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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94화 (94/111)

94.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5)

“테나, 저는… 아버지가 밉습니다. 내 어머니를 죽게 내버려 둔 아버지란 사람이, 너무 미워요….”

발레리안이 마침내, 그동안 내내 숨기고 있었던 진실을 토해 냈다.

비겁하게도, 마침내 용기가 생겨났다.

“전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고, 선선대 대공은 그런 저를 빈켄티우스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꼭 저 같은 것만 낳아서는…! 저렇게 나약해 빠진 하자품 따위를 빈켄티우스의 후계자라고 내 인정할까 보더냐!’ 발레리안은 늘 저와 어머니를 두고 퍼부어지던 선선대 대공의 비난을 기억했다.

발레리안이 사람의 말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그와 그의 어머니는 조부의 비난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처음에 한두 번, 선선대 대공을 말리던 내 아버지는…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죠.”

‘아버지, 또 왜 이러세요!’

‘비켜라! 네 놈은 꼭 골라 와도 저런 걸 아내라고 골라 와서는…!’

원치 않은 며느리를 들인 것에 대한 선선대 대공의 화풀이는 밑도 끝도 없었다.

그러니 제 아버지를 뜯어말리던 선대 대공도 아내와 아버지 사이에서 지쳐 간 것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도 몰랐다.

‘여보, 당신이 매번 아버지의 폭언에 그렇게 당하고만 있으면 내가 당신을 대신해 나서도 아무 소용이 없어.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잖아, 매번 아버지한테 당하지만 말고 당당해져. 응?’

발레리안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보다도 훨씬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선선대 대공의 모진 말들에도 매번 울기만 할 뿐, 제가 겪는 부당함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낼 줄 몰랐다.

황녀 시절부터 사생아라는 이유로 억눌려 살아온 탓인지, 그녀는 맞서는 법 따위 몰랐고 무슨 일이 생겨도 매번 일방적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선대 대공이 제 아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당당해지라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었다.

선대 대공이 밖에서 일이라도 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선대 대공비의 울음소리가 대공성 안을 가득 채웠다.

발레리안의 아버지가 없는 사이, 선선대 대공이 또 그의 어머니를 잡은 것이었다.

물론, 발레리안은 그래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끝까지 책임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런 사람임을 알면서, 선선대 대공 같은 사람의 며느리가 되게 만든 것은 아버지였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일을 핑계로 종종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어요. 그런 날이면 선선대 대공의 타박과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죠.”

발레리안의 아버지는 현실을 도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최소한의 방패막 없이 현실에 내쳐진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멈출 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 상황을 두고 보지 못한 것은 발레리안의 할머니였다.

“일전에도 선선대 대공이 어머니를 잡을 때면, 선선대를 억지로 말려 어머니와 떼어 놓는 것은 할머니의 역할이었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선선대와 어머니 사이에서 쏙 빠져 버리자… 모든 것은 할머니의 몫이 되었죠.”

선선대 대공을 말리는 것, 자꾸만 일을 이렇게 만드는 선선대 대공에게 화를 내는 것, 우는 발레리안의 어머니를 달래는 것, 어머니의 억울함을 선선대 대공에게 따지는 것까지, 그 모든 게 발레리안의 할머니가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선선대 대공에게서 발레리안의 어머니를 보호하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선선대 대공과 할머니 사이의 감정도 점차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죠. 나중에는 두 분이서 다투는 일도 늘어났어요”

본래, 그토록 고집이 센 선선대 대공도 제 아내의 말이라면 한 수 접어 주고는 했다.

발레리안의 할머니도 그다지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선대 대공 부부는 꽤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게 틀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저는… 선선대의 고집을 더는 할머니가 용인해 주시기 힘든 지경까지 간 것이리라 생각합니다만….”

솔직히, 선선대 대공이 그 고집을 한 수 접는다는 이유로 아내에게만큼은 상당히 잘한다는 평을 들었던 것부터가 발레리안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선선대 대공의 그 답 없는 성격을 평생 받아 주고 산 것은 할머니였는데 말이다.

“그 후 할머니께 심장병이 생겼는데… 의사는 아마도 그게, 화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스트레스 탓이라고요.”

발레리안의 할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그 날.

그날 이후로 대공성에는 죽음과 같은 고요만이 맴돌았다.

