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강수 (4)
선선대 대공의 어투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던 청유형이었다.
그에 놀란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지금 제게 결혼을 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말했네.”
선선대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침에 크리스나 백작저로 청혼서가 갔겠지. 그것 때문에 궁금하여 이 이른 시간에 여기를 찾아온 게 아닌가?”
선선대 대공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부러 이 아침부터 아테니아를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발레리안이 아침부터 어딘가에 나갔기 때문일 터였다.
“…맞습니다만.”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발레리안이 없을 때 자신과 마주하려고 했던 선선대 대공의 의도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리 미덥지 않아 할 것 없네. 이번에는 진짜로 크리스나 영애와 발레리안을 혼인시키고자 해서 부른 것이니까.”
선선대 대공이 그런 아테니아의 속내를 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짚어 냈다.
“이번에는, 이라는 건 어제 하신 결혼 이야기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이셨다는 것이군요?”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멈칫했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이 영애는 그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발레리안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결혼을 권했다.
그 저의가 결코 좋은 것일 리 없어,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크리스나 영애도 짐작하겠지만 영애랑 발레리안이 만나는 것도 탐탁지 않았어.”
“마치 지금은 아닌 것 같다는 말씀 같네요.”
“말하지 않았나, 발레리안과 결혼해 달라고. 내가 여전히 크리스나 영애가 못마땅했더라면, 이런 부탁을 영애에게 굳이 하지 않았겠지.”
“제가 의문인 점은, 왜 하루 만에 마음을 바꾸셨냐는 겁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셨으면서요.”
아테니아는 빙빙 둘러 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발레리안이 크리스나 영애와의 결혼이라면 받아들일 것 같기 때문이네.”
선선대 대공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제, 발레리안과 말다툼이 있었네. 억지로 결혼을 시킨다면, 그 결혼을 하느니 빈켄티우스의 대를 완전히 끊어 놓겠다고 하더군.”
선선대 대공은 일부러 지난날 발레리안과 했던 대화를 일부분은 생략하고, 일부분은 조금 다르게 말했다.
그는 아테니아가 지난날 오간 대화의 모든 진실을 알길 바라지 않았다.
만약, 전부 다 듣게 된다면 선선대 대공이 그녀와 발레리안의 결혼을 추진하려는 진짜 이유를 깨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난들 어쩌겠나. 손이 귀한 집안에서, 그놈이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라도 이어 주어야지.”
“발레리안은 저하고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아니, 크리스나 영애가 원하면 하게 될 걸세.”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있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점은 선선대 대공에게 있어 현재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내가 도와주지.”
“저는 발레리안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게. 크리스나 영애는 정말로 발레리안과 혼인이 하고 싶지 않은 건가? 아니면 그놈이 결혼은 싫다고 하니까,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건가.”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를 떠보듯 말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의 말이 푹, 아테니아를 찌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던 곳을 찔려,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이미 한 번 결혼을 결심했었던 걸 보면, 크리스나 영애가 원래부터 비혼주의자인 것은 아니겠지.”
아테니아는 어제 선선대 대공과 발레리안 사이에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와 같은 곳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아, 아테니아는 하필 이 순간에 깨닫고 말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아직도 마음 한편으로 바람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테니아는 여전히 결혼을 원했다.
이미 한 번 결혼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발레리안이라면 크리스나 영애와 결혼하고 나서 영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지도 않겠지.”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레리안과의 결혼을 상상하게 되었다.
선선대 대공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말을 더했다.
“발레리안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크리스나 영애에게 매우 잘해 줄 터이고.”
아테니아는 깨달았다.
그냥 결혼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발레리안과 결혼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관없이 언젠가는 꼭.
그리고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아테니아에게 그녀가 꿈꾸던 특별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머리로 명확하게 인지하는 순간, 아테니아의 안색이 나빠졌다.
분명 발레리안에게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자신이 있다고 장담한 것이 그녀가 아니던가.
심지어, 아테니아는 지금 충분히 행복했다.
