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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86화 (86/111)

86. 남다른 그녀 (4)

다음날, 아테니아는 북부로 가는 길에 올랐다.

왜냐하면 그녀가 북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테나, 정말 괜찮겠어요?”

발레리안은 함께 마차에 올라 북부로 가는 순간까지도 다시 한번 생각하라는 듯 그녀에게 몇 번이고 재차 의사를 물었다.

“꼭 북부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돼요. 또, 결혼하고 나서 테나가 수도에 있길 바란다면 그래도 되고….”

“리안, 저는 북부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요.”

그러나 아테니아는 제 뜻을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며칠을 마차를 달린 끝에, 두 사람은 북부에 도착하게 되었다.

“귀환하시는 길은 편안하셨는지요, 대공 전하.”

“어서 오십시오, 크리스나 백작 영애.”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와 시녀장이 각 잡힌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대공가의 성은 수도에 있는 타운하우스와는 사뭇 달랐다.

거기는 그래도 제법 사람 사는 것 같았다면… 여기는 마치, 어딘지 모르게 명화와 골동품들이 있는 커다란 전시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친 하루를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집의 느낌이 들지 않는 삭막한 곳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2층의 층계를 통하여 누군가가 내려오자마자 고용인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는 그쪽으로 모조리 고개를 숙이는 고용인들과 발레리안의 말을 통해 금방 알 수 있었다.

“선대 대공께서 웬일로 방 밖으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발레리안이 선대 대공, 즉 그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발레리안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은 날이 첨예하게 서 있었다.

“빈켄티우스 전하를 뵙습니다.”

아테니아가 황급히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빈켄티우스 가문을 대대로 모셔 온 수족들이 가득한 곳이었으니, 존경하든 안 하든 굳이 밉보일 것이 아닌 이상 경이 아니라 전하라는 호칭을 쓰는 게 맞았다.

발레리안의 뾰족한 어조에 흠칫한 선대 대공이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게, 대공비. 나는 그저… 대공비가 온다길래, 내가 마중이라도 나올까 하여.”

선대 대공의 첫인상은 발레리안의 말대로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차마 제 아들을 쳐다보지 못하는 그 시선과 어쩔 줄 모르겠는 듯 가만히 두지 못하는 손이 그러했다.

“…갑자기요.”

발레리안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선대 대공에게 당장 날카로운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어쨌든, 선대 대공이 아테니아를 마중 나온 일은 그녀에게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에서 잘 나오지 않던 선대 대공이 굳이 현관문 앞까지 나타나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아테니아를 대공비라고 미리 인정해 준 셈이었다.

위계질서를 엄격하게 따지는 빈켄티우스에서 그녀가 입지를 다지는 첫걸음으로 꽤 좋은 방법이었다.

“…갑작스러웠다니,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하구나. 대공비도 피곤한 사람을 내가 괜히 붙잡아 두었다면 미안하네.”

선대 대공은 더욱 움츠러든 채로 한발 늦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럴수록 발레리안은 속이 답답해졌다.

갑자기 선대 대공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두 남자 사이 기묘한 분위기가 돌았다.

발레리안도 처음 겪는 것 같은 상황에서, 아테니아도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테니아가 꺼낼 수 있는 말은 선대 대공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 한도의 대답뿐이었다.

그 후로 한참 세 사람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뒤로 물러난 것은 선대 대공이 먼저였다.

“…피곤할 텐데 이만 쉬렴. 방은 내가 미리 준비해 놨단다.”

그 말을 남긴 뒤, 선대 대공은 금방 내려왔던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다시 올랐다.

발레리안은 불쾌함이 가득한 낯을 애써 지운 채, 아테니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선대 대공과의 첫 만남이었다.

***

아테니아의 방은 대공의 방 바로 맞은편, 대공비가 써야 할 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며 발레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의 주춤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발레리안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리안?”

발레리안은 대공비의 방에 들어온 이후 굳은 채로 고개만 돌려 방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대 대공께서 어머니가 쓰시던 방에는 손도 못 대게 하셨거든요.”

선대 대공은 선대 대공비가 죽은 이후로 그녀의 유품을 단 하나도 정리하지 않고 모조리 보관해 두었다.

이것만큼은 선선대 대공조차 죽은 이를 끌어안고 뭐 하는 것이냐 타박하면서도 꺾지 못한 고집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발레리안의 방 맞은편은 언제나 굳게 잠겨 있었다.

