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2)
발레리안은 선선대 대공의 말에 그 어떤 확신의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날의 대화는 완전한 선선대 대공의 승리였다.
***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선선대 대공과의 대담이 있고 난 이후로, 3일 만에 서로 만나게 되었다.
각자 생각이 복잡하여 두 사람 다 만남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겨우 3일 만에 각자의 고민이 해결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오랜만에 만나 놓고도 둘 중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침묵이 이토록 어색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침묵이 서로를 내리 짓누르는 것만 같이 어색했다.
결국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테니아였다.
“…리안, 잘 지냈나요?”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테나는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도 잘 지냈어요.”
그렇지만 평소라면 굳이 묻지도 않았을 안부 인사 따위로 대화가 오래 오고 갈 리 없었다.
아테니아는 자신이 그간 발레리안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이 모양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건 사실 그들이 정작 해야 할 이야기를 자꾸만 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혼.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그 불편한 주제를 누구라도 먼저 꺼내야만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 싶어 했다.
“두 분, 헤어지셨다더니 아직 만나고 계신가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레이시아를 만난 것은 단언컨대 악재였다.
“요란하게 결별설까지 내시더니, 기껏 다시 만나실 거면서 왜 그 요란을 떠셨답니까.”
레이시아가 악의 어린 얼굴로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녀는 그래도 아테니아를 찾아올 때는 제법 화려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윌터스 영애, 우리가 아는 척할 사이였던가?”
아테니아가 표정을 굳히며 레이시아에게 쏘아붙였다.
이전에 아테니아의 경고를 알아듣고 언행을 조심하는 듯하더니, 레이시아는 또다시 태도를 엉망으로 굴고 있었다.
“아는 척하지 못할 이유는 뭐랍니까? 같은 남자와 잠자리에 든 사이에.”
그러나 오늘, 레이시아는 무엇을 잘못 먹은 것인지 수위를 넘는 빈정거림을 쏟아 냈다.
“레이시아 윌터스!!!”
아테니아가 단번에 분노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듣고 싶지 않은 저질스러운 말이었고 그것을 하필 곁에 있는 발레리안도 듣게 되었다.
오늘 하루는 이것만으로도 최악이 확정된 셈이었다.
“어디, 전처럼 날 협박해 보시든가요.”
레이시아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황궁 내에서는 클라이브 칼스이턴이랑 바람피운 게 들통나서 좌천당하고, 집에서는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이를 임신했다면서 쫓겨났거든요.”
아테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레이시아의 배 쪽을 쳐다봤다.
“아, 물론 지금은 없어요. 아이가 생긴 걸 알고 칼스이턴 후작저에 찾아가자마자, 그 저택의 선대 후작께서 내게 낙태약을 강제로 먹이셨으니까.”
레이시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으나, 그녀가 이토록 초췌하다 못해 황폐해진 이유를 알 수 있을 법한 말이었다.
칼스이턴 선대 후작의 추악한 만행에 아테니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클라이브와 칼스이턴 대부인이 아테니아에게 하는 잘못을 방관한 선대 후작이었지만, 그래도 셋 중에는 가장 나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 같은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가 어딜 제 귀한 아들을 노리냐고, 칼스이턴의 선대 후작께서 길길이 날뛰시더군요.”
레이시아가 신세 한탄처럼 말을 토해 냈다.
그러나 강제로 아이를 잃은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여, 아테니아는 차마 단번에 레이시아의 말을 끊어 내지 못했다.
“클라이브 칼스이턴 그놈은, 나 때문에 당신과 이혼했다면서 내 탓을 하고 있질 않나….”
레이시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클라이브의 남 탓하는 버릇은 좀처럼 어딜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가 당한 일들을 회상하던 레이시아가 돌연 홱 아테니아를 돌아봤다.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당신은 왜 클라이브 칼스이턴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서 이토록 행복한 거지?”
레이시아의 두 눈이 어떤 광기로 번뜩였다.
“왜!!! 나는 안 되고! 당신은 행복한 거냐고!!!”
레이시아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그녀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사실 아테니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서 고생 모르고 자라 온 아테니아가 싫었다.
집안을 잘 타고나서 여유롭고 풍족한 환경에서 공부도 쉽게 쉽게 하고, 그 잘난 가문 덕에 시집도 잘 갔다.
그런 아테니아를 볼 때마다 레이시아는 속이 뒤집혔다.
