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남다른 그녀 (5)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를 원로들에게 소개해 주기로 했던 일은 매끄럽게 끝이 났다.
본래 빈켄티우스에서 발레리안의 짝으로 점찍었던 루이앙스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크리스나 백작 영애라는 것만으로도 원로들을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와중에 선선대 대공의 갑작스러운 원로들 소집과, 아테니아에게 우호적인 그의 태도는 원로들을 공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이미 선대 대공이 그녀를 직접 마중 나온 일은 빈켄티우스 가문의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발레리안과 선대 대공 그리고 선선대 대공까지 모두 아테니아를 대공비로 들이길 원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니 원로들이 이 결혼을 반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하여 본래라면 까다로워야 했을 원로들의 인정조차 아테니아는 쉽게 받아 냈다.
당장 결혼식에서 원로들이 다른 말을 할 일은 미연에 방지해 둔 셈이었다.
물론, 원로들이 나중에 가서 이 결혼에 대해 딴말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미 동의했던 일을 번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오늘날의 대면이 원로들의 발목을 붙잡아 줄 터였다.
아테니아는 현재 그것이면 만족했다.
그리하여 그녀와 발레리안의 결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애초에 크리스나와 빈켄티우스에 넘치는 것이 재화였으니, 일이 늦어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황태자에게 발레리안이 이미 오래전에 청혼을 해 둔 것처럼 굴었으므로, 결혼식이 늦어지면 아무래도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아테니아는 수많은 웨딩드레스도 입어 봐야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 많은 고생을 한 탓에 살이 빠져 맞지 않는 드레스가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드레스를 주문할 수 있었다.
물론 드레스 제작에 보통은 몇 달이 걸리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무려 빈켄티우스의 결혼식이었다.
대충 만든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시간의 문제는 역시나 돈으로 모두 해결을 보았다.
그렇게 하여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은 후딱후딱 흘러갔다.
눈코 뜰 새도 없이 준비를 서두르다 보니, 어느덧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결혼식 당일이 되어 있었다.
“…예쁘구나, 내 딸.”
신부 대기실에 있는 아테니아를 보며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눈물을 훔쳤다.
그간 제 딸이 겪어 온 고생을 생각하니, 지금의 순간이 더욱 벅차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어머니, 화장 번져요.”
아테니아는 괜스레 장난스레 말하며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네가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여서… 정말이지, 나는 안도했단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말했다.
오늘,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은 아테니아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일전에는 칼스이턴 가문의 품위에 맞게 조신해야 한다고 강요를 받았던 터라, 아테니아는 목 끝과 손목까지 모두 가리는 드레스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결혼식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싶은 소망은 아테니아에게도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 그녀는 파인 등 라인과 가슴선을 따라, 거기서부터 은사로 수놓은 자수와 자잘한 다이아몬드들이 굽이굽이 얽혀 내려온 머메이드라인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더불어 길게 늘어지는 트레이는 겹겹이 망사와 장인들이 손수 짠 레이스로 이루어져, 걸을 때마다 그것만으로도 예뻐 보였다.
무엇보다, 드레스도 아름다웠지만 꼭 아테니아가 원하는 드레스 입게 해 주겠다며 북부의 장인이란 장인은 모조리 불러 모은 발레리안의 노력이 더없이 기뻤다.
그는 매번 그녀에게 진짜로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줬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테나, 내 딸… 네가 진심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구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조심스레 아테니아를 껴안았다.
좋지 않은 결말을 겪으면, 사람은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그런데도 제 딸이 이렇듯 다시 행복을 위해 시도를 하는 것이 대견하게만 느껴졌다.
“오래, 오래 행복하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아테니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순간 발레리안과 자신 사이에 놓인 1년이라는 시간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그깟 1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잘 살게요, 엄마.”
그래서 아테니아는 확답했다.
그녀는 절대로 발레리안과의 계약대로 할 생각 따위 없었다.
***
빈켄티우스의 결혼식인 만큼, 누군가 황족을 대표하여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발레리안을 찾아온 사람은 의외이기도, 혹은 예상이 가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황녀, 렉산드라가 황실의 선물을 잔뜩 들고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결혼을 축하해 주러 북부를 찾았다.
