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 (1)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걱정에 한참을 침묵했다.
이렇게 날 선 대답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녀가 후회했으나, 이미 입 밖으로 나간 말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끝내, 발레리안에게 말을 할 이렇다 할 변명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이미 그녀의 속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니요, 리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걱정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별거 아닌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테나.”
제게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는 아테니아의 행동에 발레리안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그런 그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미안해요, 리안. 제가 지금 좀 피곤해서…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밀어냈다.
그 순간, 그는 완전히 굳어 버렸다.
발레리안으로서는 처음 겪는, 그 어떤 이유도 모를 아테니아의 완연한 거부였다.
탁.
그렇지만 그가 굳어 버린 사이,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의 문은 완전히 닫혀 버렸다.
마차의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마차는 그대로 아테니아를 싣고 출발해 버렸다.
***
“내가, 허튼짓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타운하우스의 안으로 들어와서 선선대 대공을 마주한 발레리안의 목소리는 살벌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선선대 대공이 하필 저의 할아버지만 아니었더라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말했지 않았느냐. 나는, 그저 너와 크리스나 영애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 영애를 불렀을 뿐….”
선선대 대공이 그 살벌함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그 변명을 들어 주지 않고 끊어 버렸다.
“내가 빈켄티우스를 망칠지도 모르니까, 아테니아를 여기에 주저앉혀서 방패로 쓰려는 그 더러운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발레리안의 말에 선선대 대공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곡을 찔렸다.
선선대 대공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매번 제 손자를 폄하했으나, 그 영특한 머리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같은 인간이 테나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차려서 허락했다는 생각 따위, 추호도 안 합니다.”
발레리안이 선선대 대공을 압박하듯이 가까이 다가갔다.
선선대 대공은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빈켄티우스의 핏줄 자체가 워낙 그 체격부터가 매우 남달랐다.
선선대 대공도 그런 빈켄티우스의 핏줄을 강하게 타고났는데, 그런 선선대 대공보다도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것이 발레리안이었다.
그런 발레리안이 위협적으로 구니, 선선대 대공이라고 한들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아테니아를 빈켄티우스의 안주인으로 들어앉혀 놓으면, 내가 어찌 감히 그녀가 적을 둔 가문을 부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발레리안이 선선대 대공을 향해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놓고 자신은 모른 척, 원로들을 시켜 아테니아를 압박할 생각이셨겠지요. 그녀가 이혼하지 않고 버틸 수 없게끔 말입니다.”
발레리안이 선선대 대공의 생각이 빤하다는 듯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 놓고, 아테니아의 이혼 사실을 흠잡아서 저와의 결혼 전에 이혼은 절대 없다는 조건을 걸으셨겠죠. 그녀가 정작 이혼하고 싶을 때, 못 하게 하시려고요.”
발레리안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자신이 눈앞의 인간에게 같은 피를 받아 태어났다는 게 역겨웠다.
“그래야만, 아테니아의 이혼을 가지고 저와 거래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와의 이혼을 허락해 주는 대신,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선선대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레리안이 늘어놓은 말들이 모두 선선대 대공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맞았기 때문이다.
틀린 점이 하나도 없으니, 차마 부정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선선대, 당신께서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이토록 잘 아는데.”
발레리안이 말을 짓씹듯이 내뱉었다.
정말이지, 하필 이런 사람이 그의 조부만 아니었어도 그는 제 가문이 이만큼이나 증오스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허튼 꿈 꾸지 마십시오. 아침에 루이앙스 공작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쪽과의 혼담은 완전히 틀어졌어요.”
발레리안이 아침 일찍 타운하우스를 나선 이유였다.
그는 오늘 루이앙스 공작 영애를 찾아가, 빈켄티우스 상단의 무역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외국으로 떠날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발레리안이 공작 영애에게 관심이 생겨서 찾아온 줄 알고, 공작 부부는 사용인들까지 죄다 물린 채로 두 사람만 응접실에 남게 했다.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한 그 행동이, 루이앙스 공작 영애가 발레리안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는 시간이 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계약서에는 계약을 깰 경우 위약에 관한 내용도 적혀 있었으니, 루이앙스 공작 부부가 뒤늦게 손쓸 방법 따위 모두 차단된 셈이었다.
