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자업자득 (1)
어디인지 모를 저택의 안,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나 쪽에서 아무 말이 없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황태자가 못마땅함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을 벌인 이후로 크리스나 가문에서 이렇다 저렇다 할 연락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일주일째였으니, 기껏 일을 벌인 황태자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조, 조금만 기다리면 연락이 올 겁니다.”
클라이브가 말을 더듬으며 난감함을 애써 숨겼다.
솔직히, 그도 크리스나 백작이 진즉에 연락을 취해 올 줄 알았다.
클라이브와 아테니아의 이혼을 막기 위하여, 바람피운 그를 직접 유치장에서 꺼내 준 것이 백작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니, 무엇보다 돈에 진심인 크리스나 백작으로서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으면! 그게 벌써 7일이 지나지 않았나! 칼스이턴 후작은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나!?”
황태자가 기어코 신경질적으로 성질을 터트렸다.
애초에 인내심이 깊지 않은 베르나도였다.
심지어 황태자는 현재 발레리안에 대한 복수심에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다림이 기약 없이 길어지니, 베르나도의 인내심은 심지가 다 타 버린 초처럼 짧아져 있었다.
솔직히 황태자는 크리스나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를 유일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존재.
아테니아 크리스나가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로 인해 불행해져서, 그 또한 불행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나도는 크리스나가 망하기보다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와 재혼하기를 바랐다.
황태자의 수하가 알아 온 바에 의하면, 아테니아는 현재 그녀의 집안과 반쯤 절연한 상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크리스나 백작 부인까지 오히려 화를 내고 저택을 나가 버렸다고 들었다.
베르나도로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 따위, 망해 버리든 간 말든 간 제 인생을 선택할 거 같았다.
황태자는 아버지와의 정이 그다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베르나도를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기껏 클라이브를 끌어들여 칼스이턴의 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거래까지 해 가면서 일을 벌였는데, 수확이 없을 것 같지 않은가.
“…크리스나에 재촉하는 연통을 넣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클라이브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답답한 제 속을 참지 않고 말했다.
“딱, 3일일세. 3일 안에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대와 내 거래도 끝이야.”
“…황태자 전하!”
클라이브가 고개를 벌떡 들며 황태자를 불렀다.
현재까지 칼스이턴의 이름으로 크리스나의 것을 빼앗아서 벌인 모든 사업은 황태자가 지원해 주는 돈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나도도 바보는 아니어서, 이 금액 전부를 지원해 주지는 않았다.
이 일에는 클라이브가 일을 제대로 성사되게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성공 보수라는 것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받지 못하면 황태자가 지원해 준 돈 외에 전부가 또다시 칼스이턴의 빚이 되는 셈이었다.
아테니아의 예상대로, 칼스이턴에는 이 모든 일을 벌일 돈이 없었다.
심지어 거기서 황태자가 갑자기 발을 뺀다고 생각해 보라.
이 모든 일의 수습을 칼스이턴이 해야 하는 것이다.
특허를 내는 과정에는 그것이 특허를 낼 만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데에 돈과 시간이 상당히 들었다.
그 돈과 시간을 줄여 줄 수 있는 게 황태자의 권력이었다.
클라이브가 특허를 내겠다고 뻐길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황태자가 가진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분노하여 칼스이턴 영지의 세율을 임의로 조정한 것은 황태자도 건드릴 수 없는 문제였다.
황제의 명령을 황태자가 번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즉, 이 또한 본디 황태자가 돈으로 해결을 해 주기로 한 터였다.
결론적으로 현재, 황태자에게 칼스이턴의 명운이 달린 것이었다.
그러니 클라이브로서는 황태자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자가 이 상황에서 발을 빼 버리면, 칼스이턴은 정말로 아예 수도에서 발을 빼야 할지도 몰랐다.
수도에 있는 저택은 모조리 값비쌌고, 그 관리비조차 어마어마했다.
빚더미에 앉게 될 경우 가장 먼저 처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앙 귀족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더없이 굴욕적인 일이었다.
“3일은 너무 촉박합니다…! 일주일… 일주일만 더 주십시오.”
황태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클라이브는 이미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베르나도는 이 상태에서 그를 더욱 몰아가 봤자, 자신에게 그다지 좋을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특별히 칼스이턴 후작의 말을 들어주지. 일주일. 그게 내가 주는 마지막 기한일세.”
