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4)
황실 관리들 사이에는, 황태자가 퇴폐적인 한밤중의 가면무도회에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레이시아도 황실의 관리였으니 그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실제로, 황태자와 얽히고 싶은 이들은 그 가면무도회에서 황태자를 만났다고 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관계에 대해 안 이후, 레이시아는 황태자를 만나기 위하여 온갖 가면무도회를 전전했다.
그리고 레이시아는 생각보다 자신의 목적을 쉽게 달성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도회의 수많은 가면 속에서 황태자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레이시아가 다가가 말을 걸자, 살짝 취해 있던 황태자가 취기에 들떠 물었다.
그녀는 순간 비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제 권위를 휘두르는 것을 좋아하는 황태자는 가면무도회에서조차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숨기지 않았다.
황실의 것을 뜻하는 머리칼과 눈색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겨우 눈만 가린 가면을 썼는데 다들 눈이 삐지 않은 이상 그가 황태자임을 모를 턱이 없었다.
황태자가 온갖 가면무도회를 멋대로 전전해도 쉽게 그곳들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도, 그 무도회장에서 아무도 가면을 쓴 황태자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진정 비밀리에 가면무도회에 다녔다면, 어떻게 황실 관리들 사이에까지 소문이 났겠는가.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고서는 자신이 누구인 줄 아느냐니.
그렇게 묻는 황태자의 행태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레이시아는 제 속마음을 감추고 황태자를 향해 아주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와 아테니아 크리스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레이시아가 가면을 쓴 그의 정체가 황태자임을 알고 있다고 드러낸 것이었다.
순간, 황태자의 두 눈이 번뜩였다.
“내가 네게 시간을 낼 가치가 있는 이야기더냐?”
발레리안의 이름을 거론하자마자, 취기가 달아났는지 황태자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하여 물었다.
시간을 낼 가치가 있냐고 물었으나, 황태자는 사실 이미 레이시아가 할 말이 대단히 궁금한 모양새였다.
“제가 감히 어찌 귀하신 분의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레이시아는 황태자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그러자 그때에서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어느 방이라도 들어가도록 하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야겠어.”
이곳은 퇴폐적인 가면무도회였다.
단둘이 들어갈 방은 차고 넘쳤다.
그렇게 황태자는 발레리안과 아테니아가 서로 결혼은 하지 않을 사이임을 알게 되었다.
***
황태자는 처음에, 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답은 의외로 황후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발레리안 빈켄티우스가 아테니아 크리스나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에 분명 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황후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온 것은 황태자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의 어머니가 선황 폐하의 사생아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어머니.”
어렵지 않게 운을 띄우는 황후에 황태자의 두 눈이 커졌다.
제 어머니가 빈켄티우스의 일에 대하여 알고 있다니!
그도 그럴 것이, 현 황후는 가문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오히려, 황비가 가문이 더 뛰어났으며 현 황후는 황제의 사랑 덕에 지금의 자리에 앉은 경우였다.
그래서 정보력이 그리 뛰어날 리도 없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황후가 발레리안에 대해 황태자도 몰랐던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다.
“빈켄티우스의 선대 대공과 당시의 황제 사생아였던 황녀 간에 스캔들이 났을 때, 전 제국이 들썩였단다. 그리고 가장 크게 난리가 난 것은 빈켄티우스였지.”
황후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못마땅한 듯 입매를 비틀었다.
“현재 빈켄티우스의 선선대 대공은 지독한 혈통주의자였거든. 그 노인네가 어찌나 오만한지, 이 어미에게도 제대로 고개 숙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단다.”
오만한 선선대 대공은 현 황후가 한미하고 역사도 그리 깊지 않은 가문의 딸이라는 이유로 황후를 무시했다.
그러나 선선대 대공이 하필 빈켄티우스의 주인이었기에, 황후는 황제를 졸라 보복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여태껏 황후에게 맺혀 있던 터였다.
“내가 한미한 가문의 영애라고 무시하던 그 선선대 대공이, 사생아인 황녀를 어찌 얌전히 받아들였겠느냐.”
“빈켄티우스의 선대 대공과 숙모님은 어쨌든 결혼하셨지 않습니까?”
“숙모는 무슨…! 황제 폐하와 같은 배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닐진데.”
황후가 코웃음을 쳤다.
선선대 대공에게 혈통으로 무시당했다며 분노하는 황후도, 사실 발레리안의 어머니를 평민의 피가 섞였다며 무시하는 건 상당히 모순적인 일이었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도 우습지. 평민의 피가 섞인 주제에 감히 내 아들을 무시하다니…!”
발레리안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황후는 이렇듯 뒤로는 종종 발레리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드러내고는 했다.
하긴, 황제가 하도 제 아들과 발레리안을 대놓고 비교해 대니 그 속에 쌓인 게 없을 수가 없었지만.
