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3)
레이시아는 그대로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테니아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레이시아를 만난 이후,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은 채로 말이 없는 아테니아를 발레리안이 위로했다.
“윌터스 영애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테나. 그냥 헛소리….”
그러나 아테니아가 돌연 발레리안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아니요, 윌터스 영애의 말이 모두 맞아요.”
사실, 아테니아가 레이시아의 말을 이렇게 전부 듣고 있을 필요 따위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레이시아를 지나쳐 가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아테니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시아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아테니아도, 레이시아의 말이 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하지도 못하고 레이시아의 말을 끊어 내고 자리를 뜨지도 못한 것이다.
“윌터스 영애가 했던 말… 사실, 나도 한 번쯤은 다 생각해 본 내용이거든요.”
아테니아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결혼에 대해 발레리안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시아의 빈정거림과 비웃음들을 받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나고 자라 살아가야 하는 곳은 귀족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마냥 연애만 하고 살아가겠다는 건, 두 사람이 꿈을 꾸고 있던 게 맞았다.
“…테나.”
발레리안이 멈칫하며 아테니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그런 생각들을 해 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리안, 많은 사람이 우리를 두고 끊임없이 결혼 이야기를 해요.”
아테니아는 끝내, 그저 넘어가려고 했던 결혼이라는 단어를 발레리안과의 사이에서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관계를 이어 가 봤자, 결국 끝이 찾아올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우리가 사는 세계가 관계를 결혼으로 매듭짓지 않고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겠죠.”
아테니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도 결국, 이 사회에 길들여진 존재였다.
“무조건 결혼이 관계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기에, 리안에게 결혼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 거고요.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아테니아는 눈앞의 사랑에 홀려 현실에 비하여 자신의 각오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오래도록 교제를 했을 때, 사람들이 왜 너희는 결혼하지 않냐고 쳐다보는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아테니아가 한 걸음 발레리안에게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따라오지 못했다.
아테니아가 더욱 쓰게 웃었다.
자신은 각오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욕심이 얼마나 큰지조차 몰랐다.
“그리고… 리안, 나는… 당신과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 결혼하고 싶어요.”
아테니아는 차마 발레리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인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게 비겁하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자꾸만 같은 아침을 맞는 미래를 꿈꾸게 돼요.”
발레리안은 내도록 말이 없었다.
아테니아는 완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미안해요, 결혼을 원하지 않는 당신에게 맞춰 줄 수 없어서.”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와의 이혼 이후, 일방적으로 맞춰 주는 선택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인간은 애석하리만치 관성이 뛰어난 존재였다.
아테니아는 처음부터 결혼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기만했다.
발레리안의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이혼 후에 한 다짐이 전혀 쓸모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내 욕심이 더 커지기 전에.”
“테나, 제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가 꺼내려는 말을 예상한 듯이, 그녀의 말을 막으려는 것처럼 손을 잡아 왔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여기서 멈춰요.”
끝내, 아테니아를 붙잡고 있던 발레리안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레이시아가 사교계에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레이시아를 초대해 주는 파티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발레리안이 레이시아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조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실이든지 살면서 많은 일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 사건은 아테니아와 이별을 한 후 발레리안이 북부로 돌아가려던 것을, 황태자가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형님, 저번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웬일로 그 자존심 강한 황태자가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를 직접 찾아와 발레리안에게 사죄했다.
아테니아와 헤어진 발레리안은 다시 대체로 모든 일에 감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건성으로 대충 황태자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됐습니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가 직접 사과를 하러 이렇게 왔는데, 대답이 영 시원치 않으니 못마땅한 듯했다.
물론 발레리안은 워낙 눈치가 좋은 편이었기에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마음 넓은 형님께서 이해해 주신다니, 이 아우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발레리안이 순간 멈칫했다.
이만하면 황태자가 성을 내며 돌아갈 만도 했다.
