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6)
황태자가 미친 짓을 한 순간, 발레리안은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황태자의 미친 짓을… 아주 여유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황태자의 이 짓거리를 허락한 것이다!
“하…!”
발레리안은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황제가 황태자의 행동을 용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크리스나라는 파이가 너무 커진 탓이었다.
현재, 제국의 무역은 거의 북부에서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크리스나가 향수 사업에 크게 성공하면서, 동방 대륙에서 크리스나 상단과 대규모의 향수 거래를 제안해 왔다고 했다.
게다가 크리스나가 빈켄티우스와 함께하기로 한 대운하 사업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크리스나가 투자한 것이 있다 보니, 대운하 사업의 수익을 크리스나가 좀 더 가져가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빈켄티우스에서 좀 더 이익 배분율을 강제로 조정할 수도 있었지만,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가문을 존중했기에 나온 결과였다.
그렇게 대운하 사업까지 성공에 이르면 크리스나는 빈켄티우스만큼은 아닐지라도, 현재 제국에서 손꼽는 다섯 상단 중 나머지 세 상단은 확실히 제칠 수 있었다.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상단.
과연, 황실이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현재 점차 황실의 자체적인 수입이 줄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농업 인구가 줄어들고, 상업 인구가 부쩍 늘어나면서 황실이 제국의 경제를 통제하던 시대는 끝이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황실에게 크리스나가 얼마나 대단한 먹잇감이었겠는가.
물론, 황제가 크리스나의 세 자식 중 아테니아를 고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우선, 크리스나의 둘째인 셀레니아는 현자의 탑으로 들어갔기에 이제 정확히는 제국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크리스나의 셋째인 아이레스와 결혼을 시키려거든, 황녀가 혼인 상대가 되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면 황녀의 쪽으로 너무 무게가 쏠렸다.
황태자를 보위에 올리려는 황제로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아테니아에게 청혼하는 미친 짓거리를 황제는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청혼은 물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상황 파악을 마친 발레리안이 플로어의 중앙으로 나섰다.
그 순간, 그에게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있는 여유도 다른 방법을 찾을 선택지도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형님?”
황태자가 제게 다가오는 발레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족이 한 청혼을 거절하는 것은 황족 모독죄였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황태자의 청혼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황태자는 자신이 드디어 발레리안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았다고 확신하고 있던 터였다.
“테나는 저와 이미 결혼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발레리안의 말에 아테니아가 홱 그를 돌아봤다.
그들은 결혼은커녕, 이미 헤어지기로 한 사이였다.
그런데 돌연 그런 이야기를 꺼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곳에서 제 속내를 드러낼 만큼 아테니아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표정은 애써 관리했지만.
“…입증하실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두 분, 결혼하지 않으시기로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증인도 있습니다.”
귀족들이 그래서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결별한 것이었냐며 쑥덕거렸다.
연애는 하되 결혼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것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 사이 오간 이야기였으나, 황태자는 일부러 앞부분만 쏙 잘라 놓고 말했다.
귀족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는 건, 이별하기로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레리안의 대답은 황태자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있습니다. 여기, 크리스나 가문과 빈켄티우스 가문 사이에 오간 청혼서입니다.”
발레리안이 모두가 그것을 볼 수 있게 펼쳐 들었다.
제국의 공식적인 양식으로 적힌 청혼서에는 크리스나와 빈켄티우스 가주들의 인장이 각각 찍혀 있었다.
청혼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인장까지 찍혀 있으니 그것은 서로 간의 혼담이 성립했다는 완벽한 증거였다.
“…말도 안 돼!”
순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황태자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베르나도는 졸지에 사촌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청혼해 버린 사람이 되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망신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예비 대공비를 데려가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인해서 제 아내 될 이가 많이 당황한 것 같아서요.”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럼 이만.”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댄스 플로어 밖으로 이끌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들의 연속에 굳어 있던 그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폐하…! 폐하, 어디 가십니까…! 폐하!”
쿵.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등 뒤로, 자리를 떠 버리는 황제를 황급히 붙잡으려는 황후의 음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닫혀 버리는 육중한 문의 소리가 들려왔다.