더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엄연히 그녀의 욕심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아테니아의 마음은 그녀에게 더한 욕심을 내게 했다.
이건 분명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 절대 바라지 않던 일일 터였다.
그녀는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날 겪은 한 번의 거절, 그 후에 있던 아테니아의 결혼과 이혼.
발레리안과 그녀는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이제야 서로 만날 준비가 된 사이였다.
그래 놓고 인제 와서 결혼이라는 문제 하나 때문에 다시 관계를 뒤틀기에는, 이미 아테니아가 겁이 너무 많아진 뒤였다.
그래서 그녀는 돌연, 더는 이 자리에 있기가 겁이 났다.
아테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유였다.
“…크리스나 영애?”
선선대 대공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당연했다.
방금까지 이야기를 잘만 듣고 있던 아테니아가 갑자기 무언가 급한 사람처럼 구니, 선선대 대공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테니아가 툭하니 말했다.
선선대 대공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대화 중에 이게 무슨….”
선선대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살면서 이런 무례를 당해 본 적도 없거니와,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테니아는 예법이 완벽했다.
그런 그녀가 예법도 깡그리 무시하고 이렇게 구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 빈켄티우스 경께서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치겠습니다.”
선선대 대공의 반응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테니아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로 저를 부르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테니아는 자신이 선선대 대공의 충동질에 넘어가게 될까 봐 무서워졌다.
결혼과 아이.
그 두 가지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그녀와 무언가의 관계가 되기를 저어해 왔던 발레리안이었다.
아테니아는 자신이 그것에 욕심을 가지는 순간, 그들의 관계가 틀어지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녀는 발레리안과 이전처럼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되기 싫었다.
“잠시만, 크리스나 영애! 분명 영애도 결혼하고 싶은 것이….”
“…그럼, 안녕히 계세요. 빈켄티우스 경.”
아테니아가 다급하게 선선대 대공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후 아테니아는 선선대 대공이 그녀를 잡을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잠깐, 기다리게…! 대화는 마저 하고 가야….”
선선대 대공이 어안이 벙벙해져 그 모습을 마냥 바라만 보다가, 뒤늦게 일어나 아테니아를 쫓았다.
그러나 선선대 대공이 응접실을 벗어나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시는 짓입니까!!!”
발레리안이 잔뜩 화가 난 채로 성큼성큼 선선대 대공과 아테니아의 쪽으로 다가왔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제 뒤로 숨기며, 선선대 대공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 없는 사이에 제 연인을 불러들이셨습니까. 제 허락 없이 보낸 청혼서는 또 무엇이고요!”
제가 없는 사이에 벌어진 일에 발레리안의 신경은 최고조로 곤두서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의 고함에 움찔한 것은 선선대 대공이 아니라 아테니아였다.
본래, 청혼서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가문의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선선대 대공의 행동을 탓하는 것이,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밀어붙여서 그런 것으로 느껴졌다.
아테니아는 하고 싶고, 발레리안은 하기 싫은 결혼.
그 명확한 사실에 그녀의 안색이 점점 더 나빠졌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그런 아테니아의 표정을 완벽히 오해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빈켄티우스를 망가트리겠다던 그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만으로도 선선대 대공은 발레리안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크리스나 영애와 너의 결혼을 허락하려 했을 뿐이다!”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발레리안과 선선대 대공 사이에 언쟁이 오갔다.
그럴수록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치게 되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리안, 빈켄티우스 경, 저 먼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결국, 아테니아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한 채로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타운하우스를 나섰다.
“…테나!”
선선대 대공과 끝나지 않을 말다툼을 이어 가던 발레리안이 놀라 헐레벌떡 아테니아를 쫓아 나왔다.
“잠시만요, 테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면 다 제가….”
“아니요, 리안!”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는 놀라 제 입을 한 손으로 막았다.
발레리안이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제 속내를 들킬까 봐, 그녀의 신경은 잔뜩 날카로워져 있었다.
“…테나? 진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전에 없이 예민한 아테니아의 반응에 발레리안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