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남다른 그녀 (7)
황녀는 아테니아와 나이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황립 아카데미를 다녔다.
황태자는 일찍이 황태자의 자리에 올라, 황궁에서 제왕학을 교육받았으나 황녀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본래가 상대의 특성을 잘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도서관에서 주로 보시던 책들, 가정학 하나만을 전공으로 하셨던 것과 달리… 통치학과 경제학, 외교학 등 다양하셨잖아요?”
아테니아가 기억을 떠올려 말을 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남들이 도서관에 잘 없을 시간대만 노려서 읽고 계셨죠.”
가정학에서 높은 성적을 받으면서 경제학을 원하는 만큼 공부하기 위해서 아테니아는 공부에 상당한 시간을 쏟아야만 했다.
그런 그녀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시간에도 도서관에 남아 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때부터 황녀 전하께서 황위를 노리고 계신 게 아닌가 했거든요.”
렉산드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제 행보를 모르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들켰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가 읽던 책들의 겉표지는 모두 소설 종류였어요. 그런데 내가 읽던 책이 뭔지 알아차렸다고요?”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남들의 눈에 띌까 봐, 렉산드라는 어머니인 황비 가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읽을 책들의 겉표지를 모조리 바꿔 놓았다.
게다가 도서관의 사서 중 한 명을 매수하여, 다 읽은 후에 그 책들은 당연히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테니아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읽던 책들의 서가 번호와 똑같은 번호를 가진 책들이 버젓이 다른 제목으로 존재하더라고요.”
도서관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아테니아는 사서와 친했다.
그래서 종종 사서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녀는 그때 보게 되었다.
황녀가 읽고 있는 책의 서가 번호와, 지금 자신이 정리하고 있는 책의 서가 번호가 같다는 것을.
“그래서 알았어요. 황녀 전하께서 읽는 책들은 무언가 숨겨야 하는 거구나, 하고.”
렉산드라가 괜스레 반박했다.
“그 책들이 그대가 짐작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냥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책이거나 그럴 수도 있는 것을….”
“외부에서 들여와도 되는 책이었다면, 황녀 전하께서 굳이 도서관에서 읽지 않으셨겠지요.”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 통치학이나 경제학, 외교학 등의 책을 들여왔다면 분명히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터였다.
황제는 아닌 척해도 늘, 자신이 배신한 황비의 가문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비가 힘을 썼어도, 황제의 감시에 걸렸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들킬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렉산드라가 굳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야만 했다는 것은, 그 책을 개인적으로 구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아테니아의 정확한 지적에 렉산드라의 입이 완전히 다물렸다.
사회로 진출하는 여자들이 늘어나기는 했어도, 제국은 여전히 여자들에게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런 것은 귀족 사회로 갈수록 더하여, 여전히 귀부인들은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렉산드라는 무의식적으로 아테니아 또한 그저 그런 귀부인일 거라고 여겼다.
렉산드라는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옛 기억들이 있었기에 실례되는 걸 알지만 대공비가 되기로 하면서, 옛날에 사교계에서 돌던 소문을 조금 수소문했답니다.”
어쨌든 사교계에서 돌던 소문이 있었으니, 옛날 일이었어도 결국 아테니아가 알게 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것을 통해 이 모든 결론에 도달했다는 이야기였다.
렉산드라가 완전히 졌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대공비 전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건 뭡니까?”
마침내 렉산드라에게서 떨어진 말에, 아테니아가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테니아는 상인의 딸이었다.
그렇게 상인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그녀는 셈에 능했다.
그래서 아테니아가 처음부터 황녀에게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을 이쪽에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이 훨씬 제게 더 큰 이득을 불러올 방법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이제 상황은 완벽히 아테니아가 원하는 대로 흘러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거래를 할 타이밍이었다.
***
황녀와의 거래도, 피로연도 완벽히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신혼부부로서 첫날밤을 보내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제국의 전통대로 먼저 부부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떨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탓이었다.
물론, 아테니아는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기에 첫날밤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떨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남들 다 지내는 첫날밤인데 왜 이렇게 떨리지.”
아테니아가 괜스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중얼거렸다.
심장이 하도 쿵쾅거려서, 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발레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그녀는 문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신혼부부의 분위기를 띄워 주기 위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와인이라도 마실까?”
긴장을 푸는 데는 술이 최고라고 했다.
아테니아가 홀린 듯 와인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와인을 따르기 전,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아니지, 마시고 취하면 안 되니까.”
아테니아가 와인병을 도로 내려놓았다.
하도 긴장되고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라서 절주를 할 자신이 없었다.
첫날밤을 술만 잔뜩 마신 고주망태의 상태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조심히 침대에 앉았다.
그때, 의외의 소리가 아테니아의 긴장을 깨 버렸다.
똑똑똑.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아테니아는 그 상대가 시녀인 줄 알았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발레리안의 목소리였다.
“…테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 방의 주인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었다.
그러니 그는 굳이 노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문을 두드린 것은 안에 있는 그녀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아테니아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아테니아와 눈이 마주친 발레리안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왜냐하면 아테니아가 얇은 네글리제 하나만을 입고 있는 탓에, 그녀의 몸이 그리는 곡선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리안?”
문을 열어 줬는데도 멈춰 버린 것처럼 그대로 서 있는 발레리안에 아테니아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아… 안으로, 들어가죠, 테나.”
그녀의 목소리에 그제야 발레리안이 얼었다가 풀려난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이런 아테니아의 모습을 볼세라, 그는 안으로 들어선 후 재빠르게 방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자고 해 놓고 발레리안은 정작 문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풋.”
그런 발레리안을 보던 아테니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도 내내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도 만만치 않게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계속 문가에만 서 있을 거예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문이 열리고 눈이 마주친 이후로 계속 그녀를 못 쳐다보고 있던 발레리안의 시선이 아테니아와 맞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테나, 옷이….”
발레리안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네글리제가 워낙 얇은 재질의 옷인 탓에, 아테니아가 조금씩만 움직여도 네글리제에 가려진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탓에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발레리안이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그녀는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와 완전히 긴장이 풀려 버렸다.
“리안, 우리 와인이라도 마실래요?”
평소 담대하게 굴던 발레리안과 달리, 그는 그녀의 손을 맞잡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게 발레리안에게 어울리는 소리인가, 순간 고민했으나 아테니아는 지금의 그가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원래는 마시지 말자고 생각했던 와인을 따라 발레리안에게 건넨 것도 좀처럼 긴장을 풀 줄 모르는 그를 위해서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테니아에게서 와인잔을 받아 들었다.
짠.
그녀가 제 잔을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치며 말했다.
“우리의 행복한 결혼을 위하여.”
그 말에 발레리안이 움찔했다.
1년 뒤에 끝내기로 한, 유예 기간이 있는 결혼이었으니 어쩌면 오늘 아테니아가 한 축사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그를 모른 척했다.
아테니아는 절대로, 이 결혼을 1년만 유지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한 잔, 두 잔, 그녀와 발레리안의 잔이 비워졌다.
그렇게 적당한 취기가 돌았을 때, 아테니아가 잔을 내려놓았다.
더 마시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어째서인지 한참을 더 와인을 마셨다.
그녀는 그게 아직 그가 긴장이 덜 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와인 한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도, 발레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리안?”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레 발레리안을 불렀다.
술을 마시는 동안, 어쩐지 그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든 발레리안이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테나, 우리 아무래도… 부부간의 관계는 갖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