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8)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앞에 몸을 낮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지였다.
보석함도 없고, 마치… 딱 5년 전 유행했을 법한 그런 반지.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상단의 맏딸이었기에, 누구보다 유행에 민감했다.
그렇기에 반지가 언제쯤 유행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그녀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반지가 언제쯤 유행한 것인지 알아볼 리가 없었겠지만.
아마 그렇기에, 발레리안도 거기까지는 추측하지 못하고 이 반지를 아테니아에게 내민 것일 터였다.
“그래서 제대로 된 청혼도 하지 못했어요.”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 왼손을 달라는 듯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두 눈이 흔들렸다.
반지는 아테니아로 하여금 묘한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결혼할 생각이 쭉 없었다는 발레리안의 품에서 왜 준비된 듯이 반지가 나온 것일까?
그녀의 안에 의문이 치솟았다.
발레리안이 들고 있는 반지는 일반적인 것도 아니고, 그 세팅이 누가 봐도 청혼을 위한 반지였다.
5년 전에, 그가 반지를 줄 대상이라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당신은 왜 5년 전, 그 반지를 산 것인지.
또 당신은 왜, 5년이 지나도록 그 반지를 품고 다닌 것인지.
그러면서도 당신은 왜, 그에 관하여 내게 일언반구도 없던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아테니아를 의문으로 가득 채웠다.
“늦었지만… 제 청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테나?”
발레리안은 그런 아테니아의 속내도 모른 채로 말을 이었다.
아, 그 순간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 버렸다.
‘요란하지는 않아도…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미래를 약속하는, 그런 청혼이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아테니아가 어렸던 시절, 그리고 그녀가 제 부모를 아주 많이 사랑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발레리안이 하필 지금 이 순간, 아테니아에게 청혼한 이유였다.
그녀는 울컥하는 감정을 일순 다스릴 수 없었다.
아, 당신은 정말로 나에 관해 참 사소한 것 하나 잊지 않았구나.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울 것 같았다.
발레리안은 그녀뿐 아니라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을 제외한 그의 모든 것은, 늘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건 잔인한 희망 고문이었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 놓인 시간은 겨우 1년뿐이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테나?”
아테니아가 마치 울 듯한 모습이자, 발레리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아테니아도 발레리안이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도저히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아테니아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에게도 발레리안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쯤은 그녀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그 순간, 아테니아는 결심했다.
“…직접 끼워 줘요, 리안.”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
어쩌면 결혼하고 싶을 만큼.
“…고마워요, 테나.”
발레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미 그들의 결혼은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니아가 이 순간 청혼을 받아 준 것이 대단히 기쁜 듯이.
아, 그것을 거짓된 기쁨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울 듯 웃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사실은 결혼하고 싶은데도- 그런데도 발레리안이 자신을 밀어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아테니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 대하여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아테니아는 자신이 확신을 가진 일을 단 한 번도 이루어 내지 못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지금, 발레리안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완벽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그깟 1년이라는 기한 따위에 속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 생활을 겨우 1년으로 그칠 생각이 없어졌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그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가 찾아 없애면 그만이리라.
“우리… 행복해져요, 리안.”
발레리안이 반지를 끼워 준 그 손으로, 아테니아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당신과 행복해지리라.
앞으로, 영원히.
그녀가 다짐했다.
***
“그래, 결혼하기로 했다고.”
당연하게도, 수도 전역에 퍼진 소식은 선선대 대공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리하여 다음날, 선선대 대공과 발레리안 그리고 아테니아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예상외로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 자리를 만든 것이 아테니아이기 때문이다.
“네, 그래서 빈켄티우스 경께서 결혼 선물로 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아테니아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말했다.
그녀의 자세는 황후조차 어려워하던 그 선선대 대공의 앞에서조차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당당했다.
“…내게 뭔가 요구를 하겠다고?”
