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2)
“…아버지, 왜 아이레스는 결혼식에 오지 않은 거죠?”
아테니아는 제 남동생이 어떤 인간 부류를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빈켄티우스의 결혼식만큼 권력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도 드물었다.
그런 곳에 권력자들과 친해지지 못해 안달이 난 아이레스가 오질 않다니.
솔직히 이상한 일이었다.
“…너 설마, 아이레스를 의심하는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 남동생을 의심해!”
크리스나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애는 네 동생이야, 아테니아!”
그러나 아테니아에게 아버지의 분노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반박했다.
“그 애가 사교계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세요. 갤랑스 백작 영식, 후이안 자작 영식, 로이아만 후작 영식 등… 그 외에도 모두, 가문이 제법 힘을 가진 사람들뿐이에요. 그뿐인 줄 아세요?”
솔직히 말해서,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한다지만 크리스나 백작은 늘 도를 넘었다.
아테니아는 자신이 그래도 덜 차별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별에 덜하고 더하고는 있을 수 없으며, 그래 봤자 차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 지금은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아버지가 선택하신 후계자니 아이레스에게도 상단주로서의 장점이 있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객관적으로 말하건대, 아이레스는 여러모로 상단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레스가 왜 상단 사람들한테 인기가 없게요. 장부도 볼 줄 몰라서요? 아니요. 그런 건 배우면 되죠.”
아이레스는 아테니아보다도 상단 사람들과 데면데면했다.
솔직히, 상단 사람들의 입장에서 언제가 상단을 물려받을 아이레스와 친해져서 나쁠 게 없었다.
능력이야 그들이 있으니, 모르는 것쯤이야 가르치면 될 일이 아니던가.
상단 사람들은 대대로 크리스나 백작가와 일해 온 이들이 많기 때문에, 상단에 대한 충성도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그들도 웬만하면 아이레스를 배척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이레스가 철저히 그들을 제 아랫사람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다들 그 애를 좋아할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고용 관계라지만, 상단 사람들은 고용인 전에 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이레스는 그들을 마치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처럼 대했다.
자신이 없어도 얼마든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오래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인정 욕구는 인간에게 있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니까.
“아이레스는 사람보다 권력을 좋아해요. 그런데 권력자들이 모인 자리에 굳이 오지 않았다면, 그 애가 이미 만족스러운 권력을 잡았을 확률이 더 높죠.”
아이레스의 단점을 조목조목 짚어 내는 아테니아의 말에 크리스나 백작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백작은 제 딸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아이레스는 자신이 고른 후계자였으니까.
크리스나 백작은 자신의 후계자에게 그런 결함들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넌 대체 가족을 무엇으로 보는 거냐, 아테니아! 아이레스는 내 아들이고 네 동생이다. 넌 그런 애를 지금 증거도 없이 모함하고 있는 거야!”
크리스나 백작의 외침에 아테니아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을 모면하고, 마치 바른 말을 한 그녀가 전적으로 너무한 사람처럼 몰아가는 것은.
“전적이 있는 사람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럼, 아이레스가 클라이브와 손잡고 상단의 돈을 빼돌렸던 일은 아버지 아들이라서 그랬나 봐요?”
“아테니아!!!”
정곡을 찔린 사람은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딱 그랬다.
그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자, 발레리안이 나섰다.
“자중하십시오, 크리스나 백작.”
존댓말이되, 하대가 섞인 존대였다.
그건 일종의 경고였다.
그러자 크리스나 백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면서도 애써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테니아는 아이레스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황태자 전하의 손을 들어 주신 걸 보면, 황태자 전하의 손에 확실한 패가 있기 때문이겠죠. 거기에 아이레스만큼 걸맞은 인물이 있을까요?”
황제는 제 아들이 발레리안에게 모욕을 당해도 함부로 나서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황제가 황태자의 무엇을 보고 이렇게 발레리안과 정면으로 맞서는 행동을 허락했단 말인가.
“여기서 아버지와 굳이 말다툼을 할 필요도 없겠죠. 어차피, 아이레스가 맞는지 아닌지 조사만 하면 끝날 일이니까.”
아테니아는 아마도 아이레스의 소행이 맞으리라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고 당당했다.
“만약 아니라면, 제가 의심했던 사실을 아이레스에게 모두 밝히고 그 애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하겠어요.”
“두고 봐라. 넌 네 동생을 믿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크리스나 백작이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말했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은 곧바로 자신의 수하에게 아이레스의 그간 행적을 조사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테니아와 크리스나 백작 중 그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
해가 다 저물고 식사가 끝난 저녁이었다.
손님이 찾아들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않은 그런 늦은 저녁.
그런 시간에, 대공성은 돌연 시끄러워졌다.
왜냐하면, 돌연 원로들이 떼를 지어 대공성에 몰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원로님들…!”
“돌아가셔서 대공 전하께 허락을 맡으신 뒤에 오셔야…!”
그리하여 고용인들이 그런 원로들을 자중시키느라 대공성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 소란에 아테니아가 2층 계단을 내려왔다.
발레리안과 크리스나 백작은 대운하 사업에 관한 일을 처리하느라 식사조차 집무실에서 할 만큼 바쁜 탓이었다.
분명, 이 상황에서 대뜸 쳐들어오는 무례를 저지른 것은 원로들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는 혼자서도 충분히 그들을 되돌려 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마침 잘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보이자마자, 그녀가 1층에 내려서기도 전에 원로들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카마시얼 백작이 대표로 나서서 입을 떼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이번에 대운하 사업에 문제가 생긴 것이 대공비 전하의 동생인 아이레스 크리스나 영식 탓이라는데, 여기 적힌 내용들이 사실입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레스가 정보를 유출한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지 하루 만에 원로들이 증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제미니, 저걸 가져와 보렴.”
아테니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제 시녀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원로 중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대공비 전하께서 이 증거를 어떻게 하실 줄 알고 저희가 순순히 넘겨드린답니까?”
그 말에 증거 서류들을 받으러 내려갔던 제미니는 물론 아테니아까지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아테니아가 증거 인멸을 위해 창피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담긴 말은 더없이 모욕적이었다.
2층 층계의 난간을 쥔 아테니아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테니아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지금 기세로 그들에게 밀리면 정말로 속절없이 말려들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주인에게 마땅한 설명도 없이 쳐들어온 것이니, 성의 기사들을 불러 끌어내야겠군.”
아테니아가 더 이상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순간 휙 돌아서 집사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가 이토록 강경하게 나올 줄 몰랐던 원로들이 순간 당황하여 소리쳤다.
“지, 지금 대공비 전하께서 그렇게 당황하실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대공비께서는 당장 상황 설명을…!”
“그대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아테니아가 원로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대공비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위치를 잊은 건 오히려 그대들 같군.”
원로들은 아테니아가 어리다고 그녀를 얕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1년을 산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크리스나 백작가에서도 유약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안주인 노릇을 도맡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테니아는 가문의 가신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 집에 쳐들어온 자들을 내가 쫓아내겠다는데, 그대들이 뭐라고 토를 단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현 상황에서 아테니아는 원로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설령 아테니아에게 따지고 싶었더라도, 그들은 정당한 절차를 밟아 그녀에게 트집 잡힐 만한 빌미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마 그들도 평소라면 이처럼 어리석게 굴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만, 선선대 대공 때문에 억지로 결혼에 찬성한 이후 원로들은 늘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을 터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를 몰아낼 거리를 찾자마자 인내심이 닳아 달려온 것이리라.
“그 증거라는 것, 가져올 텐가, 쫓겨날 텐가.”
아테니아가 원로들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어서 대공비의 말을 듣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돌연, 선대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