그런 식으로 아테니아에게 청혼하는 바람에, 황태자는 뭣도 모르고 사촌의 사람을 탐한 이가 되어 버렸으니 사실 그가 북부를 찾아오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렇다고 황제나 황후, 황비가 움직일 수도 없었으니 황녀가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였던 것은 렉산드라가 좀처럼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발레리안이 내민 렉산드라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했다.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 작은 쪽지가 하나 잡혔다.
발레리안은 조금도 멈칫하지 않고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손이 떨어지는 순간 제 소맷자락 안으로 숨겼다.
역시나, 굳이 외부 활동을 하지 않던 황녀가 북부까지 찾아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던 모양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그러면 이따 피로연에서 뵙죠.”
렉산드라는 발레리안에게 쪽지를 전달한 이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배치된 황족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는 적어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점에서는 황녀가 황태자보다 훨씬 나은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도 북부의 주인인 빈켄티우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랑과 신부가 입장할 때가 되었다.
클레르폰 제국에는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풍습이 있었는데,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때 각자의 어머니와 함께 입장하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안주인의 역할이 강조되어 왔던 제국에서, 아이들을 키워 내는 데 안주인의 공로가 더 크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생겨난 풍조였다.
그러면서도 신랑이 신부보다 먼저 입장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같았는데, 선대 대공비가 타계한 까닭에 결국 발레리안과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 부인을 가운데 두고 함께 입장하게 되었다.
“꼭 함께 행복하길 빌어요.”
주례의 앞까지 도달한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양쪽에 잡고 있던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손을 이어 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크리스나 백작은 나란히 앉은 백작 부인에게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고 싶은 모양새였으나, 그녀는 제 딸과 사위를 바라볼 뿐 남편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그 내내, 발레리안과 아테니아는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주례사가 끝나고 맹세의 키스를 나누는 순간이 왔을 때… 두 사람의 입술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서로를 더없이 사랑하는 것이 퐁퐁 드러나는 예쁜 신혼부부였다.
***
피로연이 시작되기 전, 아테니아는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기 위해 방에 들어와 시중받고 있었다.
똑똑똑.
“테나,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막 아테니아가 나가려던 찰나, 발레리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다 갈아입었어요. 들어와요.”
아테니아가 시녀들에게 손짓하여 문을 열어 주자, 발레리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시녀들에게 손짓하여 그들을 내보낸 후, 아테니아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아까 렉산드라에게 받았던 것이었다.
“결혼식 전, 손님들을 맞이할 때 황녀에게 받았던 겁니다.”
발레리안의 설명에 아테니아가 그것을 받아 들어 펼쳤다.
거기에는 짤막한 말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내 오라버니에게 했던 말, 지금도 유효한가요?』
아테니아가 의아함을 참지 않고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아마도 제가 황태자와 공식적으로 다투었던 날… 황위 계승권자는 하나가 아니라고 한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테니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그녀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 전부이다 보니, 발레리안과 황태자가 어떤 대화를 나누며 다투었는지까지는 속속들이 알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황태자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모두 입단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아니고서야, 다른 이들이 아는 것은 빈켄티우스 대공과 황태자가 크게 다투었더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두 남자가 그런 대화를 나누었을 줄이야.
그러나 그녀는 곧 놀람을 추슬렀다.
“하긴, 빈켄티우스 가문의 지지가 있으면 꼭 황태자 전하가 아니어도 되겠죠.”
황위에 관한 말을 꺼낸 사람이 발레리안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실행시킬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녀 전하께서 대화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건, 황태자 전하 주변에 이미 세작들을 심어 두셨다는 의미겠네요.”
아테니아가 작게 감탄하며 말했다.
황태자가 귀족들을 입단속시켰음에도 그 자리에 없던 황녀의 귀에는 정확히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들어갔다.
이 정도로 정확하려면, 황태자의 지척에 있던 사람이었을 터.
그렇다면 황녀가 정말로 황태자에게 꽤 가까운 사람을 세작으로 두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자신에게 이 쪽지를 남들 몰래 가져온 이유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피로연 때 내가 황녀 전하와 어떤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는 거죠, 리안?”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곧바로 발레리안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