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5)
“선선대 대공 부인은 사실 다툼을 좋아하는 유형은 아니셨어. 아니, 그분은 오히려 온화하고 그래서 다툼을 극도로 싫어하는 분이셨지.”
선선대 대공을 좋아하지 않는 황후도, 선선대 대공 부인만은 좋아했다.
선선대 대공이 황후를 무시할 때마다 그 옆에서 제 남편의 잘못된 점을 짚어 가면서 황후의 편을 들어 주고, 그녀를 위로해 준 게 선선대 대공 부인이었으니까.
“그런 분이 몇 년을 제 남편과 싸워 대니, 화병이 나지 않으실 수가 없지.”
황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선선대 대공 부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만큼, 빈켄티우스에 잡아먹혀 죽기에는 아까운, 좋은 사람이었다.
“나도 사람이 스트레스로 인해 심장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단다.”
선선대 대공이 얼마나 제 부인과 말다툼이 잦았던 간에, 그는 제 부인을 매우 사랑했다.
며느리의 일로 자주 다투기 전, 선선대 대공이 그토록 극진하게 대하는 상대는 그의 부인이 유일했으니까.
그나마 황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조차도, 그 오만하고 고집 센 선선대 대공이 어쨌든 제 부인의 말은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후는 세간에서 떠드는 그 말들이 제법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 오만한 선선대 대공이 제 부인에게는 남들보다 잘해 줬다고, 사람들은 예쁜 로맨스처럼 포장하여 선선대 대공이 부인을 많이 사랑했느니 어쩌니 떠들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선선대 대공이 진짜로 그토록 대단한 사랑을 했다면, 제 고집 하나를 못 꺾어서 부인이 화병으로 심장병까지 걸리게 했을 리가 없었다.
“그 후, 선선대 대공은 며느리가 제 부인을 잡아먹었다면서 황녀를 더욱 구박했단다. 그리고 선대 대공은 참 한결같이 무능한 인간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유약하고 무능한 선대 대공 아래에서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같은 발군의 인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매우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선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까지 구박하려 드니, 황녀는 새로운 후계… 즉, 둘째를 낳는 일에 애를 쓰는 수밖에 없었어.”
문제는, 이미 황녀가 발레리안을 낳을 당시에 난산이었다는 점이었다.
“둘째를 가질 당시 황녀는 이미 지속되는 선선대 대공의 화를 받아 내며 최악의 몸 상태였다고 해. 결국, 그 상태로 아이를 낳다가 죽었어.”
그 뒤의 이야기는 황후도 더는 관심을 끊었기 때문에 몰랐다.
완전 생판 남이었는데도 선선대 대공이나 선대 대공이나 하는 꼴에 질려서 관심을 끊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 가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들이고 싶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위선자고 미친놈 아니겠니.”
다만, 황후는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 결혼하지 않고자 하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빈켄티우스는 가문의 안주인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아테니아 크리스나가 고통받게 할 수 없었을 터였다.
“…흠, 그렇군요. 그러면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는 절대로 아테니아 크리스나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겠네요?”
“아마도 진짜로 사랑한다면 그러지 않겠어?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와 아테니아 크리스나, 태자가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에도 꽤 유명한 한 쌍이었다고 하지 않았니.”
황태자의 질문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돌연 성년이 될 날이 가까워져서 깨졌다면, 발레리안 빈켄티우스가 아무래도 가문으로부터 이제 곧 성년이니 약혼이라도 하라는 압박을 받은 것이겠지. 그 가문이 혈통을 잇는 일에 좀 미친 것이 아니니.”
황태자는 새삼스럽게, 가문의 힘 없이 제 어머니가 눈치 하나로 사교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어머니 뛰어난 눈치가 아니었더라면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의 속내를 자신은 절대 몰랐을 터였다.
“감사해요, 어머니. 큰 도움이 되었어요.”
황태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레이시아 윌터스의 말과, 어머니의 말을 조합한 결과-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황태자는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로 가서 발레리안을 자신의 생일 연회에 초대했다.
***
황태자의 탄신 연회.
그것은 황실에 밉보이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수도의 모든 귀족이 참석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방 귀족들도, 초대받은 이가 있다면 기꺼이 수도로 오곤 했다.
황실 혹은 황실 연회에 참석할 자격을 가진 이들 간에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많이 참석하는 귀족 중에는 아테니아도 있었다.
황태자에게 잘 보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황실에 밉보이는 것도 좋진 않으니 예의상 잠깐 있다가 갈 생각이었다.
헬레나와 친구들이 연회에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며 아테니아에게 이것저것 권했으나, 아테니아의 기분은 발레리안에게 이별을 고한 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기분은 곧 더욱 바닥으로 치달아야 했다.
