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92화 (92/111)

92.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3)

원로들은 물론, 아테니아 또한 갑작스러운 선대 대공의 등장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선대 전하…?”

가신들은 선선대 대공과 선대 대공의 호칭이 헷갈릴 수 있으니, 선대 대공은 선대 전하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카마시얼 백작이 자신도 모르게 선대 대공이 맞는지 확인하듯 그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선대 대공은 은퇴한 이후 단 한 번도 대공가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대 대공은 자신이 대공 자리에 있을 때조차도 최소한의 일만 처리할 뿐 그 자리가 싫다는 티를 숨긴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대다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대공비의 편을 들고 나섰으니, 다들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대 전하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카마시얼 백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선대 대공에게 눈치를 주었다.

“저희는 대공비 전하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대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중요한 이야기에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고 평소처럼 돌아가서 성의 서편에 얌전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평소라면, 누군가와 부딪히는 것을 싫어하는 선대 대공은 이것만으로도 원로들과의 마찰을 피했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선대 대공이 그들의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빈켄티우스의 성 내에서 내가 어디를 가고 말고 할지는 카마시얼 원로,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닐 텐데?”

카마시얼 백작의 입이 당황으로 꾹 닫혔다.

정말이지, 선대 대공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그가 후계자일 적이나 대공이었던 시절에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러니 백작이 어쩔 줄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원로들을 대표한 카마시얼 백작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킬레샤 원로. 그 서류들을 가져와.”

아테니아가 에킬레샤 자작을 똑바로 지목하여 명령했다.

아테니아가 막연하게 말했으면 몰라도, 자작을 지목한 이상 듣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이었다.

그래서 주춤주춤하던 에킬레샤 자작이 결국 카마시얼 백작의 손에서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백작도 자작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대공비와 선대 대공이 합세한 탓에 원로들 전체가 멈칫한 상황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렇듯이, 카마시얼 백작 또한 거기에 괜히 앞으로 나섰다가 그대로 혼자 찍히기는 싫었다.

그사이에 아테니아가 에킬레샤 자작의 손에서 증거들을 받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담담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테니아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증거들은 완벽했다.

누가 봐도 이번 사건의 범인은 아이레스였다.

마치, 누가 이미 완벽하게 모든 증거가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원로들에게 자료를 전달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보며 아테니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황태자는 이렇게 처음부터 아이레스를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황태자가 황제와 협의 없이 벌인 짓일 터였다.

이렇게 되면, 황가는 크리스나와도 완전히 틀어지는 셈이었다.

잘못하여 이 일로 인해 발레리안과 아테니아가 이혼하게 되면, 실책은 크리스나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빈켄티우스 가문의 영향력까지 생각하면 십중팔구 대운하 사업은 빈켄티우스로 넘어갈 게 뻔하다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을 황제가 바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어리석게도 황태자가 철저히 제 치기로 인하여 오직 발레리안만을 공격하려고 한 행동이었다.

정말, 한 나라의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멍청하고 멋대로여도 괜찮은 것인가.

아테니아는 속으로 재차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건… 렉산드라에게는 누구보다 기회였다.

아테니아가 렉산드라에게 제안했던 거래의 대가를 받을 때가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는데, 일이 교묘하게 돌아갔다.

“이 일은 내가 일주일 안으로 해결책을 강구하여 말해 주지.”

아테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마시얼 백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 이미 터졌는데, 대공비 전하께서 지금 당장 무언가 책임이라도 져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책임이라면?”

“흠흠, 그러니까….”

“왜, 내가 대공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은가?”

“끄… 끌어내리다니요, 다들 오해하겠습니다. 왜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카마시얼 백작이 황급히 아테니아의 말을 부정했다.

그들은 그녀를 끌어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테니아가 자발적으로 대공비 자리에서 물러나 주기를 바랐지.

왜냐하면, 그들이 그녀를 끌어내릴 경우 많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테니아가 픽, 웃었다.