“…네놈이 그럴 줄, 내가 몰랐을 것 같으냐?”
조손은 서로를 싫어하는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
발레리안이 아침 일찍 어디를 가는지 그가 단단히 입단속을 한 탓에 선선대 대공에게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선선대 대공은 발레리안의 행선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선선대 대공이 이미 루이앙스 공작가는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몇 년이 지나면 또 고위 귀족가의 영애 중에 성년을 지나는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선선대 대공은 남녀 간의 나이 차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발레리안을 그저 고위 귀족가의 영애와 혼인시키면 그뿐이었다.
그러니, 몇 년쯤 허비한다 치고 아테니아와 결혼하게 했다가 이혼하게 만들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래, 네놈이 내 속을 모두 간파했다고 치자.”
선선대 대공은 자신이 발레리안을 얕봤음을 인정했다.
발레리안의 스승들이 그가 자라는 내내 아이가 유독 똑똑하다고는 했으나, 이토록 머리가 좋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선선대 대공이 어린 날의 발레리안에게 제대로 된 관심이라고는 밤톨만큼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간과한 게 있더구나.”
선선대 대공이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부터 발레리안과 잘 대치해야만,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크리스나 영애 말이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발레리안이 순간, 크게 멈칫했다.
“네놈이 계속해서 결혼을 안 하겠다고 우긴다 치자.”
선선대 대공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빈켄티우스에게는 크리스나가 한참 못 미친다만… 우리 가문만 아니라면, 크리스나 백작가는 다른 이들이 노릴 만한 곳이긴 하지.”
아테니아가 클라이브를 속여, 그를 완전히 떼어 낸 이후 정상 궤도에 오른 크리스나 상단의 향수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불티나게 향수가 팔려 나갔다.
그 덕에 요즘 크리스나 상단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무역으로 상단의 크기를 키우고자 한 바람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그로 인해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는 크리스나 가문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크리스나 영애 자체만 보면 똑똑하기도 하고 그 외모도 괜찮지. 그런데 가문까지 점점 잘나가니, 영애를 노릴 자들이 한둘이겠느냐?”
발레리안은 선선대 대공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아테니아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고는 했던 사람이다.
당장 그녀가 이혼한 것으로 흠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이것을 그녀를 자신의 가문 사람으로 만들 기회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 중에는 남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테니아를 제 며느리로, 자신의 올케로 들이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은 네놈이 좋아서 크리스나 영애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결혼도 안 하고 싶다면서 네놈이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해 주겠지.”
선선대 대공은 오만한 것과 별개로, 사람의 속내를 잘 읽는 편이었다.
그가 매번 발레리안의 아픈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들쑤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랬다.
그런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와 대화를 나눈 이후, 저토록 그녀가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한다면 그 말은 거의 틀리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발레리안도 알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결혼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혼하는 게 더 행복할 것이다.
발레리안은 그 사실을 제가 아테니아를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으로 모른 척했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 불같은 사랑이 계속 갈 성싶으냐? 어느 날 문득, 크리스나 영애와 결혼관이 맞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영애가 그리로 가지 않으리란 법이 있다고 확신하느냐?”
선선대 대공은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 관계를 진전시켜 가며 내내 두려워하던 점을 콕콕 집어냈다.
발레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선선대 대공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 말이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너같이 욕심 많은 놈이 크리스나 영애를 네 곁에 두었다가 남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선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의 속내가 뻔하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발레리안이 입매를 비틀며 겨우 대꾸했다.
“테나는 누군가에게 주고, 말고 할 물건이 아닙니다. 그녀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그녀의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나 선선대 대공은 다시 한번 손쉽게 발레리안의 속을 휘저었다.
“지금 내가 묻고 있지 않느냐. 크리스나 영애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반드시 네놈을 택하리라는 보장이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