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4)
모든 일에는 순서란 것이 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지금 선대 대공이 그 순서를 크게 틀렸다고 생각했다.
“리안은 여전히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을 텐데, 제가 빈켄티우스 전하와 잘 지내 버리면 그는 뭐가 되나요?”
아테니아가 단호하게 선대 대공에게 선을 그었다.
매끄럽지 않은 시부모와 남편 사이를 잘 조율하는 며느리.
그건 분명 현명한 행동이긴 했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그냥 뒤틀리지 않았다.
분명, 아테니아가 선대 대공과 잘 지내길 원한다면 발레리안도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않을 터였다.
아테니아가 선대 대공과 잘 지내는 것은 빈켄티우스에서 입지를 잡기 매우 유리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아테니아와 선대 대공이 서로 가깝게 어울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분명 발레리안도 그 사이에 끼게 될 터였다.
그래, 그렇게 다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부자지간의 사이가 나아질 수도 있었다.
본디 시간이란 많은 것들의 약이 되는 법이었으니까.
서로 처음에는 데면데면하게 굴다가도, 어느 날엔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리라.
아마, 선대 대공이 아테니아를 자꾸 도와주는 것은 그런 날을 기대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사이가 나아지면 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에게 부모로서 미숙하여 저질렀던 잘못을 사과할 수 있는 타이밍도 분명 올 터였다.
그러나 단언컨대, 잘못한 사람은 그런 요행을 바랄 자격이 없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두려움, 사과를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무서움.
그런 건 잘못을 저지를 이가 온전히 감당해야만 할 것들이었다.
아테니아는 선대 대공이 사과하기 좋아질 때를 기다리는 동안, 발레리안이 그것을 인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은 발레리안이 아니라, 선대 대공의 몫이어야만 했다.
“저를 도와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는 그게 빈켄티우스 전하가 리안에게 사과를 전할 방법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선대 대공은 아테니아가 아니라 발레리안에게 먼저 다가갔어야 했다.
그 행동으로 돌아오는 결과가 거절이든 원망이든 간에.
“그러니 아까는 원로들의 앞이었기에 말씀을 못 드렸지만, 앞으로는 저를 이렇게 도와주시지 않아도 돼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공비가 원로들의 앞에서 선대 대공이 기껏 도와주는 데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계속해서 선대 대공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제가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 빈켄티우스 전하를 멀리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아테니아도 제 말이 선대 대공에게 매정하게 들리리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가 단호하게 나가지 않고 어영부영 굴면 해결되지 않은 앙금과 현재 상황 사이에서 곤혹스러워질 사람은 발레리안이었다.
“리안에게 좋은 아버지라면, 저도 최선을 다해서 아버님으로 모실 거니까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선대 대공의 행동에 선을 긋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은 발레리안이었으니까.
그래서 아테니아의 얼굴은 한없이 단호했다.
그녀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만 있던 선대 대공이 한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생각을 잘못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다행히 선대 대공의 대답은 아테니아가 원하던 것이었다.
“네 말이 옳다, 아가. 너를 도우면 리안에게 조금은 속죄를 할 수 있으리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선대 대공은 담담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애초에. 제게는 발레리안이 누구를 아내로 맞아들이든 반대하고 찬성할 자격 따위 없었다.
그래도… 굳이 나선 것은, 온전히 속죄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 같은 아버지라도, 그 애의 인생에 한 번쯤은 도움이 되어 보고 싶었단다. 어쩌면 이조차도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도움은 온전히 도움이라 할 수 없었다.
발레리안이 제 도움 따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대 대공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제 아들을 돕겠다는 것조차 자신의 이기심이리라.
선대 대공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변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면, 하지 마셨어야지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아테니아와 선대 대공 모두 놀라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발레리안이 더없이 차가워진 표정으로 선대 대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안.”
선대 대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발레리안을 불렀다.
그러나 선대 대공은 주춤주춤거릴 뿐, 차마 제 아들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저를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선대께서 부를 호칭이 아닙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대번에 선대 대공의 부름을 내쳐 버렸다.
발레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마치 선대 대공이 아테니아에게 해를 끼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선대 대공에게서 가리고 섰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 아내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도 마십시오. 불쾌합니다.”
“…리안.”
이번에는 아테니아가 뒤에서 발레리안의 옷자락을 약하게 잡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와 선대 대공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반쯤 눈이 돌아간 발레리안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늘 당신이 하시던 대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른 척 뒤로 물러나 있으란 말입니다.”
발레리안이 기어코 날 선 말을 내뱉었다.
인제 와서 제 아버지 노릇을 하려 드는 선대 대공의 행태에 속에서 천불이 들끓었다.
이렇게 이성을 차릴 수 없는 건 발레리안으로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원래의 발레리안이라면 절대 이런 모습 따위 아테니아의 앞에서 보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고장 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제 아버지를 향한 비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딱, 그만큼- 제 아버지가 감히 아버지답게 굴려고 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선대 대공이 오래전에 조금만 아버지답게 행동했더라면, 발레리안이 이토록 빈켄티우스를 증오하게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 노릇을 하려거든, 내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적에 하지 그랬습니까.”
발레리안을 낳을 적부터 난산이었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두 번째 출산은 죽으란 말과 다름없었다.
선선대 대공의 등쌀에 밀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머니가 둘째를 낳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한 선대 대공이었다.
그래 놓고 인제 와서, 무엇을 하겠다고.
발레리안이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내 어머니가 죽게 내버려 둔 주제에.”
발레리안의 말이 칼날처럼 선대 대공의 심장에 콱 박혀 들었다.
선대 대공이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제 아버지에 대하여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안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하루가 넘게 계속되던 출산 과정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끔찍한 비명과 그녀에게 드리운 죽음을 드러내듯 점차 잦아 가던 목소리.
마지막에 대공비 전하를 부르짖던 산파와 의원들.
그리고 뒤늦게 엄마를 울부짖으며 들어갔을 때- 그의 코를 마비시키던 지독한 피비린내와 붉게 물든 새하얀 천들.
발레리안이 그것들을 본 나이가 고작 6살이었다.
발레리안은 일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선대 대공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어른이었던 아버지가 막을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는 막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선대 대공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를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안… 미안하구나, 미안… 미안하다.”
선대 대공이 휘청휘청하며 제 아들에게서 한 걸음 두 걸음 떨어졌다.
그 모습은 도망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선대 대공이 겨우 방을 빠져나갔을 때, 그는 그대로 복도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 왜소해진 등 뒤로 탁,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제야 빨갛게 물들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난을 쏟아 냈던 발레리안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홱 아테니아를 돌아봤다.
순식간에 발레리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방금, 자신이 아테니아의 앞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아 버린 탓이었다.
“테나, 그러니까… 이건, 조금 전에는….”
발레리안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채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방금 선대 대공이 그랬던 것처럼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절대로 아테니아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던 모습이었다.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그런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더없이 최악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테니아가 돌연, 그를 안아 왔다.
혹시라도 발레리안이 이대로 도망쳐 버리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두 팔로 최대한 그를 꽉 안았다.
“미안해요, 리안. 내가 미안해요.”
자신과 선대 대공이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발레리안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발레리안의 상처를 들쑤신 것 같아서,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당신이 내게 감추고 싶던 모습을 보이게 만들어서, 내가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아테니아에게 사과를 듣는 순간, 잔뜩 굳어 있던 발레리안의 몸에서 빠르게 힘이 빠져 버렸다.
그는 어쩌면 아버지에게 이렇게 못되게 굴었으니 그녀가 자신을 비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발레리안의 상상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었다.
아,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