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1)
그래, 사실 아테니아도 알고 있었다.
발레리안이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 결혼의 시작은 1년 후의 끝이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레리안이 아이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순식간에 찬물을 맞은 듯이 차분해져 버렸다.
그 모든 점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한순간이나마 들떠 있었다.
철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발레리안과 결혼한 사실이 마냥 행복해서, 기뻐하고 말았다.
그만큼 그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아테니아는 자신이 그 1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모른 척 넘어가다 보면, 발레리안도 어쩌면 그런대로 끌려와 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도 자신을 사랑하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아테니아는 그 사실에 애써 침착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발레리안이 또 자신에게서 도망칠까 봐 그간 참아 왔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리안, 정말 나와 1년 뒤에 이혼할 셈인가요?”
아테니아의 시선은 한 치의 빈틈없이 발레리안을 향해 있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던지,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리가 이혼하면, 두 번 다시 우리라고 불리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아테니아는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냉정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발레리안, 당신과 내가 서로를 이렇게 마주 보는 일조차 저는 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건….”
순간, 발레리안이 크게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그가 자신의 말에 다른 의견을 내놓을 틈을 주지 않았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이혼해서 친구처럼 지내는 부부도 있긴 하겠죠.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했는데 어떻게 이혼 후 친구로 돌아가겠어요?”
아테니아의 말에 발레리안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사실… 가능하다면, 되도록 이혼 후에도 그녀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런데 아테니아는 지금, 발레리안에게 그조차 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셈이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데다가, 그녀의 태도가 워낙 단호하여 그의 말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 이혼하지 않을 생각으로 결혼한 거예요. 당신과 그렇게 얼굴 맞댈 일조차 없는 생판 남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아테니아는 굳어 있는 발레리안을 보며 제 말이 확실히 그를 흔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왜 이토록 결혼을 거부하는지, 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건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그녀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발레리안이 숨기고 싶어 하는 일들을 아테니아가 억지로 캐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밀려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요, 리안. 당신과 내가 행복해질 방법이 정말로 1년 뒤의 이혼밖에 답이 없는 건지.”
발레리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때, 그는 자신이 아테니아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자만했었다.
그러나 그녀와 재회한 순간, 발레리안은 자신이 두 번은 그렇게 살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아테니아는 방금 이혼하면 그들 사이에는 영원한 이별뿐이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그 말만으로도 그는 숨이 턱 막혀 왔다.
그저 막연히 혼자서 이혼하면 지금처럼 아테니아를 만나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것과 그녀의 입에서 훗날의 일이 실체화되는 것은 체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 발레리안은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더는 아테니아를 완전히 못 보면서 살 수는 없었다.
“오늘은 둘 다 피곤했을 테니 그냥 빨리 잠드는 걸로 해요. 아무리 우리가 그냥 잠만 잘 거라도, 지금 둘 중 하나가 이 방을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이 방에서 둘 중 하나가 나가 버리면, 다음 날 사교계에 곧바로 대공 부부 사이에 결혼하자마자 불화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 게 뻔했다.
그러니 어쨌든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잠을 함께 자야만 했다.
“내일 아침 시중은 내가 데려온 이들에게 맡겨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고요.”
다음날 침실 정리만 해도,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밤을 보냈느냐 아니냐는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공가로 오면서 이제는 하녀에서 시녀가 된 제 사람들에게 아침의 일을 맡겨 두었다.
“그러니까 이제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요.”
아테니아가 차분하게 일어나 발레리안에게 챙겨 두었던 편한 옷을 건네주었다.
그의 옷차림이 그녀를 신경 쓴 듯, 성장 차림은 아니었으나 잠자리에서는 영 불편할 옷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토록 예상 그대로인지.
그게 살짝 우습기도, 귀엽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발레리안은 폭탄 같은 발언들을 던져 두고 태연하게 구는 아테니아로 인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럼 난 씻고 나올게요.”
물론, 이미 아테니아나 발레리안 둘 모두 한 차례 씻고 온 터였다.
그렇지만 방금 와인을 마셨기 때문에, 입안에 잔여감이 남았기도 하고 얼굴에 열도 올라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가볍게 씻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완전히 휩쓸려 넋을 놓은 채 욕실 문을 바라봤다.