***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데리고 연회장에서 나와 대공가의 마차에 함께 올랐다.
연회장 내 어디든 황가의 눈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그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아테니아는 참아 왔던 물음을 건넸다.
“…그 청혼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무래도, 선선대가 크리스나 백작님에게까지 접근해서 설득한 모양입니다. 테나가 이별을 고한 이후, 청혼서에 크리스나 백작가 가주의 인장이 찍힌 채로 선선대에게 전달되려던 것을 제가 몰래 빼돌렸습니다.”
빈켄티우스 가주의 인장은 발레리안이 대중 앞에 청혼서를 공개하기 직전에 찍었다.
그는 이때만큼 자신이 대공 자리를 일찍 물려받은 사실을 안도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빈켄티우스와 어떻게든 얽히고자 하는 크리스나 백작의 욕심과 어떤 방법을 쓰든 빈켄티우스의 대를 잇고자 하는 선선대 대공의 아집이 오늘 아테니아를 살린 셈이었다.
“제 말은 리안이 왜 그 청혼서를 가지고 다녔느냐는 말이에요.”
하지만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묻고자 했던 사실은 그의 대답과는 다른 것이었다.
솔직히, 청혼서에 크리스나 백작가 가주의 인장이 찍혀 있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아버지의 욕심이라면 충분히 빈켄티우스와 얽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만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다만, 빈켄티우스 가주의 인장은 발레리안이 가지고 있으니 그 청혼서가 완성될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것뿐이었다.
“그건….”
아테니아가 그것을 물을 줄 몰랐다는 듯, 발레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그도 제 끔찍한 가문만 아니라면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 안 해 줄 건가요? 그럼, 다른 것을 묻죠.”
그러나 자신이 이별을 고하는 순간까지도, 혼인에 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발레리안이었기에 아테니아는 진실을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아무리 내가 곤란한 상황이었다지만,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결혼을 선언해 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리안의 말, 되돌릴 수도 없는 거잖아요.”
현재 아테니아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 두 개였다.
발레리안과 결혼하든가, 황태자와 결혼하든가.
그녀도 그런 상황에, 발레리안이 자신을 구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리안, 당신은 결혼을 원하지 않았잖아요. 나도 결혼이 싫은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황태자와 결혼하는 것은 싫지만, 발레리안이 자신 때문에 원하지 않은 일로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끔찍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가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 날 현자의 탑으로 보내 줘요.”
아테니아가 돌연 요구했다.
“제국민이 아니게 되면,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제국법에 따라서 저를 처벌할 수 없어요.”
“테나, 그건 안 됩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단번에 아테니아의 요청을 거절했다.
현자의 탑은 규율이 엄한 곳이었다.
게다가 한번 현자의 탑에 소속되면, 마음대로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런 곳에서 자유로운 그녀가 살려고 했다가는 날이 갈수록 시들어 갈 것이 뻔했다.
“그럼 지금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예요?”
단호한 발레리안의 말에 순간 울컥한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황태자에게 청혼받았던 급박한 상황을 벗어나자, 가슴속에서 그간 발레리안이 절대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머리로는 자신을 구해 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 아테니아도 알았지만, 감정은 때론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는 법이었다.
“리안, 당신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내가 이별을 말했을 때, 그렇게 나를 놓을 수는 없었어요.”
아테니아는 결혼하고 싶었으나 아닌 척할 만큼 발레리안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가는 가벼운 말로라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을 꺾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레이시아가 아테니아를 결혼이라는 단어 하나로 비웃을 때도 그랬다.
아테니아는 그것이 발레리안이 고집을 접을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어쩌면 그녀가 그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꾸만 발레리안의 옆에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늠하며 살게 될까 봐, 아테니아는 두려웠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무서웠다.
어느 날 발레리안이 오늘날의 선택을 후회할까 봐, 그래서 그걸 보는 자신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길까 봐.
그래서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원하지 않는 결혼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별한 후 그 짧다면 짧은 시간에 발레리안이 생각을 갑자기 바꾸게 되었을 리도 없으니 더더욱.
“서로 간절히 원하지 않는 결혼은, 끝내 서로를 불행하게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아테니아가 다시 한번 자신을 현자의 탑으로 보내 달라고 하려던 찰나였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도, 아테니아와의 결혼이 필요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