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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67화 (67/111)

67. 잔여물 (9)

응접실에서 아테니아를 기다리던 발레리안은 백작 부인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셨습니까, 크리스나 백작 부인.”

발레리안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크리스나 백작 부인 또한 그에 맞춰 인사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백작 부인에게서 자신을 과도하게 낮추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은 딸아이를 대신하여 발레리안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저 때문에 아테니아의 위신이 낮아지길 원하지 않았다.

“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발레리안의 말은 이런 작은 행동만으로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백작 부인을 풀어 주었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오래 기다리셨는데, 앉으세요. 차라도 드시면서 저와 대화를 나누고 계시면 테나가 금방 나올 겁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발레리안에게 자리를 권했다.

제미니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식은 차를 내어 가고, 새로운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말씀 놓아 주십시오, 그게 편합니다.”

발레리안을 아는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기함했을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신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 전하께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우아하게 차를 따르던 백작 부인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부정에 발레리안은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흠… 크리스나 백작 부인께서 불편하시다면, 저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축 처진 눈꼬리와 처연한 표정은 정말로 발레리안이 대단히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아테니아와 친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가면을 쓰고 사람 좋은 척 잘만 살았던 발레리안이었다.

즉, 이런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쯤이야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평상시에는 굳이 타인의 호감을 사거나 그럴 필요성 따위를 못 느껴서 주로 무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럼… 천천히,… 편하게, 하겠네.”

그러나 얌전한 귀부인으로만 살았던 백작 부인은 그런 발레리안의 태도에 움찔하며 넘어가 버렸다.

그녀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에게 말을 놓았다.

그제야 발레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예, 천천히 편하게 해 주십시오.”

더없이 기쁜 듯, 눈꼬리가 휘어지는 미소였다.

워낙 잘생긴 얼굴이었기에, 발레리안이 그렇게 웃자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우리 애가 생각보다, 미모를 많이 보는 아이였나 보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이가 들었어도 예쁘고 잘생긴 이들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보고 살아온 것이 많았기에 심미안이 더 발달하는 걸지도 몰랐다.

“음… 그건 저도 그러니 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발레리안이 능청스레 대답했다.

“솔직히… 테나가 어머님을 닮아서 아름다운 건 사실이니까요.”

“어머….”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작은 감탄사를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무뚝뚝한 크리스나 백작과만 살다가, 입 안의 혀처럼 구는 발레리안과 대화를 나누니 새삼 이토록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레리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대공 전하께….”

“발레리안 혹은 리안이라고 불러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발레리안은 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얼른 끼어들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내뱉은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백작 부인이 이 저택에 있다는 것은, 어쨌든 아테니아와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소리일 터였다.

그러니 크리스나 백작 부인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아… 알겠네, 그러니까… 리안.”

백작 부인이 아까보다 더욱 어색한 말투로 발레리안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그는 마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웃어 주었다.

백작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살가운 이가 아테니아의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자네에게 늘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오래도록 담아 두었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실은, 지난번 발레리안을 봤을 때부터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의 옆에 있는 자신의 딸이 정말로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부모가 못나서, 딸아이의 행복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우리 뜻만 강요했어.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테나는 지금도 칼스이턴 후작 따위와 강제로 살고 있었어야 했을지도 몰라.”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도움을 받았다고 시시콜콜 크리스나 백작 부인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이혼 이야기를 꺼낸 이후, 아테니아와 크리스나 백작 부부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백작 부인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저희들이 바람피운 딸의 남편을 유치장에서 풀어 주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아테니아의 이혼 소송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 힘을 써 주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테니아를 위해 힘을 써 줄 수 있는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제 딸의 이혼에 발레리안이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자네보다 대단하지는 못하지만, 살면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 주게. 내 딸을 크게 도와줬는데, 부모로서 뭐라도 해 주고 싶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부모가 초래할 뻔한 딸의 불행을 발레리안이 막아 준 셈이었다.

“면목 없지만… 차마, 어떤 방법으로 그 은혜를 갚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말을 꺼내 본 걸세.”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언행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조심스러웠다.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유순하고 유약하지만, 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

백작 부인의 그 모습이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대답하면서, 발레리안은 목이 메고 말았다.

“그렇지만, 은혜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저, 제가 원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어쩐지, 발레리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독하게 그리워졌다.

“두 분, 저를 빼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깊게 하고 계셨어요?”

그 순간,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발레리안은 그리움에 그대로 잠식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가 적절한 때에 등장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면, 추태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테나가 어머님을 닮아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발레리안이 능숙하게 아테니아의 물음에 대답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도 모른 척,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리안이 이야기를 듣기 좋게 잘하더구나. 그래서 재미있게 대화하고 있었단다.”

벌써 발레리안의 애칭을 부르고 있는 제 어머니에 아테니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가 알기로 그나 어머니나 그다지 사교성이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레리안이 단번에 백작 부인에게 애칭을 허락한 것도 신기했고, 허락했다고 하여 곧바로 불러 주는 어머니도 신기했다.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아까 펑펑 운 게 언제냐는 듯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제가 좋아하는 남자와 제 어머니가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는데 기분 나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리안이 아무래도 저를 찾아온 건… 들은 거죠? 클라이브 칼스이턴이 크리스나에 저지른 짓이요.”

아테니아가 자리에 앉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이 좋은 기분을 누리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사안이 시급했다.

“예, 이렇게 허락 없이 찾아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걱정되어서….”

발레리안이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황태자 전하 쪽에서 개입한 건가요?”

아테니아가 추측한 바를 꺼내 놓았다.

그녀가 최근 본 클라이브는 이런 짓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향수 사업에 대한 정보들을 훔치거나 새로운 상단을 가짜로나마 꾸리는 것, 그리고 향수를 만드는 일까지 모두 결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도박 빚에 시달리던 클라이브가 갑자기 어디서 이런 돈이 나서, 어떻게 크리스나가 비밀리에 진행하던 사업을 알아냈겠는가.

크리스나도 오랜 세월 허투루 사업을 벌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 크리스나 상단의 보안을 뚫고 정보를 빼내 가려면, 적어도 고위 귀족 이상의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칼스이턴을 팽했다.

그럼 이 상황에서 아테니아를 건드릴 만큼 어떤 악감정을 가질 만한 연결 고리가 있고, 또 권력을 가진 이는 하나였다.

황태자, 베르나도 클레르폰.

아테니아는 그가 이 사태의 범인이리라고 짐작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저 때문에 또다시 테나는 물론, 크리스나 가문까지 얽히게 되어 죄송합니다.”

발레리안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러자 아테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리안의 탓이 아니에요. 클라이브도 황태자 전하의 말에 기꺼이 응했으니까요.”

생각할수록 아테니아는 기가 막혔다.

그녀가 굳이 그 심정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보고 자기랑 재혼하면, 이번 사태를 없던 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더군요.”

아테니아의 말을 들은 발레리안의 표정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황실 인간들이나, 클라이브나 정말이지 끈질기게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에 대한 필요 없는 관심을 거둘 줄을 몰랐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생각해 본 게 있는데 혹시 도와줄 수 있겠어요, 리안?”

이번에는 아테니아가 먼저 발레리안에게 도움을 구했다.

애초에, 황태자를 상대하는 것은 절대 그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고집을 피울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아테니아는 필요하면 도움을 구하겠다고 한 스스로의 말을 이렇게 지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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