그 후, 발레리안은 결국 아테니아가 그의 등을 갈아입을 옷과 함께 떠밀 때까지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당연하게도, 발레리안은 지난밤 제대로 잠이 들지 못했다.
얇은 네글리제만을 입고 있는 아테니아의 몸이 한 침대에 누운지라 자꾸만 그에게 닿아 오니, 긴장된 탓이었다.
그에 반해 아테니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쏟아 낸 덕인지, 들떠서 긴장되었던 게 전부 풀려 말 그대로 꿀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공 부부는 상당히 상반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피곤해 보여요, 리안.”
아테니아가 슬쩍 발레리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그가 제 차림새를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네글리제 차림으로 잠이 든 것은, 그녀가 발레리안에게 부린 작은 심술이었다.
아무리 그가 왜 첫날밤을 보내지 않는지 알고 있다지만- 그래도 결혼한 새 신부가 갖는 기대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게 부풀다가 오븐을 잘못 열어서 푹 꺼져 버린 슈처럼 되어 버렸으니, 작은 심술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발레리안이 제대로 못 잔 얼굴을 애써 숨기며 식사했다.
아테니아는 본래 아침 식사를 잘 하지 않는지라, 가볍게 차만 마시거나 먹어도 샐러드만 먹고는 했다.
그러나 그는 기사였고 체구가 워낙 건장했던 탓에, 아침부터 고기를 먹어 줘야만 했다.
별것 아니지만, 그 상반된 식탁조차 왠지 아테니아에게는 재밌게 느껴져서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똑똑똑.
“대공 전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발레리안의 수하가 급하게 식당의 문을 노크해 왔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원래라면, 어제 막 결혼했기 때문에 일주일간은 두 사람 다 휴식기를 갖기로 한 터였다.
그나마도 보통의 귀족가는 보통 한 달간의 휴식기를 갖는데, 빈켄티우스에는 워낙 할 일이 많아 아주 최소한으로 책정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수하의 다급한 태도는 어떤 일이 벌어졌음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와라.”
순식간에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수하는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에게 간단한 인사를 올린 후 바로 보고에 들어갔다.
“큰일 났습니다, 대공 전하. 아무래도… 대운하 사업에 사용되는 건축 자재들이 유통되는 경로가 새어 나간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단번에 일주일간의 휴식기를 끝내 버리는 말이었다.
***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 가문이 손을 잡아 대운하 사업을 이어 가기로 하면서, 그들은 기존에 거래해 오던 대다수 거래처를 바꿨다.
왜냐하면, 칼스이턴에서 이미 대운하 사업에 자재를 대는 거래처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당연히 바꿀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면서 이전의 거래처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 주었다.
때문에, 대운하 사업은 돛을 단 배가 순풍까지 만난 듯이 빠르게 나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돌연, 문제가 발생했다.
유통 경로가 새어 나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재를 대는 거래처가 어디인지까지 외부에 흘러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누가 벌였는지는 너무나 선명했다.
왜냐하면 황실에서, 자재들의 유통 경로에 해당하는 지역들의 통행료를 인상하고 물품 거래에 관한 세금을 모조리 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거래처들을 압박하듯이, 오늘 아침 동시다발적으로 그곳들에 세무조사가 들어갔다.
결혼식을 치르느라 발레리안과 아테니아 모두 눈코 뜰 새 없던 사이, 황실이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발레리안과 아테니아, 그리고 지난 밤 결혼식 이후 바로 돌아가지 않았던 크리스나 백작은 모두 모여 황급히 회의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 일은 뭔가 이상해요. 황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황제 폐하의 허락을 맡으신 걸까요?”
아테니아가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했다.
통행료나 세금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세무 조사까지는 황태자가 독단적으로 나서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아테니아가 그날 본 황태자는 분명 제 아버지인 황제를 대단히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가 세무 조사까지 마음대로 명령했을 확률은 극도로 낮았다.
그러니까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황제를 납득시킬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황제의 명령이었거나.
그러나 어쨌든 두 가지 가능성 모두 황제를 설득해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였고, 바로 그게 이상한 점이었다.
여태까지 황태자가 발레리안과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가만히 있던 황제가 왜 하필 발레리안을 가장 자극할 이 타이밍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황태자 전하께 무언가, 이 대운하 사업을 망치거나 빼앗을 확실한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야….”
아테니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