그녀가 괜히 선선대 대공에게 자신을 원로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선대 대공이 직접 원로들의 앞에서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원로들이 직접 끌어내린다는 건 선선대 대공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아테니아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려던 발레리안이 마음을 바꾸게 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를 끌어내리면 그가 원로들과 반목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선선대 대공까지 원로들의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북부의 절대적인 주인 가문과 그 가신들이 부딪히면, 누가 이길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원로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워서, 아테니아가 못 견디고 직접 대공비 자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게 최고의 방법인 셈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마치, 그대들이 대책을 세워 빈켄티우스가 입을 손해를 줄이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어 보여서 말이야.”

“저희 뜻을 그런 식으로 곡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대공비 전하!”

카마시얼 백작이 자신은 떳떳하다는 듯 일부러 더욱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대공비의 말이 맞아 보인다만.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잘못 보았다 이건가?”

그러나 선대 대공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카마시얼 백작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아테니아 혼자 그러면 몰라도, 선대 대공까지 그녀의 말이 옳다는데 백작이 반박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칫하면 아테니아가 아니라, 빈켄티우스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거처럼 비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내가 분명 일주일이라고 했네. 또 다른 대답이 필요한가?”

그것은 이제 그만 대공성에서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그들의 대표인 카마시얼 백작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자, 다른 원로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뒤에서 웅성웅성했다.

그사이에, 아테니아의 눈짓에 하인들이 닫혀 있던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그럼, 잘들 가게.”

결국, 원로들은 아테니아에 의해 그대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가신 후… 아테니아가 선대 대공을 돌아봤다.

“빈켄티우스 전하.”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은근슬쩍 조용히 돌아가려던 선대 대공이 멈칫했다.

그가 어색한 태도로 아테니아를 돌아봤다.

“아…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대공비.”

원로들의 앞에서 나름 멋있게 아테니아의 편을 들었던 것과 달리, 선대 대공은 말을 더듬으며 그녀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치 그 모습이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아테니아는 그 태도를 개의치 않고 선대 대공에게로 다가갔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제 응접실로 가시죠.”

대공 자리에서 물러나 성의 서편에서 숨죽이고 사는 선대 대공에서 어떤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아테니아는 선대 대공에게 자신과 대화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를 주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대 대공이 이것을 기분 나빠 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선대 대공이 왜 자신을 도왔는지 알 만했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러자꾸나, 대공비.”

아테니아의 예상대로, 잠시 머뭇거리던 선대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시녀들에게 발레리안에게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전하라 한 후 선대 대공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

시녀가 아테니아와 선대 대공 앞에 차를 두고 나간 이후, 문이 굳게 닫히자 그제야 아테니아가 말문을 열었다.

“빈켄티우스 전하께서는 리안에게 잘못한 일을 보상하고 싶으신 겁니까?”

대뜸 본론으로 들어가는 아테니아의 행동에 선대 대공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남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구는 것이 누군가 보기에는 대단히 되바라지게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선대 대공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상, 자신도 선대 대공을 시아버지로서 제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선대 대공과의 관계보다 발레리안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니까.”

선대 대공의 고개가 아래로 기울어졌다.

아테니아의 말이 맞았다.

그가 괜히 처음 보는 그녀를 마중 나오고, 그녀의 편을 들어 주겠는가.

그래, 선대 대공은 인제 와서 어떻게든 발레리안의 유년 시절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그가 제 아내를 잃고 나서, 아내가 둘째를 낳아야 했던 것을 몸이 약한 첫째 아들의 탓으로 돌렸던 일을.

발레리안이 자라는 동안 선선대 대공에게서 보호해 주지 못했던 일을.

제가 아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서 발레리안에게 어머니를 잃게 만들었던 일을.

그 모든 걸 보상해 주고 싶었다.

그간은 발레리안이 홀로 잘했기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보상해 줄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

아테니아가 그 점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선대 대공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빈켄티우스 전하, 순서가 틀리셨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