솔직히 반쯤은, 황태자보고 빨리 꺼져 버리라고 적나라하게 성의 없는 태도를 취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태자는 발레리안의 예상을 뛰어넘고, 마치 아무렇지 않은 양 굴고 있는 것이다.
“…제게 용건이 있으십니까?”
발레리안이 본론을 말하라는 듯 물었다.
황태자를 오래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발레리안은 그 누구든 마주하고 있기가 싫고 귀찮고 번거로웠다.
“곧, 제 생일 연회가 열리는 것을 아실 겁니다.”
“몰랐습니다.”
발레리안이 툭하니 대답했다.
당연했다.
황태자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가 언제 태어났던 간 발레리안이 알게 뭐란 말인가.
그 대답을 들은 황태자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아무리 관심이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발레리안이 대놓고 표현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 하… 하, 형님께서는 워낙 공사다망하시니 모르실 수도 있죠. 제 생. 일. 쯤. 이. 야.”
말에 악센트가 들어가는 것이 전혀 이해한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이번에도 대놓고 발레리안을 탓하지는 않았다.
이쯤되자, 발레리안은 황태자의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고서는 그를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 예. 그래서요? 탄신 연회가 있어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발레리안이 푹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참, 노골적으로 성가시다는 태도였다.
그 한결같은 태도에 애써 웃고 있던 황태자의 입꼬리가 파르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이번에도 꿋꿋하게 꺾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특별한 선물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발레리안이 빨리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황태자는 이번에도 참기 위하여 제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제 생일 연회에 와 주십시오. 다들 아직도 저와 형님이 다툰 상태인 줄 알고 있는데, 그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황태자는 지금 자신이 발레리안과 화해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발레리안은 아마도 황제가 그렇게 시켰겠거니 생각했다.
황실이 여러 번 빈켄티우스에게 물 먹은 상태에서, 그래도 제법 현명한 황제라면 더는 무리하게 빈켄티우스와 척지지 않으려 할 것이 자명했으니까.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황태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황태자에게 직접 탄신연에 초대받았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조건까지 내거는 발레리안의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지금 아쉬운 것은 명백하게 황태자였으니까.
“예. 말씀하십시오, 형님.”
“앞으로 적어도 10년간은 저를 수도에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10년이나요?”
황태자가 멈칫했다.
사실, 황태자가 억지로 발레리안과 친해지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발레리안이 수도에 오지 않는 건 오히려 황실에 좋은 일이었다.
빈켄티우스에서 중앙계에 진출하지 않으려 할수록, 수도에서나마 황권은 단단해질 테니까.
그러니 알았다고 대답하면 될 것을, 황태자는 순간 애먼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크리스나 영애는 어쩌시고요?”
발레리안의 눈매가 빠르게 사나워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게 무슨 상관이시랍니까.”
“아… 하… 하, 저야, 상관없긴 하죠.”
“저와 크리스나 영애가 앞으로 어떤 관계이든 간에, 두 번 다시 크리스나 영애에게 무슨 짓이라도 시도했다가는….”
발레리안이 일부러 말끝을 늘어트렸다.
제 경고를 더욱 확실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동생이신 황녀 전하께서 미래의 하늘에 오르실 줄 아십시오.”
황태자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미래의 하늘.
대놓고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그것은 황제의 황좌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황태자가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형님의 조건을 수락하겠습니다. 그럼, 제 생일 연회에 오시는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면, 저도 약속을 지킬 겁니다.”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연회날에 뵙겠습니다, 형님.”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척, 고개를 끄덕이며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를 나섰다.
그러나 황실 마차에 오르는 순간, 황태자의 표정은 사납게 뒤틀렸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이 건방진 놈…!”
쾅!
황태자가 주먹으로 마차의 벽을 내리쳤다.
그러자, 마차에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다소곳하고 조용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황태자의 손을 감싸 보듬어 주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황태자 전하.”
여인은 레이시아 윌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