그래서 황태자는 자비로운 척, 클라이브의 말을 수락했다.
그깟 4일, 사실은 굳이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클라이브가 재차 허리를 숙였다.
그는 마치 영원한 충성이라도 바칠 것처럼 열렬히 황태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사실 클라이브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안에서 원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만 아니었어도, 황태자에게 이렇게 비굴하게 빌어야 할 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클라이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녀와 재혼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불행하길 바랐으니까.
똑똑똑.
그러나 들려온 노크 소리가 황태자와 클라이브의 계획에 어깃장을 놓았다.
왜냐하면, 다급하게 소식을 물어 가져온 듯한 황실 부기사단장이 말을 전해 왔기 때문이다.
“큰일 났습니다, 황태자 전하. 크리스나에서 아무래도 향수의 배합을 바꾼 듯합니다.”
***
이튿날, 아리에타 상단에서 기어코 특허를 신청했다.
특허는 놀랍도록 빠르게 처리되어, 다음날 곧바로 클라이브는 특허권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본래는 특허권을 내겠다고 크리스나 백작을 협박할 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나 상단에서 향수의 배합법을 바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황태자와 클라이브는 다급해졌다.
크리스나에서 향수의 배합에 관한 특허권을 먼저 신청하면, 그들이 벌인 일이 모두 말짱 도루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태자와 클라이브는 크리스나 상단에 심어 둔 첩자에게서 다시 배합법을 빼내어 빠르게 특허를 신청해 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크리스나 백작에게는 로열티를 받고 향수의 생산을 허가해 주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리하여 클라이브는 만약 향수 생산 허가를 받고 싶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크리스나 저택에 연통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러기를 이틀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나 백작이나 아테니아로부터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클라이브는 초조해졌다.
황태자가 준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그 일주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왜 크리스나 쪽에서는 감감무소식이란 말인가!
클라이브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특허 신청을 위하여 시제품으로 만들어진 향수를 들고 그날 밤 열리는 파티에 급하게 참석하기로 했다.
저택에 와 있는 초대장들의 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칼스이턴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수도 사교계에 돈 탓에 선택권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니까.
어차피 오늘 파티에 참석하는 목적은 명확했다.
크리스나 상단이 협상하러 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향수를 판매할 것처럼 굴어서 크리스나 쪽을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파티의 질이 어떻든 어떠하랴.
목적을 이루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클라이브는 멀끔히 꾸민 채로 파티장에 들어섰다.
그의 생김새는 어쨌든 제법 멀끔했기에, 젊은 영애들에게 호감을 사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클라이브는 제가 만든 향수를 소개하는 척, 영애들이 입소문을 내 주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시향을 해 보도록 권했다.
크리스나에서 향수를 고심해서 만든 만큼, 향은 매우 뛰어났고 반응도 좋았다.
클라이브는 크리스나와 협상을 하는 김에, 이번 향수 사업의 수익 일부도 칼스이턴과 나누어야 한다는 조건이라도 내걸까 고심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기어코 거기까지 탐욕이 미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꿈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좌절되었다.
“꺄악…! 이게 뭐야!”
시작은 파티장 한편에서 들려온 비명이었다.
그곳을 돌아보니, 한 영애의 손목부터 시작하여 그 위쪽으로 쭉 두드러기가 나 있었다.
그런데 비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 다른 몇몇 영애의 팔이나 귀 뒤쪽에도 두드러기 혹은 붉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비명에 영애들을 돌아볼수록, 클라이브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 영애들은 전부 그가 가져온 향수를 시향해 본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향수 때문임을 확인해 주듯이, 두드러기와 붉은 반점은 전부다 향수를 뿌린 곳에서부터 나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이상이 일어난 영애들 또한 그 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들이 곧, 클라이브를 발견하고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칼스이턴 후작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제 피부 어쩌실 거예요! 후작님이 권하신 향수를 뿌리고 이렇게 흉해져 버렸잖아요!”
“간지러워 죽겠어요! 대체 우리한테 뭘 권하신 거예요!”
클라이브를 둘러싸고 비난이 빗발쳤다.
그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접어들었다.
본래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이것은 이미 크리스나에서 임상 실험까지 모두 끝낸 제품이 아니던가!
클라이브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어 완전히 어쩔 줄을 모르고 비난을 듣고만 있었다.
“당장 상황을 책임지지 않으면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어요!”
클라이브가 계속해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참다가 못한 한 영애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