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입에서는 아테니아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혀가 얽히고, 숨이 얽혔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발레리안의 옷을 잡아 구기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랫입술을 빨고, 입술 안쪽을 간지럽혀 올 때마다 아테니아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발레리안의 혀가 집요하게 얽혀 들어 아테니아의 것을 마치 제 것인 양 가지고 놀았다.
서로의 달아오른 숨이 서로의 귓가를 달궜다.
더운 숨이 맞닿은 피부에 간질간질하게 내리 앉았다.
아테니아가 반사적으로 발레리안의 목에 제 두 팔을 감아 그에게 더욱 밀착했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등을 끌어안아 강하게 받쳐 주었다.
발레리안은 이 순간 아테니아의 모든 것을 앗고 싶었다.
아, 그대가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할 틈도 없게 그대를 모두 삼켜 버리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할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면서 그렇게 빌어 놓고-.
실은,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대가 이렇게 말해 주기를.
그대가 행복보다 내 곁을 택해 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발레리안은 제 탐욕을 비웃었으나- 그 탐욕이 채워진 순간, 더없이 행복했다.
그의 모든 행복이 아테니아였기에.
“후으… 흐… 리안….”
아테니아가 숨이 막힌 듯 호흡을 헐떡이며 발레리안을 불렀다.
가쁜 숨을 그가 주는 잠깐의 틈만을 통해 내쉬느라 점차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려 갔다.
그로 인해 주춤주춤, 아테니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털썩.
아테니아의 다리가 소파에 부딪혀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떨어지게 되었다.
저로 인해 발갛게 물든 아테테니아의 얼굴.
그 얼굴을 발레리안이 홀린 듯이 바라봤다.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선에 아테니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이미 서로의 입술은 타액으로 인해 잔뜩 젖은 채였다.
촉촉하게 물든 두 입술이 달라붙었다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아테니아의 손이 발레리안의 뺨을, 목덜미를, 어깨를 매만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가는 손가락들이 발레리안의 온몸에 간지러움을 피어오르게 했다.
그가 그 간지러움을 해소하듯 아테니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나 심장에서부터 서서히 퍼지는 그 기민한 감각이 고작 그런 것으로 줄어들 리 없었다.
문득, 발레리안의 시야에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가 본능적으로 이끌리듯 고개를 숙여 아테니아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아…!”
갑자기 가장 취약한 곳을 물리게 된 아테니아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그녀를 달래듯, 피부 위를 입술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아픔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똑똑똑.
그 순간, 노크 소리가 잔뜩 열기에 잠식되어 있던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일깨웠다.
곧이어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 전하, 웨일러스 후작이 찾아왔습니다.”
타인의 목소리에 몽롱하게 젖어 있던 두 사람이 과하게 밀착된 자신들의 자세를 깨닫고는 후다닥 떨어졌다.
하도 밀착해 있던 탓에 아테니아가 입은 드레스의 앞여밈은 흐트러져 있었고, 발레리안의 제복은 다 구겨진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훤한 대낮이었음을,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그제야 인지하고는 더욱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전하?”
발레리안이 대답이 없자, 밖에서 의아함을 담은 집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발레리안은 괜스레 흠, 흠 헛기침을 한 후에야 목소리를 내었다.
“우선, 내 집무실로 안내하도록 해.”
아테니아나 발레리안이나 모두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무리였다.
“예,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집사는 더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집사의 걸음이 문밖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마찬가지로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레리안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풋.”
가볍게 터진 웃음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누구의 것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명확한 것은 서로에게 빠져 누군가가 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 어쩐지 제법 즐겁고 웃겼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서로를 마주한 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 차례 웃음이 가시고 나자, 그제야 그녀가 물었다.
“리안, 웨일러스 원로는 웬일로 찾아온 거예요?”
아테니아는 웨일러스 후작을 부른 것이 발레리안이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혈통이니 결혼이니 운운하던 웨일러스 후작이 그날 식사 자리를 기점으로 그녀에게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웨일러스 후작에게 무언가 조치를 취해 두었으리라 확신한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웨일러스 후작이 돌연 찾아왔다는 것은, 발레리안이 후작을 부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테나, 같이 가서 들으시겠습니까?”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그녀를 어떻게든 원로들과 마주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던 그였다.
그런 발레리안이 하는 제안이었으니, 아테니아가 기꺼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가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우리.”
발레리안의 손이 아테니아에게로 내밀어졌다.
아테니아가 그 손을 잡자, 그가 가볍게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그제야… 완벽한 우리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웨일러스 후작이 발레리안과 아테니아를 보자마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일전에 그녀에게 후작이 보이던 태도와는 아주 상반되게, 충실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웨일러스 후작은 대단히 긴장한 사람처럼, 힐끔 아테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결정권이 그녀에게 있는 것처럼.
“오랜만이야, 웨일러스 원로.”
아테니아가 웨일러스 후작이 일전에 저지른 무례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가볍게 대꾸하자, 그제야 후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보며 발레리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리에 앉지.”
“예, 전하.”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나란히 앉고, 웨일러스 후작이 그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 후, 시종이 차를 내준 뒤 발레리안이 웨일러스 후작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 찾아오라 명하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