말 그대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선선대 대공은 제 부인의 휴식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대신 발레리안의 어머니가 눈에만 띄어도 그녀를 죽일 듯 노려봤다.

덕분에 발레리안의 어머니는 그의 할머니가 아픈 이후로 제대로 방 밖을 나가지조차 못했다.

발레리안의 아버지는 마치 현재 상황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일에만 더더욱 몰두하였다.

그럴수록 발레리안의 어머니는 더더욱 고립되었다.

그후, 다행인지 아니면 더 큰 불행일지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할머니의 건강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하고 있던 찰나… 어머니께서 임신하셨습니다.”

발레리안은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재차, 제 어머니가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던가, 그에 관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의사는 낳지 말라고 했어요. 어머니의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그런데 선선대 대공은 마침내 제대로 된 후계자를 둘 수 있겠다며 아주 크게 기뻐하셨죠. 그 속에서 내 아버지란 사람은….”

발레리안이 이를 갈았다.

할머니가 당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태만 되었어도, 그녀는 제 며느리의 출산을 말렸을 터였다.

그러나 당시의 할머니는 종종 사경을 헤맬 만큼 건강이 나빠져 계셨으므로,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발레리안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비수를 꽂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그러더군요.”

‘여보, 우리 둘째를 가졌다며? 축하해, 고마워.’ 선대 대공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뻔했다.

그는 아마도, 이번만 버티면 모두 괜찮아지리라 여겼을 터였다.

선선대 대공도 제가 원하는 후계자를 얻고 나면 며느리에게 뭐라고 하는 일도 줄어들 테고, 그렇게 되면 선선대 대공 부부가 다투는 일도 적어지게 될 테니까.

그러면 모든 게 좋아지리라고.

선대 대공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제 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할 수 있었을 리 없죠.”

만약, 이번을 버티지 못하면 그 희생은 누가 치르게 될지 뻔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로 했고, 결국… 지독한 출산 과정에서 하루가 넘게 앓으시다가 과다출혈로 돌아가시게 되었어요. 중요한 건, 어머니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전혀 모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선대 대공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때는 아이를 낳으라고 등을 떠민 선선대 대공보다, 어머니에게 닥칠 위기를 모른 척한 제 아버지가 더 미웠다.

“그렇게 어머니는 둘째를 낳는 일에 사활을 거셨는데… 마치 그것을 비웃듯, 선선대 대공은 할머님께서 어머니의 임신 기간 중 돌아가신 이후 그대로 이 대공성을 떠나 버렸습니다.”

말을 하고 나니 발레리안의 안에서 이번에는 선선대 대공에 대한 증오심이 타올랐다 사람을 그토록 죽어라 괴롭힐 때는 언제고, 제 아픔 하나 감당하지 못해 그렇게 도피해 버린 것이 아닌가.

발레리안은 그 행태가 정말 역겹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인 선선대 대공은 이곳에 없었죠. 그때, 아버지가 누구에게 원망을 토해 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발레리안은 당시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피를 쏟아 내며 식어 가던 어머니의 육체.

그것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던 아버지는 정확히 발레리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저였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그러더군요. 네가 건강하기만 했어도, 네가 제대로만 태어났어도- 네 어머니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아, 막 어머니를 잃은 아이에게 그 얼마나 잔인하기 그지없는 말이던가.

그 말은 그 후 단 한 순간도 발레리안의 마음 한구석에 박혀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 뒤부터였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배웠어요. 목에 피맛이 느껴져도 훈련장을 돌았고, 손에 물집이 잡혀 터져도 목검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작 2년 만에, 발레리안은 죽기 살기로 또래 중 가장 뛰어난 아이가 되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8살에 발레리안이 모든 과목에서 수석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에 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거든요.”

발레리안에게 약한 것은 죄였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강해진 뒤에도, 선선대 대공은 빈켄티우스의 혈통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지 않았고… 또 내 아버지란 작자는 여전히 뒤로 물러나 현실에서 도망이나 치고 있더군요.”

제가 선선대가 말하는 정당한 후계자가 되면, 어쩌면 빈켄티우스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 그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곧 그는 인정하게 되었다.

“그걸 보며 마침내,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그른 것은 빈켄티우스 그 자체였다고.”

빈켄티우스는 썩은 물 그 자체였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그 사실을 털어놓고 나자, 발레리안은 드디어 아테니아에게 어느 때보다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테나,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런 곳에 붙잡아 두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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