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남다른 그녀 (3)
발레리안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는 남들에게 이해받고자 한 적 따위 없었다.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해를 구걸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좋은 가문끼리 짝짓고자 하는 것은 모든 귀족 가문에서 하는 일이었다.
선선대 대공이 유별나다고 해도, 그를 대놓고 욕할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발레리안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은 심지어 선선대 대공에게 동조하는 원로들이었다.
그러니 발레리안이 어떻게 이해받기를 생각해 봤겠는가.
‘도련님, 왜 자꾸 문제를 일으키십니까.’
‘도련님께서 그러실수록 황녀 전하께서 난감해지시는 겁니다.’
‘도련님이 착하게 구셔야 대공 전하께서도 도련님을 예뻐하시지요.’
선선대 대공이 대공이던 시절, 발레리안은 툭 하면 제 어머니를 트집 잡는 할아버지가 무섭고 싫었다.
그래서 어린 발레리안이 엄마를 괴롭히는 할아버지에게 투정이라도 부릴라치면, 어김없이 주변에서 저런 말들이 날아왔다.
어린 날부터 그랬다.
선선대 대공에게 맞설수록 발레리안만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아테니아가 이해하겠다고 한다.
그녀가 그럴 수 있을까?
발레리안의 안에 학습된 의심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기에, 그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당신이 말하기 괴롭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그런 발레리안에게 안심하라는 듯, 아테니아가 말을 덧붙였다.
“내 이해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것도 포함되니까요.”
그리고 그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긴장해 있던 발레리안의 어깨에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아테니아의 시선은 오로지 그만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발레리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전혀 숨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사실, 제가 아버지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그 시선에 함락당하듯이, 발레리안이 돌연 말을 꺼냈다.
겨우 그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도, 그는 망설이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어디까지 아테니아에게 말을 해야 할까.
어디까지 해야, 그녀가 듣고 도망치지 않을 부분들까지만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이 발레리안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치 그런 그의 속내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에도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리안, 저는 아버지가 미워요.”
아테니아 역시도 상대가 발레리안이 아니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이런 제가 싫어졌나요?”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그럴 리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실제로, 당연하게도 그는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테나. 그대가 괜한 이유로 크리스나 백작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아무 이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저는….”
황급히 거기까지 말하던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아마도 방금 그가 한 말들이,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리라.
그녀가 어떤 이유도 말해 주지 않은 채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아테니아를 믿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사랑은 발레리안 혼자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가 급격히 침착해졌다.
조금의 용기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이 마침내 말을 이었다.
“할아버님께서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어요. 어머니께서… 선대 황후의 소생이 아니셨으니까요.”
황가의 사생아와 빈켄티우스 전 대공의 스캔들.
그건 이미 아테니아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녀의 세대에 있던 일이 아니기에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이었으니 스치듯 들은 적은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유약한 분이셨죠. 어머니와 결혼하려고 단식 투쟁을 하셨던 것이 아버지 생의 유일한 고집이셨을 만큼.”
아테니아가 침음을 삼켰다.
선선대 대공을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짧게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 성격을 유추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약한 아들이 처음 한 반항에 당황하여 억지로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고 해도, 선선대 대공이 절대 발레리안의 어머니를 곱게 대해 줬을 리가 없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어렵사리 결혼은 하셨지만, 할아버님은 툭하면 어머니를 혈통으로 트집 잡으셨고, 아버지는 기가 센 할아버님께 밀려 매번 어머니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셨죠.”
아테니아는 순간 어떤 말로 발레리안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큰소리를 치는 할아버지와 그로 인해 말 한마디 못 하고 숨죽인 채 사시는 어머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아버지.
어린 날, 그것을 고스란히 두고 봐야 했을 발레리안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제가 태어났는데… 하필, 몸이 약했어요.”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테니아가 입학하던 시절의 발레리안은 이미 검술, 체술 등 그 외의 모든 무술 수업에서 수석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님께서는 반쪽짜리 혈통이라, 반쪽짜리 빈켄티우스를 낳았다면서 어머니를 더욱 구박하셨고요.”
발레리안이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두었다.
죄책감이 그의 목을 조르며 달려들었다.
자신이 괜찮은 후계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늘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후 어머니는, 쓸모 있는 후계를 다시 낳으라는 할아버님의 압박에 그렇지 않아도 첫 번째 출산에서 난산이었던 탓에 이미 약해지신 몸으로 무리하여 두 번째 출산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고요.”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네가, 건강하게만 태어났어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저를 원망하던 아버지의 말을 발레리안은 아직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님을 무리하게 만든 제가 미우셨던 모양이고, 저 역시 어머니를 보호해 주지 못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죠. 그러다 보니….”
“리안.”
아테니아가 표정을 울 듯 일그러트린 채로 발레리안을 쳐다봤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려고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발레리안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는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뻔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생각을 부정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테나.”
순간 멈칫한 발레리안이 울 듯한 아테니아를 달래듯이 말했다.
솔직히 그도 자신이 무엇에 관하여 괜찮다고 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그저, 그녀가 울고 있기에 성급히 내뱉는 말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나 아테니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건 누구라도 괜찮을 수 없어요.”
반쪽짜리라니.
그건 손자가 아니라, 생판 남인 그 누구에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제 아버지는 아이레스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하세요. 그럼, 여자로 태어난 게 제 잘못인가요?”
어떤 성별로 태어나든, 그건 아테니아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여자든 남자든 성별만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정해지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렇기에 발레리안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리안도 마찬가지예요. 약하게 태어난 건 리안이나 어머님의 선택도 아니고, 또 약하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돼요.”
“테나 말이 옳아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발레리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히려, 울 듯한 얼굴의 아테니아를 달래는 데에 급급해 보였다.
그녀는 제 말이 발레리안이 가진 죄책감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누구도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기어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발레리안이 스스로가 자신이 겪은 불행에 일조했다고 굳게 믿게 될 때까지, 그 어린 소년을 아무도 보듬어 주지 않았다는 게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
“지금 당장 믿지 못해도 좋아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끌어안았다.
그는 아까와 달리 바짝 굳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 발레리안의 손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실로, 그 무엇도 발레리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준 사람이 여태껏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어떤 반응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누군가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부정해 주는 일.
그건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 집안의 일을 털어놓으면서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월이었으니까.
“제가 매일 말해 줄게요. 리안이 지금까지 듣지 못한 만큼, 매일, 매일.”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등을 쓰다듬었다.
울고 있는 것은 그녀면서,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안해요, 그대가 울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발레리안이 어정쩡하게 아테니아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녀가 우는데, 지금처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테니아의 말에 긍정하고, 자신은 괜찮다고 해도 도리어 그녀의 눈물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으니까.
“리안, 당신이 왜 미안해요.”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발레리안의 대답은 정답이 아니었던지, 아테니아는 더더욱 눈물을 쏟아 냈다.
어린 날, 아무도 당신에게 우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겠지.
그 생각이 드니 그녀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는 아테니아를 달래기 위해 마주 안은 발레리안의 품은 따뜻했다.
위로 한 번 받아 본 적 없으면서,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는지.
아테니아는 마음이 아려 온다는 게 무엇인지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게 된 기분이었다.
“힘들었을 텐데… 너무, 힘들었을 텐데… 버텨 줘서, 지금 여기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워요, 리안….”
아테니아는 울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부디 1년 뒤에도, 앞으로 평생,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