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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71화 (71/111)

71. 강수 (1)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린 탓에, 아테니아는 불편하게도 선선대 대공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선선대 대공은 뻔뻔하게도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그녀가 내온 차를 대접받는 것이 당연한 사람처럼 마시고 있었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오신 건지 말씀해 주시지 않을 건가요?”

결국, 아테니아가 아무 말도 없는 선선대 대공을 재촉했다.

비로 인해 발레리안의 도착은 늦어지고 있었고, 계속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자니 너무 답답한 탓이었다.

“쯧, 어차피 발레리안을 불렀을 게 아니냐. 오면 같이 들으면 되지, 성질이 급하구나.”

선선대 대공이 혀를 끌끌 차며 아테니아를 타박했다.

그녀의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기별도 없이 찾아오신 분께 성질이 급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아테니아는 선선대 대공의 타박에 지지 않았다.

그녀는 급하기로 따지자면 허락도 맡지 않고 다짜고짜 밀어닥친 선선대 대공이 더한 것이 아니냐며 역으로 돌려주었다.

“…하여간, 되바라진 것.”

선선대 대공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못마땅하게 아테니아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으로 끌끌 혀를 차기까지 했다.

“이왕 되바라진다고 생각하시는 것, 그렇다면 할 말 하겠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아테니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을 처음부터 신분으로만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선선대 대공이었다.

그녀는 그런 상대에게 잘 보이려 굳이 애쓸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혈통이 어쩌니저쩌니 하시면서 따지시는 것, 솔직히 낯부끄럽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선선대 대공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단언컨대, 그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구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선선대 대공은 대단히 오만하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고, 심지어 거기에 혈통과 권력까지 뒷받침되었다.

그러니 감히 그에게 누가 이런 말을 직언으로 했으랴.

발레리안조차도 선선대 대공에 이렇게 말을 하지는 못했다.

물론, 생각을 못 해서가 아니라 선선대 대공만 보면 너무 화가 나기 때문이었지만.

“이 시대에 그런 인식은 밖으로 티 내지 않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대놓고 티 내시는 거, 빈켄티우스 경께도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테니아가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빈켄티우스 경께서 자꾸 그렇게 굴으시면, 리안이 창피해지지 않습니까.”

아테니아는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 대신 그 혈육이 부끄러워지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제 연인이 왜 빈켄티우스 경 때문에 그런 억울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쾅!

그 순간, 선선대 대공이 자리를 박차고 거세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말을 쏟아 냈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그딴 망언을 입에 담아! 그 녀석이 창피한 건 나야! 그놈의 어미가 천한 핏줄이 섞여서…!”

“빈켄티우스 경!”

그러나 아테니아는 선선대 대공의 말을 끊어 버렸다.

무수한 경험으로, 헛소리는 중간에 듣지 않는 게 답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이 본디 부끄러운 것이라는 점을 모르시는 건 알겠는데, 무지함을 티 내실 필요는 없지 않으신가요?”

물론, 아테니아도 조금 흥분해 버린 건 사실이었다.

속으로만 빈정거리며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 버렸으니까.

이게 다, 선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을 두고 창피하다며 깎아내린 탓이었다.

그 탓에 다혈질 같은 그녀의 성격이 폭발해 버리지 않았던가.

“하! 하여간 요즘 것들은 혈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아테니아의 반박에 선선대 대공은 도리어 본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오히려 마치 그녀가 무지한 것처럼 몰아갔다.

그것을 또 끊어 내고, 아테니아가 불쑥 물었다.

“혈통이 왜 중요한데요?”

“……뭐?”

순간, 선선대 대공이 멍하니 반문했다.

혈통이 왜 중요하냐니.

그런 것을 그가 생각해 봤을 리 없었다.

선선대 대공에는 혈통이 그 자체로 너무나 긴중한 것이었으니까.

“혈통이 머리를 똑똑하게 만들어 주나요? 혈통이 돈을 더 잘 벌게 해 주나요? 혈통이 성격을 더 좋게 해 주나요? 혈통이….”

“그만!”

아테니아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듣다가 못 한 선선대 대공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런다고 자기가 할 말을 하지 않을 아테니아는 아니었지만.

“왜요? 왜 대답을 못 하시는데요? 혈통이 그토록 중차대한 문제라면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요?”

선선대 대공이 이를 악물었다.

혈통은 중요하다.

정말 중대하기 그지없는 문제인데… 이상하게 아테니아가 저렇게 세세하게 따지고 드니 정작 할 말이 없었다.