선대 대공비가 죽은 이후, 그곳이 열리는 것은 하녀들이 청소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갈 때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의 물건은 단 하나도 보이질 않는군요. 가구부터 작은 장식품 그리고 벽지까지 싹 다 바꿨어요.”

선대 대공비의 방인 만큼, 이곳은 웬만한 저택의 방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었다.

그런 곳을 모조리 갈아 치우려면, 아마 상당한 기간이 걸렸을 터였다.

그러니까 최소한,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결혼이 확정되었던 그 시점보다 훨씬 더 이전이어야 했다는 말이다.

발레리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누누이 제 부인이 되었다는 죄 하나로 이딴 집안에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했다.

황태자가 벌인 일만 없었더라면, 단언컨대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 청혼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가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상황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이 언제, 어떻게 아테니아와 결혼하게 될 줄 알고 이런 것을 미리 준비하게 했단 말인가.

발레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대 대공이 자꾸 그녀와의 일에 왜 끼어드는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불쾌했다.

본디 서로 같은 성에 살아도 선대 대공은 성의 서편에. 발레리안은 성의 동편에 기거하며 서로 얼굴 한 번 마주하는 법 없이 살던 사이였다.

그런 주제에 갑자기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드니 불쾌한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발레리안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불쾌해했던 이유가 선대 대공의 뒤늦은 아버지 노릇에 있었음을.

“…아.”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속이 들끓는 것 같았다.

인제 와서 왜?

당신이 감히 뭐라고?

날 선 물음들이 발레리안의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화가 났다.

이런 얼굴을 아테니아에게 들키기 싫어서 애써 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는 좀처럼 처음 맞는 감정에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아,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싫었다.

이토록 싫을 수가 없었다.

“리안.”

아테니아가 순간 얼굴을 가린 발레리안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어두운 감정에 그대로 침식당했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그래도 돼요.”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손을 억지로 잡아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닿아 있는 그의 손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어머니가 저랑 화해하고자 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테니아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꺼냈다.

“왜, 진작에 이러지 않으셨을까.”

아테니아라고 해서 그간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행동이 서운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거짓말에 불과했다.

“솔직히 지금도 어머니를 보면 울컥거리는 감정에 원망을 내뱉고 싶어요. 빨리, 제 편에 서 주시지 그러셨냐고 따지고 싶어요.”

왜냐하면, 아테니아의 안에는 여전히 크리스나 백작 부인을 향한 원망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제야 발레리안이 손을 조금 내려 시선을 그녀와 마주했다.

여전히 제 입가는 가린 채로, 불안정해 보이는 시선이었지만 아테니아는 달래듯이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못 한 건… 그냥, 내가 더는 고립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아테니아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내보이는 속내였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백작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아테니아에게 사과한 이후, 모녀는 그저 괜찮은 듯 보였다.

그러나 사실, 한 번 생긴 상처가 어찌 그렇게 쉽게 아물겠는가.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그때 아버지를 완전히 잘라 낼 생각이었거든요. 제 편을 들어 줄 부모님 한 분도 없는 건 제가 너무 견디기 힘들 것 같았어요.”

누군가가 속도 없냐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바람피운 제 남편을 유치장에서 꺼내는 데 일언반구도 없던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테니아는 그런 어머니라도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제게 사과를 해 주었으니까.

그래서 그걸로 되었다고 애써 넘겼다.

“내가 어머니를 용서한 척하는 거조차, 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아주 느릿하게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니까 선대 대공께서 어떻게 변하셨든 간에… 리안, 당신의 용서는 필수가 아니에요.”

발레리안과 온전히 얼굴을 마주한 아테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그는 제 일그러진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졌다.

“테나, 저는….”

발레리안이 툭, 고개를 아테니아의 어깨에 기댔다.

그가 그녀보다 한참 키가 커 자세가 구부정해졌음에도 발레리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 당신이 없었으면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어떠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두려워졌다.

그녀를 놓기로 한 어느 날이, 너무 두려워졌다.

발레리안이 반사적으로 아테니아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그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밉습니다.”

발레리안이 아주 드물게 누군가에게 토해 낸 직설적인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진심 하나를 삼켜 냈다.

테나, 당신이 나를 영원토록 떠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그는 아버지를 향한 미움보다 더욱 강렬한 갈망을 애써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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