그래서 아테니아에게서 클라이브를 빼앗았다고 여겼을 때, 레이시아는 얼마나 통쾌했던지 몰랐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이겼다고 생각했어! 집안 잘난 것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당신이 좋은 환경 덕에 경제학과에서 수석까지 차지하고 장학금을 탈 때, 나는 그 장학금이 없어서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계속 다녀 보겠다고 빌빌대야 했는데!”
레이시아가 비척비척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런데 당신은 또, 부자인 가문 덕에 시집까지 잘 가서는! 클라이브가 겨우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하더니 이제는 더 좋은 남자를 물었네?”
발레리안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아테니아에게 다가서는 레이시아를 막아섰다.
그는 순간, 레이시아를 제압해야 하나 고민했다.
다만, 아테니아가 곁에 있기에 여인을 그렇게 험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도 될지 망설임이 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망설임조차도 혹여나 레이시아가 아테니아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곧바로 사라져 버릴 것이었지만.
“하,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당신이 뭔데 날 막아요? 왜요, 두 분이 벌써 결혼 약속이라도 하셨나?”
레이시아는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발레리안조차도 두 눈을 번뜩이며 올려다봤다.
그러나 레이시아의 빈정거림은, 그녀가 의도치 않았던 단어로 아테니아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아테니아가 아무리 발레리안의 뒤에 서 있어도, 오로지 아테니아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레이시아는 그런 아테니아의 반응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레이시아의 양 입꼬리가 길게 위로 올라갔다.
“뭐야. 둘이 결혼할 사이는 또 못 되는 모양이죠?”
순간, 아테니아와 발레리안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애초에 관계를 어떻게 전진시키던 간에, 결혼하지 않기로 한 사이였으니까.
즉, 레이시아의 말에는 틀린 바가 없었다.
“……결혼이 모든 관계의 완성이리라고 생각하는 구시대적 사고를 버려.”
아테니아가 돌연 울컥하여 발레리안의 뒤에서 나와 말했다.
결혼, 결혼, 결혼.
그놈의 결혼 소리에 대체 얼마나 시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크리스나 백작부터 시작해서 빈켄티우스의 선선대 대공, 그리고 레이시아 윌터스까지.
왜 다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 사이의 일에 참견 못 해 안달이란 말인가.
“풋.”
그러나 아테니아의 말은 레이시아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니, 레이시아는 오히려 아테니아를 비웃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고생 하나 모르고 자라서 그런가, 되게 순진한 소리를 하시네요?”
레이시아가 아테니아를 향해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와 크리스나 영애, 두 사람이야 결혼하지 않아도 서로의 관계는 완전하다는 그런 소리를 하겠죠.”
레이시아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귀족 사회에서 결혼하지도 않을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까요?”
사람은 사회적인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없었다.
그것은 아테니아나 발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 사이 아이가 생기면 어쩌실 건데요? 아, 평생 정신적인 교감만 하고 지내시려고 그러나요?”
“윌터스 영애.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그 입 닫는 게 좋을 걸세.”
발레리안이 참다 못해 나직하게 경고했다.
레이시아의 방금 발언은 괜찮은 수위를 넘어도 한참 넘은 터였다.
“어차피 내리막길 인생, 고소하시든 말든 그건 제 알 바 아니고요.”
그러나 레이시아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막무가내였다.
“그렇잖아요. 이 세상에 100%의 피임법이라는 건 없는데- 정말 만에 하나의 확률로 아이가 생기면요?”
레이시아가 아테니아를 향해 웃었다.
적나라한 비웃음이었다.
“내도록 결혼을 안 하다가, 그때 가서야 결혼을 하면… 크리스나 영애가 아이를 빌미로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의 발목을 잡았다는 소리나 듣게 되겠죠!”
아테니아의 표정이 굳고 발레리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레이시아의 말은 분하지만 모두 옳았다.
귀족 사회란 그런 곳이었다.
귀족 간에 서로가 추락하기만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 하이에나들이 득시글한 사회.
그리고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관계는 그런 사회에서 트집 잡히기에 너무나도 쉽고 쉬운 사이였다.
“하하하…! 당신도 별수 없네요, 아테니아 크리스나.”
레이시아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당신 같은 다 가진 여자가 기껏 이혼하고 나서 다시 맺은 관계가 이런 거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레이시아는 콧노래까지 흥얼흥얼거렸다.
마치,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현재 관계가 레이시아의 열등감을 해소시켜 주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시아가 안부 인사를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두 분, 부디 오래가세요. 그래야 결국 나중에 헤어지셨을 때 크리스나 영애가 더 비참할 것 아니에요?”
물론, 그 속살거림의 내용은 더없이 악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