“크리스나 영애, 나에게 첫 춤의 영광을 주겠나?”
황태자가 갑자기 오늘 연회에서의 제 첫 춤 상태로 아테니아를 골랐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연회장이 파란으로 뒤덮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테니아가 입 안쪽 살을 꽉 깨물며 황태자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첫 춤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황태자의 춤 신청을 어떻게 거부한단 말인가.
황태자도 그걸 알고 있기에 이렇게 요란하게 아테니아에게 춤 신청을 한 것일 터였다.
그렇게 춤곡이 흐르고, 아테니아와 황태자는 플로어의 정중앙으로 향했다.
오늘은 황태자의 탄신 연회였기에, 플로어를 여는 것도 황제와 황후가 아닌 황태자와 그 파트너의 몫이었다.
즉, 이 넓은 댄스 플로어 위에서 황태자와 아테니아만이 춤을 추면서 연회장 내 모든 사람의 이목을 잡아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십니까, 전하.”
춤을 추며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연회장 내에 쫙 깔리자, 그제야 아테니아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녀는 자다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흐음, 나와 춤을 추는 것이 싫은 건가? 크리스나 영애.”
황태자는 아테니아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능청을 떨었다.
그녀는 속이 조이는 듯이 답답했으나, 황태자에게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클라이브나 선선대 대공에게는 솔직히 군다고 해서 즉결 처분당할 일 따위 없지만, 황태자는 아니었으니까.
황태자는 얼마든지 황족 모독죄로 아테니아를 감옥에 밀어 넣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황태자 전하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많을 텐데 그들의 기회를 제가 빼앗은 것 같아 민망하여 그럴 뿐입니다.”
아테니아가 그 많고 많은 영애 중 왜 하필 자신을 골랐냐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 나라의 제일가는 신랑감은 발레리안이었으나 어쨌든 황족인 황태자도 인기가 없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실제로, 아테니아는 미혼의 귀족 영애들이 보내는 시선으로 인해 상당히 등이 따가운 상태였다.
“내가 다른 영애가 아니라, 크리스나 영애와 춤을 추고 싶었다고 하면 어쩔 텐가?”
무대를 여는 춤곡이었기에, 현재의 춤곡은 제법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 황태자의 팔이 아테니아의 허리에 휙 감겼다.
그저 허리에 손을 얹기만 하면 되는 춤곡의 본래 행동과는 맞지 않는 행위였다.
그로 인해 아테니아의 등허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긴장하지 말게, 크리스나 영애. 내가 여기서 당장 영애를 잡아먹길 하겠나, 무얼 하겠나.”
황태자가 고개를 숙여 아테니아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조차도 너무 긴밀하기 그지없었다.
불쾌했다.
아테니아가 고개를 뒤틀려다가 곡의 박자를 놓쳐 순간 발을 삐끗했다.
그 탓에, 그녀는 일순 황태자의 팔에 매달리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아테니아가 그에 당황하여 재빨리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황태자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휘어잡아 오히려 아테니아의 중심을 다시 무너트렸다.
“황태자 전하…!”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황태자와 아테니아는 지금, 첫 춤의 주인공들이었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접촉은 현재 흐르는 곡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가까운 행위였다.
귀족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커지는 것이 아테니아에게도 느껴졌다.
“쉿. 크리스나 영애, 설마 여기서 날 밀어내서 내게 망신을 주려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가 계속해서 속닥속닥거렸다.
아테니아는 순간 울컥하여, 그의 정강이를 차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속닥거림은 경고였고, 그녀는 그 경고를 찰떡같이 알아들어 버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태자에게 망신을 줄 수는 없었다.
베르나도도 그것을 알고 아테니아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긴 춤곡 내내 어쩔 수 없이 황태자와 딱 달라붙은 채로 춤을 춰야만 했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춤곡이 끝났을 때, 아테니아는 인사를 하는 척 얼른 황태자에게서 떨어졌다.
더는 베르나도의 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
아테니아가 순간 주춤했다.
분명, 춤곡이 끝났으니 황태자 또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멀어져야만 했다.
연달아 춤을 추더라도, 한 번 춤을 췄으면 다음 곡에서는 파트너를 바꾸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아테니아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상했다.
아주 찰나에, 그녀의 등골을 타고 불길함이 쭉 흘렀다.
“아테니아 크리스나.”
황태자가 아까 속닥거리던 것과 달리, 목소리를 높였다.
명백하게 이 연회장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황태자가 대중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헉…!!!”
그 순간, 사람들이 전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황태자가 아테니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가 반지가 담긴 작은 보석함을 자신의 소매 안에서 꺼내 그녀의 앞에 열어 보였다.
“그대, 나와 결혼해 주겠나?”
황태자의 시선은 아테니아의 뒤쪽… 그곳에 있는 발레리안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