선선대 대공은 아테니아의 당돌함에 할 말을 잃은 듯 반문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 누가 그에게 감히 어떤 요구라는 것을 했겠는가.
“저와 발레리안의 결혼을 그토록 바라셨잖아요. 그러니 소소한 선물쯤은 해 주실 수 있지 않으신가요?”
아테니아가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그녀도 선선대 대공이 정말 진심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원하여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 아버지만 해도, 그토록 돈에 얽매여 살았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테니아에게 실망만 안겨 주지 않았던가.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절대 그것을 꺾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그토록 혈통에 얽매이던 선선대 대공이 어느 날 돌연 마음을 바꿨다는 걸 순진하게 믿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선선대 대공에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결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 상황에서 결혼이 틀어지면 아쉬운 것은 선선대 대공일진데, 자신이 무언가를 요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큼, 크흠, 흠, 무얼 바라기에 그러지?”
역시나.
선선대 대공은 못마땅한 듯이 몇 번 헛기침하면서도 결국 아테니아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 제 결혼식에서 빈켄티우스의 원로님들을 일부만 초대할 생각이에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테니아의 요구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선선대 대공이 따지듯이 물었다.
발레리안도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지, 조금 놀란 얼굴로 아테니아를 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 알았다.
그렇지만 원래 거래란, 맨 처음에는 가장 무리한 수를 던져 놓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아테니아가 노리는 상대들이 있었을 뿐.
“왜 말이 안 되는지 모르겠는걸요? 제 결혼식에 제가 원하지 않는 분들을 초대하지 않겠다는 것뿐인데요.”
아테니아가 소리 없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허… 너희 둘의 결혼식이, 오로지 너희 둘만을 위한 것인 줄 아느냐!”
선선대 대공이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거라!”
“왜!!!”
아테니아가 지지 않고 소리를 쳤다.
귀족 영애에게서 나오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우렁찬 소리에 놀란 선선대 대공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실례했어요. 전 또… 빈켄티우스 경께서 목소리 크면 이기는 줄 아시는 것 같길래요.”
부드럽게 웃은 아테니아가 열이 뻗친 듯 얼굴이 달아오른 선선대 대공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왜 우리 둘만을 위한 것이면 안 되는데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리안, 청첩장 제가 보내고 싶은 사람들한테만 보낼게요. 괜찮죠?”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테니아의 말에 잠시 두 눈을 깜박깜박하던 발레리안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한다는데, 안 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테나가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십시오.”
아테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선선대 대공을 바라봤다.
“보세요, 다른 당사자인 리안도 동의했네요. 이 이상 문제 될 게 있나요?”
아테니아가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문제 될 것이야 많았다.
귀족 가문의 경조사 자리는 단순히 그것을 축하하거나 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리의 주인공들에게는 애석하게도, 그곳은 귀족 가문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또 다른 사교장인 셈이었다.
초대 황제가 빈켄티우스에 북부의 전권을 위임하면서, 북부 귀족들의 작위 수여 여부도 빈켄티우스가 가지게 되었다.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 빈켄티우스에는 제법 높은 작위를 가진 가신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런데 거기에 무려, 일부지만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을 초대하지 않겠다니.
대놓고 관계를 틀어 버리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빈켄티우스 가문도 난감해지겠지만,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것은 선선대 대공이었다.
선선대 대공이 여전히 빈켄티우스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원로들의 굳건한 지지 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아테니아가 선별해서 원로들을 초대하겠다고 하면… 가장 먼저 제외될 원로들이 누구겠는가.
선선대 대공의 악다문 턱이 바르르 떨렸다.
아테니아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원로들을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와 발레리안이 정말로 원로들을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을 기세였다는 것이다.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말했고, 아테니아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선대 대공은 조급해졌다.
결국,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다른 선물을 주마. 무엇이든 줄 테니, 다른 걸 생각해 봐라.”
그게 바로 아테니아가 가장 바라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