“보세요. 빈켄티우스 경께서도 왜 꼭 혈통이 뛰어나야 하는지 모르시잖아요? 그런데 알지도 못하시는 걸, 왜 그렇게 고집하세요?”

아테니아가 조곤조곤한 말로 선선대 대공의 고집을 지르밟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일순, 자신은 어쩌면 죽어서 입만 동동 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흥! 입만 살아서는!”

결국, 선선대 대공은 이렇다 할 대답을 찾지 못하고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순간, 발레리안이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할아버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선선대 대공은 처음으로 발레리안의 등장에 안도하고 말았다.

발레리안의 어조는 한없이 딱딱했으나, 부드러운 어투로도 제 할 말 다 하는 아테니아보다 대하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리안! 이 빗속에 말을 달려서 온 거예요?!”

발레리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테니아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레리안은 소나기를 뚫고 왔음을 숨길 수도 없게 쫄딱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얼른 제미니에게서 수건을 받아 들었다.

아테니아가 수건으로 발레리안을 감싸 주면서, 그를 핀잔했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 데 말을 타면 어떻게 해요!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테니아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선선대 대공을 보며 굳어 있던 발레리안의 표정이 절로 풀어졌다.

발레리안은 도리어 기가 죽어 시무룩한 아이 같은 얼굴이 되어 그녀에게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테나. 마음이 워낙 급해서….”

소피아에게서 선선대 대공이 갑작스럽게 아테니아를 찾아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발레리안은 거의 겁에 질렸었다.

선선대 대공이 그녀에게 어떤 폭언을 퍼부을까 걱정이 됐다.

아테니아가 선선대 대공으로 인해 질려서, 저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고 할까 봐 발레리안은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비 오는 날에 말을 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녀의 저택으로 재빠르게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마음이 급하다고 매번 이런 식으로 목숨을 걸 거예요?”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얌전히 마차 타고 다녀요.”

“예, 테나.”

아테니아가 꾸짖는 동안, 발레리안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선선대 대공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선선대 대공이 아무리 뭐라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발레리안이었다.

그런데 저보다 어리고 작은 아테니아가 조금 뭐라고 했다고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주 가관이구나, 발레리안.”

선선대 대공은 그런 속내를 참지 않고 드러냈다.

그는 본디 제 마음대로 구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므로.

“빈켄티우스 대공이 되어서 겨우 그런 꾸중이나 듣고 있는 것이냐?”

“꾸중이 아니라 연인을 걱정하는 겁니다, 빈켄티우스 경.”

하지만 이번에도 아테니아는 그런 선선대 대공의 제멋대로 구는 태도를 막아섰다.

“설마, 빈켄티우스 경께서는 굳이 자신을 걱정하는 이를 이겨 먹고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선선대 대공의 말문은 또다시 막혀 버렸다.

그 모습에 발레리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발레리안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든 비꼬면서 대답했던 선선대 대공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모습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커다래진 발레리안의 눈과 선선대 대공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선선대 대공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손자의 앞에서 어린 영애의 말에 찍소리도 못 하다니.

이런 창피도 창피가 없었다.

“……어린 것이 매번 어른의 말에 버릇없이 꼬박꼬박 따지고 들어? 너는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그로 인해 자존심이 상한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의 부모를 들먹였다.

발레리안이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선선대께서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괜찮아요, 리안.”

그러나 아테니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발레리안을 다독인 후, 선선대 대공을 쳐다봤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죠. 하지만 자식이 원래 모두 부모의 뜻대로 크는 건 아니잖아요?”

아테니아는 나이 든 어른들의 행동 유형이 왜 이리도 하나같이 비슷한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불리하면 버릇없다면서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하지 마세요.”

다들 비슷하게 구니까, 아테니아가 자꾸 비슷한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게 아닌가.

“어른을 공경하는 건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그렇게 강요하셔서 나올 게 아니잖아요?”

아테니아가 정곡을 파고들자, 선선대 대공의 입이 다물렸다.

발레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신기한 광경을 넋놓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제가 그녀를 보호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오판이었던가를 새삼 깨달았다.

이토록 아테니아는 스스로를 잘 지키고 있었는데, 자신이 오만했음이라.

“…하, 불쾌해서 이 자리에 더 있기 싫구나! 내 할 말이나 하고 가야겠다!”

선선대 대공이 홱 말을 돌렸다.

말로는 아테니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인 것이다.

“너희, 결혼해라!”

그리하여 선선대 대공이 다짜고짜 자신이 찾아온 본론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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