“어머니, 그래서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된 건데요?”
황태자가 다른 곳으로 빠지려는 황후의 의식을 도로 이야기의 주제로 끌고 왔다.
그제야 황후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결혼하긴. 빈켄티우스의 그 유약한 선대 대공이 황녀와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고 드물게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난리를 치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선선대 대공이 꺾인 거지.”
발레리안의 아버지, 안토니오는 빈켄티우스답지 않게 상당히 유약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생에 유일하게 고집을 부렸던 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발레리안의 어머니와 결혼할 때였다.
“그 오만하고 깐깐한 노인네가 제 아들한테 뜻을 꺾였으니, 그 속이 얼마나 뒤집혔겠니?”
순간, 황후는 그 당시의 선선대 대공이 분해하던 표정을 떠올렸다.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즐거워 보였다.
“황녀는 시집간 순간부터 미운털이 이미 콕 박힌 셈이었지.”
솔직히, 황후는 이후 황녀가 얼마나 불행했든 관심 없었다.
그저, 그 황녀의 존재로 인해 그 자존심 강한 선선대 대공이 꺾였다는 게 중요했다.
황후가 이후의 이야기를 아는 것도 선선대 대공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지낸다는 소리에 관심이 가서, 몰래 시녀를 보내서 북부 사교계에서 이리저리 빈켄티우스의 소식을 수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크게 들려온 것은 선선대 대공이 시집온 황녀를 얼마나 무시하고 경멸하느냐였다.
“황녀는 본디가 유약하고 순한 사람이었어. 그런 이가 그 무시무시한 노인네의 갈굼을 내리 당하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시들어 가는 건 당연했다.”
그 점에서는 황후도 발레리안의 어머니에게 조금 동정심이 생겨났다.
그러게, 왜 분수에도 맞지 않는 집안에 시집을 가서 그런 꼴이나 당한단 말인가.
황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동정심조차도 참, 자기 위주의 생각이었다.
“심지어 선대 대공도 유약하기는 마찬가지라, 제 아버지에게 맞서 봤자 그리 대단치도 못했던 거지. 그래서 황녀는 고스란히 시아버지의 시집살이를 겪어야만 했고.”
발레리안의 어머니가 겪은 시집살이가 얼마나 지독했냐면, 그 시집살이에 관한 내용이 북부에서 수도의 사교계에까지 들려올 지경이었다.
선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의 어머니만 봐도 그 꼴에 속이 뒤집힌다며 매번 역정을 내곤 한다는 말이 당시 사교계에 퍼진 내용이었다.
“그나마 그 시어머니가 황녀를 아껴서 선선대 대공으로부터 황녀를 감싸 주었는데… 발레리안 빈켄티우스가 태어난 거지.”
황후가 돌연 혀를 찼다.
“쯧, 그때 발레리안 빈켄티우스가 콱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황태자가 뜬금없는 제 어머니의 말에 의아함을 표했다.
“당시에, 발레리안 빈켄티우스가 선선대 대공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미숙아로 태어났거든.”
그리고 이어지는 황후의 말은 지금의 발레리안을 생각하면 전혀 추측조차 불가능할 소리였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는 원래 남들보다 기골이 장대하고 건강한 빈켄티우스의 핏줄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오히려 몸집도 작고 곧 죽을 것처럼 잔병치레도 끊이지 않는 약한 아이였어.”
선선대 대공은 빈켄티우스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작자였다.
그런 이의 눈에 약하디약한 발레리안이란 아이는 빈켄티우스로 받아들이기조차 싫은 존재였다.
“그 노인네, 그 이후로 황녀에게 내리 꼭 저같이 모자란 것이나 낳았다고 하면서 전보다 더욱 황녀를 괴롭혔다더구나.”
원래도 심했던 시집살이가 더 심해졌다.
황녀는 발레리안을 낳고 나서 몸조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선대 대공께서는 뭘 하시고요?”
황태자가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다.
황녀의 남편은 선대 대공인 안토니오였다.
당연히 안토니오가 제 아버지로부터 황녀를 보호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제대로 보호했더라면, 황녀가 그런 취급을 받았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의문은 드물게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유약한 인간이 제 아버지 성질 이길 자신도 없으면서 사랑 하나로 사람 옆에 데려다 놓고, 남편 노릇 제대로 못 한 거지.”
황후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이었다.
솔직히, 황후는 선선대 대공이 아니라 선대 대공이 황녀를 말려 죽인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황후가 사랑 하나만 믿고 황실로 시집와서, 고생은 고생대로 했듯이.
“그 후에 선선대 대공과 선선대 대공 부인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고 해. 한쪽은 황녀를 지독하게 구박하고, 한쪽은 황녀를 아꼈으니까.”
선대 대공이 해야 했을 일을 그의 어머니가 모조리 대신한 셈이었다.
“그러다가 일이 벌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